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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09화 (210/260)

209화

피가 튀었다.

벽이며 바닥 사방이 피였다. 붉은색뿐인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다른 괴물들의 피는 다채로운 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여력이 제게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여기며 보이는 것들을 정신없이 찢어발겼다. 이형 에너지를 길게 뽑아 송곳처럼 썼다. 오른손은 별다른 도구 없이도 다른 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지만, 왼손은 여전히 지호의 것이다. 보드랍고 쓸모없는 것.

손에 들린 송곳 같은 뿔로 괴물들의 약점을 내리찍는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가장 약한 부분이 보였다. 감지계 능력이 극도로 발현되면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

지호가 백 미터도 넘게 밀려오는 괴물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덕분에 약간 숨통이 트인 세 사람은 그제야 원군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웠고, 그것이 지호라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 죽어 가는 얼굴의 보현은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무모해…….”

보현은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겨웠는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세진이 다급히 몸을 돌려 보현을 받아 냈다. 엉겁결에 보현과 세진 사이에 끼인 지윤은 앓는 소리와 함께 축 처졌다.

“켁, 악성 균열 좆같음…….”

괴물의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호가 쌓아 둔 시체가 많아 벽이 생겼고, 덕분에 모든 방향에서 괴물을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다. 보현의 방벽에서 튀어나온 가시에 팔을 꿰인 채 버둥거리는 괴물의 목을 갈라 버린 지호는 놈의 시체를 빼내어 옆으로 던지며 다급히 세 사람과 접촉했다.

“괜찮아요? 다들 살아 있죠?”

“좀만 늦었으면 죽었을 듯.”

“아직도 안 끝났다는 게 환장 포인트예요.”

지호는 지윤의 말을 익숙하게 받아치며 웃었다. 다행이다. 늦지 않았다. 안도하며 그의 머리를 덮쳐 오는 괴물을 돌려 차기로 날려 버렸다. 다른 놈에게 휩쓸려 쓰러진 놈이 있던 빈 자리를 금세 또 다른 것이 채운다. 꾸물거리며 오는 놈들의 크기가 다 비슷했다.

이상한 일이다.

괴물들의 수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놈들의 생김새가 비슷하고 크기도 비슷하며 하는 짓까지 비슷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괴물 중에 인간형이 많다는 게 지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세진의 품에서 내려와 보현을 본격적으로 치료하던 지윤은 힘을 불어넣으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호 덕분에 괴물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건 다행이지만, 주동자가 보이지 않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오면서 다른 괴물은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다른 괴물? 아, 그 다른 놈들 조종하는 하얀 괴물들 말이죠? 안 그래도 몇 놈 잡았더니 머리에서 그것들이 떨어지던데.”

지윤과 세진은 어리둥절해하며 마주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다른 괴물이란 게 마름모꼴 정신계 괴물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지호는 옷을 질척하게 적신 핏물이 신발에 들어차는 것을 느끼며 인상 썼다.

“비슷한 놈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제가 놓치고 있는 게 뭐죠?”

“도플갱어요. 이놈들을 조종하는 놈이 바로 그겁니다. 이지호 헌터가 보고했던 코드 레드 투요.”

소민에게도 들었다. 그러나 도훈의 얼굴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것을 상기한 지호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가온 괴물의 오금을 걷어차 놈을 쓰러뜨리고 그 안면을 바닥에 갈아 버렸다.

“말을 듣긴 했는데 본 적은 없는…….”

무심결에 두 사람을 두고 내려온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호는 당황했다. 비행형 괴물들이 모조리 관교동 쪽으로 몰려가 있었는지 이쪽 하늘은 달려드는 놈 하나 없어 시야가 깨끗했고, 덕분에 지호는 거기에서 막 쓰러지는 소민과 뒷걸음질 치는 김 반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버티던 김 반장이 기어코 고꾸라지자 곧장 머리를 쪼갤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지호는 하마터면 엉뚱한 것을 공격할 뻔했고, 관성으로 움직이던 자기 팔을 멈추느라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했다. 보현의 방벽을 후려칠 뻔한 지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지금 김 반장님이 당한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여기 깔린 정신계 파장들에서 저를 좀 보호해 줄 수 있나요?”

보현은 힘겨운 눈짓으로 그렇게 했다. 지호는 둘로 갈라지려던 시야가 멀쩡하게 돌아오기 무섭게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괴물의 입천장에 이형 에너지 창을 통과시키며 몸을 바로 세웠다.

“우선 여길 벗어나요. 여러분을 구하러 온 거니까.”

