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사람을 소유물처럼 말하다니 불쾌한 놈이네.”
지호의 중얼거림이 놈에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의미는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잘하게 그들을 방해하는 것들은 있으나 움직임이 일정하고 부자연스럽다. 마치 무언가가 그들을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때 지호가 새로 달아 주었던 창문이 다 깨져 버린 교회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꼭대기에 걸린 십자가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그 그늘에서 흰색 눈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 가운데 박힌 모양이 익숙했다. 그 질감까지도.
지호는 이 균열 내부를 돌아다니는 마름모형 정신계 괴물의 원형을 노려보며 질문했다.
“뭐 하는 놈이냐?”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놈이 그 질문에 응답했다.
나는 여왕의 자식. 독립을 원하는 아들이자 어미를 보좌하는 딸. 그를 경외하는 부하이자 한때 여왕의 눈이었던 것.
뜻밖의 답이었다. 지호는 뒤의 헌터들을 돌아보았고, 그들이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호는 잠시 손을 펼쳐 그들을 안심시켰다.
“저놈이 저한테 뭔가 이야길 하려는 것 같아요. 혹시 제가 눈을 까뒤집거나 뭐 정신이 나갈 것 같으면 후려쳐요. 기절하는 편이 지배당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깨트릴 작정인 것처럼 진득하게 그를 공격했다. 지호는 그 통증을 참으며 되물었다.
“너 그놈이냐? 이주원 각성자한테 헛소리 불어넣었던.”
이 말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눈알이 데구르 구른다. 그러자 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기묘한 흰 액체다. 바닥에 떨어지는 무게감과 점성이 익숙했다.
승찬의 집 앞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
지호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근방의 지도가 펼쳐졌다. 그쪽 주택가와 이쪽을 일직선으로 이으면 대략 이 킬로를 좀 넘을 것이다. 육로로 왔다면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하늘을 날아서 왔다. 패착이었을까? 최세진 팀이 알아내려고 했던 원인이 이곳에 와 있을 줄이야. 한 번에 두 가지를 처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들이 흔적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와 주기를 바라야 할지 모르겠다.
끈적이는 액체에서 마름모꼴의 괴물이 솟아오른다.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것이었나. 어쩌면 저 액체 자체가 괴물의 본체일 확률이 있었다.
“저 눈알에서 다른 놈들이 생겨나잖아?”
“주변이 뭐에 눌린 것처럼 무너진 걸 봐요. 원랜 저것보다 컸던 것 같은데요.”
하나의 추측대로 흰 액체가 떨어져 있는 곳들을 살피니 뭔가가 그곳을 억지로 밀고 지나간 것처럼 파괴되어 있었다. 폐기물들이 한쪽으로 밀려 떨어진 모양새를 유심히 관찰한 주리는 그 말에 동의하며 말을 얹었다.
“다른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십시오. 놈이 주변 괴물들을 모두 통제하는 것 같은데, 거기서 일시에 놈들을 풀어 버리면 우린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주리의 냉정한 분석은 애석하게도 사실이었다. 골목과 폐자재 틈, 버려진 차량 뒤편과 망가진 전신주, 깨진 창문 안쪽과 담벼락 뒤에서 거칠게 바르작거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닥을 긁으며 목을 울리는 위협, 어떤 소리인지 짐작도 하기 어려운 소리를 포함한다면 그곳은 괴물들의 본거지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괴물 밀도 높은 지역이었다.
일행 중에선 특히 김 반장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는 사방을 일시에 휘어잡고 있는 괴물이 다른 놈들을 장악하고 있던 힘을 그들에게 전부 돌리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싶어 심각한 얼굴로 놈을 노려보았다.
“왜 입을 다물었지? 네가 그놈이냐고 묻잖아.”
놈은 대답이 없고 대신 엉뚱한 쪽에서 질문이 돌아왔다. 괴물들을 노려보던 김 반장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속삭이듯 물었다.
“말을 멈췄나? 너와 대화할 때는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움직이잖아.”
