210화
24. 혼란들
도훈의 메시지는 지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오래 그러고 있을 수 없다는 말대로 그는 금세 손을 놓았고, 지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흉중에 칼을 숨긴 괴물을 바라보았다. 도훈의 환상 속에 있을 때 도훈이 지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듯이 지호 역시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왕에 관해 거론할 때에 도훈이 발산했던 것은 살의였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우선은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너를 잡아 두어야겠지?”
지호는 도훈의 말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했다. 본디 이야기했던 것처럼 보현이 알고 있는 경계 지나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과 여왕을 엿 먹일 방법을 알아내는 것. 후자의 경우는 좀처럼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도훈이 환각까지 써 가며 지호와 접촉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머뭇거리던 지호는 우선 안쪽 주머니에 든 예비용 충전기를 꺼냈다. 균열 소멸기에 도훈과 헤어졌던 그 순간 이후로 내내 품고 다녔던 물건이다. 지호에게는 별 쓸모가 없지만, 도훈에게는 유용할 도구이기도 했다.
“조태양 헌터님이 줬던 게 별로 쓸모가 없었죠?”
“엿 좀 먹어 보라고 준 것 같던데.”
도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지호에게서 새 물건을 받아 들었다. 여왕의 그림자에 가려진 괴물들의 세계에서 태양열로 전기를 충전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흔들어서 전기를 내는 종류의 주먹만 한 충전기를 받아 든 도훈은 열심히 그걸 흔들며 즐거워했다. 지호는 그의 기기가 충전되기를 기다리며 아래를 둘러보았다. 빼곡히 모여 있던 괴물들이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강한 괴물이신 줄은 몰라봤네요.”
“나도 이번 일 전까진 몰랐어.”
“다들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니겠죠?”
“아무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받들어 모셔야지.”
도훈이 앞서 헌터들을 재웠을 때와 달리 별반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에 지호는 조심스럽게 쓰러진 헌터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을 똑바로 눕히며 지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누가 봐도 도플갱어가 먼저 그들을 습격했고, 지원 나온 자들까지 기절시키며 지호를 억류한 상태다. 솔직히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던 환상이 아니었다면 지호 역시 당장에라도 달아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고민했을 것이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보현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지호는 안도했다. 보현에게 녹색 빛을 흡수시키며 지호는 감지 파장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깨끗했다.
“본래라면 진작들 달아났을 거 움직이느라 애먹었지. 이제 어쩐다. 나 혼자 그 이지호 헌터와 맞부딪치면 승산이 없는데.”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호를 고꾸라뜨릴 수 있는 능력자가 하는 말이라 더 아니꼬웠다.
“그 헌터를 찾아내면 여왕과 어떻게 접촉할 생각이었죠?”
“찾을 것 없다. 그쪽에서 찾아올 테니.”
“여왕의 호위대를 보내서?”
“아니야. 진짜로 찾아온다는 의미다. 다른 세계로 넘어갈 단서를 찾게 된다면 여왕은 더 이상 우리 세계를 이용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섬뜩한 발언이었다. 여태 균열 쪽으로 넘어오던 괴물들이 하찮다 못해 약한 괴물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그랬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는지 도훈이 들고 있던 핸드폰에 불이 켜졌다. 도훈은 싱긋 웃더니 지호 쪽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번호 달라는 건가. 지호는 머뭇거리며 자기 연락처를 찍어 주었다. 그는 금방 기기를 돌려받곤 익숙하게 그걸 조작했다.
[민도훈 : 살 것 같네. 이거 충전하느라 한나절 걸리고 쓰는 데는 삼 분 걸렸었다고.]
[이지호 : 그 계정은 뭐예요?]
[민도훈 : 지문 인식으로 메신저 계정 정도는 만들 수 있더라. 이 몸 유지 잘해야겠어. 여러 가지로 쓸 만하잖아.]
[이지호 : 약속 어겨서 미안해요.]
도훈은 화면에서 눈을 들어 지호를 응시했다. 머뭇거리던 지호는 용기 내어 몇 자 더 적어 내려갔다.