가장 중요한 인력이었던 소민이 쓰러졌다. 지호의 염동력으론 세 사람을 다른 건물 위로 올려 두는 것이 다였다. 괴물들은 목적한 바를 잃지 않았는지 꾸역꾸역 건물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서로를 밟고 밟으며 벽을 기어오르는 모양새가 기괴하다. 절대로 멀쩡한 상태가 아님이 재차 증명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올라온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도훈이 보였다.

곁에 쓰러진 두 동료를 본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네 친구들을 좀 재웠어. 걱정하지 마. 잠깐 잠든 거니까.”

“왜 이러는 거예요?”

여러 의미 담긴 질문이었다. 도훈은 간신히 살아난 지호 곁의 세 헌터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역으로 물었다.

“약속하지 않았어?”

“이런 약속을 언제…….”

“나랑 했던 약속은 하나잖아, 지호 씨.”

더는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었기에 지호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도훈을 마주 보았다. 도훈이 검지로 허공을 긋자 건물 부근에 꾸역꾸역 모여들던 괴물들이 일순간 정신을 차렸다.

짐작했던 것보다 더 큰 소란이 벌어졌다. 괴물들은 서로를 짓밟고 물어뜯으며 공격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내달렸다. 온 골목골목 달려 나가는 놈들의 꽁무니를 보며 도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좀 편하게 이야기해 볼까? 듣는 귀가 많으면 이야기하기 불편하겠지.”

지휘하는 것 같은 가벼운 손짓. 보현의 고개가 고꾸라지기 무섭게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지호는 간신히 타이밍 맞추어 그들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말이 짧아진다는 건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지호가 눈을 부라리자 도훈은 어깨를 으쓱이곤 느긋하게 허공에 발을 디뎠다. 거기에 진짜 다리라도 있는 것처럼 공중을 천천히 걸어오며, 그는 위를 가리켰다.

“보고 오니 소감이 어때? 여왕께서 너희가 문을 열었다고 기특해 하시던데.”

“무슨 개소리예요.”

“아주 작은 문을 열 줄 알게 되었다면서. 그때 알았지. 네가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단 사실을.”

도훈의 걸음은 아주 느렸다. 지호는 그가 뒤에 쓰러진 세 사람과 도훈 너머의 두 사람을 동시에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지 가늠했다. 자기는 전투계가 아니라고 말하던 때와 달리 지금의 도훈은 상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무엇보다 지호는 정신 공격에 취약했다.

“게이트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게 부르나? 너희가 아주 좁은 문을 통해 여왕의 발치에 다녀갔단 말을 들었거든.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여왕께선 너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 그리고 그 헌터의 존재에 관해서도 알고 있지.”

지호는 하마터면 보현을 돌아볼 뻔했다. 그리고 도훈이 왜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보현을 부르는지 추측하기 위해 고심했다. 중간쯤 걸어온 도훈은 거기에 멈추어 선 채 손을 내밀었다.

“내가 거기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네 친구들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적어도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에게 하는 것처럼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게 아닌 걸 보면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차려 주는 것 같네. 영광이야.”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우리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어, 지호야.”

도훈이 다정하게 말했다. 마치 친구를 부르는 듯한 음성. 지호는 어두운 균열 내부에서 오로지 도훈 한 사람만이 또렷이 보이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저릿하게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를 보조해 주지 않는데 도훈의 능력에 부딪치면 그는 속절없이 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고자 도망쳐야 할까? 살아야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전에 내가 보여 줬던 거 기억해? 그걸 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그쪽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나 지금 협박하는 거야. 친구들이 무사하길 바라겠지?”

“이 동네 인간형 괴물 새끼들이 다 협잡꾼인 줄은 몰랐는데요.”

“그래서, 내가 형제와 다를 바 없는 놈인 것을 알게 되었으니 친구들을 포기할 거야?”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고작 세 사람 데리고 여길 오지도 않았다. 지호는 도훈을 죽일 듯이 노려본 뒤 두 번 망설이지 않고 훌쩍 뛰어 도훈 곁으로 내려섰다. 금방이라도 그를 후려칠 수 있지만, 그랬다가 혹여 다른 이들이 잘못될까 두려웠다. 지호의 복잡한 표정을 본 도훈은 싱긋 웃으며 지호에게 손을 뻗었다. 눈가에 닿는 손바닥.

이윽고 지호는 보았다.

두꺼운 베일 너머에서 끊임없이 그보다 작은 세상을 갈망하는 여왕의 그림자. 그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힘. 명령에 굴종하는 것은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그 힘을 따르는 것은 모태에게 보이는 당연한 예의였다.