“계속 저놈을 보고 계셨죠? 어떤 것 같아요?”
“처음에 봤을 때보단 좀 작아진 것 같아. 저 흰 액체가 본체일까? 정확히 모르겠군. 보기만 해도 불쾌한 기분이야. 놈이 머리에 대고 말하고 있는데 세뇌당한 것 같다거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부작용은?”
“아뇨. 다행히 멀쩡한 것 같아요. 우선 우릴 공격할 것 같지는 않으니 대화나 좀 더 시도해 볼게요. 야, 눈알밖에 없어서 막힐 귓구멍이 없다고 변명할 셈이야? 네가 그 새끼냐고 묻고 있잖아.”
눈알 괴물은 응답이 없다. 문득 놈의 모습이 예전에 보았던 감지계 형태의 눈알 괴물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놈은 정신 계통이라기보다는 감지 계통이었고, 물리적 방어력이 거의 영에 수렴했었는데.
놈에게 응답이 없자 지호는 가히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기괴한 모양새의 괴물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보다 시력이 좋아 숨어 있는 것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놈들의 공통점은 모두 바닥에 깔린 점성 있는 흰 액체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하물며 건물로 숨어 들어간 것들조차 그것을 밟은 후에 굳은 것처럼 보였으니.
홍채 부근의 미세한 검은 띠가 눈알 괴물의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몇 안 되는 단서였다. 백색 수정체에 백색 홍채. 마름모꼴의 동공.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점성 있는 액체가 신경 쓰인다. 괴물은 큰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인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끈끈한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 거기에서 괴물들이 몸을 일으키는 현장.
헌터들에겐 불리하다 못해 당장 달아나도 이상치 않을 현장이다. 수십의 마름모꼴 괴물들이 뒤편으로 줄지어 사라진 뒤에야 놈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빠져나가?”
그래. 너는 그것을 위한 준비잖나.
지호의 얼굴이 굳었다. 악성 균열을 연 것은 여왕일 것이며 여기에 이미 퀸 패러사이트가 들어와 있다. 주원에게 개짓거리 하던 놈이 진짜 이놈이 맞다면, 어쩌면 여왕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인간들을 먹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결단코 피해야 할 사태가 벌어졌다. 지호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요!”
“뭐? 갑자기?”
나머지 세 헌터는 당황하면서도 착실히 지호에게 밀착했다. 생전 내 본 적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른 지호는 이형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곳을 발견하곤 몸을 떨었다.
흰 눈알 괴물의 흔적이 뻗어 있는 방향. 즉 정신계 괴물들의 중심부에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래에서 그들 쪽으로 따라붙은 비행 계통 괴물들이 여름날 하루살이 떼처럼 새카맣게 하늘을 채우며 날아오른다. 하나는 경악하며 온 힘을 다해 방벽을 유지했다. 사방을 두드리는 발톱 날개 이빨 꼬리 그 밖의 부속지 같은 것들이 요란하게 들러붙었다. 과도한 무게였다. 지호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방벽 전체를 뒤덮은 비행체들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점점 내려간다는 것밖에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느 건물에 박은 모양인지 방벽과 건물 틈새에 끼인 놈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지호는 방향을 살짝 비틀어 놈들을 건물에 갈아 버렸다. 방벽을 유지하느라 힘에 부치는지 몸을 바들바들 떠는 하나를 느낀 김 반장이 소리쳤다.
“내려서. 교대해! 강하나 헌터 혼자 방벽을 오래 유지할 순 없어. 너무 많아!”
“이놈들이 왜 나타난 건지 알았어요. 가야 해요!”
“뭐? 왜 나타났는데?”
“여길 나가려고요!”
주리는 바닥에 발이 닿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지호의 손을 놓으며 방벽에 들러붙은 놈을 향해 발길질했다. 방벽을 거의 뚫을 뻔한 괴물 하나가 안면이 곤죽이 되어 떨어졌다. 내부에서 그런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신체 계열 능력자뿐이다. 주리는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치기 시작했고, 하나의 상태를 보자마자 곧 비행을 포기하고 바닥으로 내려온 지호는 새 방벽을 내부에 펼치며 소리쳤다.