[이지호 :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는 곳으로 넘어와서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겠다고. 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벌써 게이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민도훈 : 나한테 다 말하지 마. 너 나를 어디까지 믿는 거야? 나야말로 여왕의 끄나풀인 걸 속였는데. 피차일반이지.]
[이지호 : 처음부터 저를 속일 목적으로 다가왔던 건가요?]
[민도훈 : 그럴 거였으면 대놓고 유혹하지 않았을까?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지호는 인상 쓰며 그를 노려보았다. 킬킬거리는 소리로 웃은 도훈은 이제 안 그러겠다며 손을 내젓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민도훈 : 나를 믿지 마. 다른 괴물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믿으면 안 되지.]
[이지호 : 저를 속일 테니 믿지 마라, 그런 선언이에요?]
[민도훈 : 사람도 그렇게 아무나 믿고 그러나? 사기당하기 딱 좋네. 친한 사람이 돈 빌려달라고 해도 함부로 턱턱 주고 그러지 마. 알겠어? 내가 서 달라고 해도 보증 같은 것도 서는 거 아니야.]
도훈은 지호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보곤 진짜 안 그러겠다며 그제야 제대로 된 용건을 꺼냈다.
[민도훈 : 스스로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네 기운이 여왕과 아주 비슷해졌어. 지금의 여왕보다는 초창기의 여왕에 가깝지.]
[이지호 : 뭐가 다른데요?]
[민도훈 : 들어 봐.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너희를 사냥하고 잡아먹는 것 같아? 아니면 다른 곳도 여러 차례 들렀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어 이쪽으로 발을 돌린 것 같아?]
지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들린 연약한 전자기기를 부수기 전에 가까스로 힘을 뺀 지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지호 : 이쪽 말고 많은 세계가 있나 보죠?]
[민도훈 : 많지. 아주 많아. 하지만 그걸 오가는 방법을 아는 것들은 아주 소수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왕은 한때 그와 같은 짝을 만나 아주 많은 자식을 가졌지. 하지만 방랑하던 어느 세계에서 그의 반쪽을 잃었어. 죽은 짝에 비하면 여왕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 세계의 무자비하던 지배자는 여왕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생명의 근원을 앗아 갔지. 그 이후로 여왕과 그가 자기 몸을 깎아 만들어 낸 자식들은 자손을 낳지 못하게 됐어. 곤란한 일이었지. 수가 불어나지 않고, 강해지는 데 한계가 생겼거든.]
옛날이야기도 이 정도로 허무맹랑하게 시작하지는 않았을 텐데. 지호는 몇 번이나 중간에 끼어들까 하다가 손을 거둔 채 도훈의 설명을 들었다.
[이지호 : 초창기의 여왕이라는 건 그 뭔지 모를 우주적 싸움에서 패배하기 전의 여왕을 말하나 보죠?]
[민도훈 : 맞아. 그때 싸움에서 지면서 목숨 대신 힘을 내놓은 여왕은 한 가지 꼼수를 부렸는데, 그의 힘에 원천에 가까운 것을 자기 세계에 산소처럼 퍼트려 둔 거야. 어떤 의지에 반응하고, 나름의 기호가 있으며, 그 속에 오래 머물면 여왕의 것들처럼 변이하게 되는 바로 그 힘.]
지호는 숨을 삼켰다. 이형 에너지다. 다른 설명일 수 없었다.
[민도훈 : 정작 그걸 잃은 까닭에 여왕 본인이 예전처럼 자애롭고 선한 존재가 아니게 된 건 불행한 일이었지. 분신과도 같은 힘에 너무 많은 것을 담은 거야. 짝을 잃고 난 뒤에 여왕이 만든 것은 모두 자신의 피와 살에서 비롯된 그의 모조품에 불과해. 작고 약한 모조품이지. 여왕은 그것들이 서로 먹고 먹히게 두었고, 그 가운데서 돌연변이가 나타나면 그것을 자기가 먹었어. 나처럼.]
[이지호 : 그게 무슨…….]
[민도훈 : 네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를 먹어 내 능력을 얻으려던 무도한 짓거리들 말이야.]