도훈은 괴물이었기에 그들의 생리를 따랐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당연히 먹히는 것이고, 먹이가 된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것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었다.

여왕이 발견한 세상은 생명력이 넘치고 한때 그가 추구하던 삶과 닮아 있었다. 우연히 닿은 미지의 세계에서 가능성을 본 여왕은 그들의 세계로 넘어갈 방법을 찾으라는 요구를 모든 자식에게 빠짐없이 일렀다. 지호는 약간의 충격에 빠졌다. 도훈 역시 여왕의 것이었다.

그러나 충격은 금세 누그러졌다. 지호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괴물이 곧 여왕의 것이었다. 교회 앞에서 지호를 칭하던 눈알 괴물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홀로 태어나 존재한 것은 여왕이 유일하였으니.

밖에서 이야기하면 여왕이 듣게 될 거야. 뻔히 보이는 연극이지만 제법 그럴싸했지? 너와 접촉할 방법이 필요했어.

지호는 의문을 가졌다. 도훈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했던 말대로 게이트의 존재가 곧 도훈 역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단서가 될 텐데.

정신을 온전히 읽고 또 보여 주고 있었기에 도훈은 지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그러니까 너희 중에 벽 넘을 방법 아는 자를 잡기 위해 파견된 것들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하나같이 정신계 능력만 특출나고 몸은 허약한 머저리들이지. 퀸 패러사이트와 한 놈이 더 있어.

지호는 눈알 괴물의 존재를 떠올렸다. 도훈은 지호가 떠올린 이미지를 긍정하며 그것이 여왕에게서 명령받은 개체 중 하나임을 알려 주었다.

길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의심받을 거야. 우리가 여태 보여 준 적 없는 극단적인 힘을 사용할 텐데, 그건 곧 꺼질 촛불이 환하게 빛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야. 나도 그렇지. 내가 이렇게 엄청난 능력 가진 놈이었으면 포식자들을 피해 그렇게 도망칠 필요가 있었겠어?

도훈은 웃었다. 하지만 지호는 웃을 수 없었고, 도훈이 퀸 패러사이트와 함께 여왕에게 모종의 명령을 받는 존재인지 궁금해했다. 그의 의문을 읽은 도훈은 단호하게 일렀다.

너희 인간 중에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힘을 손에 넣은 자들만이 여왕 앞에서 자유로워. 그러니 그런 존재 아닌 나는 당연히 여왕에게서 벗어날 수 없지. 하지만 우린 여왕의 지배에 조금이나마 저항할 수 있는 것들이야. 정신 계통 능력을 주력으로 삼는 것들이니 이유는 짐작할 수 있겠지? 여왕은 그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강제로 이번 문, 그러니까 균열에 투입되었고. 여왕이 심어 놓은 기폭제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죽을 거야. 그전에 임보현에게 그 정보를 캐내고 너희 세상으로 넘어가야 하지.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생존의 길이야.

도훈은 담담히 설명했고 지호는 분노를 느꼈다. 도훈은 지호가 자신 때문에 화내 준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은 듯이 웃었다.

한 놈은 정확히 아는 것 없이 인간들에게 간섭만 시도했고, 퀸 패러사이트 역시 그의 호위대에게 명확한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걸렸어. 어쩔 수 없이 여왕은 임보현의 존재를 알아내게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헌터인지는 모르거든. 너희에 대해 아는 내가 일부러 임보현을 마크하러 온 거야. 고맙지?

지호는 도훈이 여왕에게서 보현을 보호하는 것에 협조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느꼈다. 지호 안에서 두 사람의 중요도가 저울질되고 있었다. 도훈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동의해 주었다.

내 안에서 정확히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두 사람이란 있을 수 없지. 애초에 임보현은 네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잖아. 저 헌터를 소중히 여기는 너를 이해해. 그리고 나는……. 여왕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야. 비록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내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이상 나는 그것과 다른 존재니까. 무수한 나들과 이야기해 본 후에 정했어. 내가 태어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지만, 죽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나는 여왕이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영원히 홀로 그 고독 속에 갇혀 발버둥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여왕은 여기로 넘어오기엔 너무 커. 햄스터 케이지에 들어오려는 코끼리인 셈이라고. 나는 여왕이 너희의 세상을 밟아 부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나는 너무 오래 지배당했어. 그리고 이런 나를 사람으로 봐 준 친구를 같은 꼴로 만들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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