“방어 제가 맡을게요. 김 반장님은 언니한테 연락해요!”
김 반장은 하나를 부축하며 곧바로 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는다. 지호는 방벽을 한 자리에 고정해 둔 채 주리와 마찬가지로 거기 들러붙은 놈들을 내부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로 아가리를 열어 이빨을 처박으려는 놈들이 지호의 일차적 목표였다. 비만한 괴물의 허리께를 으스러뜨리자 그제야 시야가 트였다. 치솟는 연기. 느낌이 좋지 않다.
“언니는 아직도 연락이 안 돼요?”
“그래, 여기서 갑자기 왜 임…….”
“안 돼요!”
지호는 괴물을 쥐어뜯은 손으로 김 반장의 입을 막으려 했다. 질겁한 그가 펄쩍 뛰며 물러나자 그제야 자기 손을 본다. 괴물의 형태인 오른손은 흉흉한 손톱을 갈무리하지 못해 정체 모를 살점과 피가 묻어난 채였다. 밀려오는 역겨움에 손을 옆으로 털어 낸 지호는 단호하게 일렀다.
“절대 언니 이름을 말하지 마요. 특히 균열에서는 안 돼요. 놈들이 노리는 게 균열을 빠져나갈 방법이라면 더더욱 안 돼요.”
이름에는 힘이 있다고 했다. 특히 정신을 지배당하는 괴물들이 산개해 있는 이 방벽 안에서는 더더욱 안 될 말이다. 놈이 혹여 그 이름자 듣고 보현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김 반장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우선 지호의 말을 따랐다. 머뭇거리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헌터들 측으로 연락을 남겼다.
“놈들의 목적에 관해 전달했다. 여길 나가려고 하고, 그 방법 아는 자를 찾는다고. 그리고 이름을 주의하란 것도 전하긴 했다만……. 어쩔 생각이지?”
“특수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 반장님 한 사람만 놈에게 대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저것과 싸울 수는 없어요. 지금도 이 많은 놈을 저 먼 거리에서 조종하는 걸 봐요. 이 균열 내부 헌터들만으론 상대도 안 될지도 몰라요.”
방벽 주변의 괴물들을 대부분 처리하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다. 간신히 지호 대신 방벽을 맡을 정도로 상태를 회복한 하나는 지호가 숨도 몰아쉬지 않고 상황을 점검하는 것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지호 씨는 사람도 아니야.”
지호는 짧게 웃은 뒤 여전히 연락되지 않는 보현 쪽 신호를 확인했다. 세진 팀 전원의 신호가 한 장소에 묶인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것이 확인되었다. 혹시 정신 계열 괴물들에게 습격당한 것은 아닐까? 사방에 흥건한 흰 액체가 그 가설을 방증했다. 이마의 땀을 쓸어내리는 주리에게 손을 내민 지호는 단호하게 일렀다.
“좀 이상해요. 최세진 헌터 팀으로부터 아무 연락도 없고, 그쪽에 움직임도 없어요. 아마 도움이 필요할 것 같고요.”
“그 헌터를 노린 다른 괴물들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겠죠. 놈들이 정말로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가졌고, 우리 중에 누군가 그들이 이 세계를 벗어날 방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곁에서 대화를 들었기에 주리 역시 보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새 균열은 그 크기를 불려 만수동을 상당 부분 집어삼켰다.
인천대공원 초입에 멈추어 있는 헌터들의 신호를 목적지 삼아, 지호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비행형 괴물들이 달라붙었으나 처음처럼 비정상적으로 그들만을 노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갓 생겨난 것과 다름없는 균열. 앞으로 며칠간은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하느라 헌터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쏟아부을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어떤 특정 괴물에게 지배당해 움직이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