그 주체가 막연히 균열 밖 포식자들일 것으로 생각했었던 지호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도훈이 도망치려 했던 것은 괴물들이 세계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에 군림하는 최상위 포식자, 여왕에게서 달아나려 한 것이지.
목까지 치밀어 오른 감정을 간신히 눌러 삼킨 지호는 이윽고 서글픔을 느꼈다. 도훈의 삶에는 오로지 괴로움뿐이었을 것 같아 도무지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지호의 얼굴을 흘깃 본 그는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나란히 앉아 핸드폰을 두드리는 모양새가 웃기지 않냐며 웃은 그는 태연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이 균열의 괴물들은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우리 사이에 도는 어떤 소문이 여전히 건재하거든.”
“좋아해야 하나요?”
“어차피 다른 헌터들이 균열에 들어오려면 며칠 더 필요하잖아. 그사이에 수가 얼마 안 되는 너희가 우릴 막는 일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거란 이야긴데 반갑지 않아?”
막강한 괴물 한 놈보다야 약한 놈 여럿이 낫기는 할 것이다. 지호는 도훈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여왕에게 숨기고 싶은지 가늠해 보았다. 대략 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때, 그리고 지호 본인과의 사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인 것 같다. 지금처럼 조롱 조의 비아냥거림을 건넬 때는 말을 조심하지 않는다. 그러는 편이 여왕 보기에 자연스러우니까.
지호는 도훈의 행동에 맞추어 적대감을 드러냈다.
“강한 놈이건 약한 놈이건 상관없어요. 내가 다 막을 테니까.”
“네가? 여기 묶여 있는데 무슨 수로?”
지호는 침묵하며 도훈을 노려보았다. 날 선 반응과 반대로 도훈의 손이 빠르게 문장을 만들었다.
[민도훈 : 아마도 내내 이럴 거야. 겉으로는 너를 배척하고 너희를 공격해야 할 거고. 나를 원망해도 상관없어. 오히려 그렇게 하는 편이 이롭겠지. 헌터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여길 거고. 나와 척을 짊으로써 네 친구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이지호 : 다른 사람들도 우리 대화한 내역을 보면 금방 이해할 거예요. 당신이 괜찮은 괴물이란 사실을 설명할게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면 훨씬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언니가, 언니를 노리는 괴물들이 있는 걸 알면 함정을 팔 수도 있고. 또…….]
[민도훈 : 나는 어차피 오래 못 버텨. 여태까지 살아 있던 것도 기적이야.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구차한 삶을 살며 오랫동안 버텼어. 이대로 그냥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나를 내던질 때마다 생의 집착을 보이는 본능이 다른 놈을 집어삼켰어. 강제로 살아남으면서 생각했었지. 나는 왜 사는 거지? 왜 죽지 못하는 건가?]
지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도훈은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많은 이들을 잡아먹었다고 했다. 즉, 자아를 잃을 정도로 약해진 도훈은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도록 본능에 새겨진 존재라는 의미다. 그가 원하지 않는데도 남을 죽이게 되는 삶. 지호는 눈앞이 흐려져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민도훈 : 오로지 그것뿐이었던 삶에 네가 이유가 되어 주었어. 나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이니 뭐니 하는 말들로 너와의 고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너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니게 되었지. 너와 함께 있으면 내가 뭔가 괜찮은 존재가 된 것 같았어. 너를 보호하고 너보다 더 약한 인간을 도우면서 생각했지. 살아 있다는 건 이런 순간들의 연속이구나.]
[이지호 : 준영 씨가 도훈 씨를 또 보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지금은 병원에 있지만, 헌터가 될 거래요. 그래서 균열로 들어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 말고도 도훈 씨 편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민도훈 : 그러지 마. 나는 어차피 오래 못 버텨. 말했잖아.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죽게 되어도 너는 살겠지. 살아서 네 친구들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때 네가 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너희들 사이에서 배척당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아. 필요한 순간이 올 거야. 그때 나를 공격해. 할 수 있으면 죽여 달라고도 하고 싶지만 그건 너무 잔인한 말이겠지. 하지만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네게 줄게. 그렇게 하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