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보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으르렁대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상대를 위협했다.
“그 입 조심해요.”
“아무리 특수 병동이어도 균열 안에서 저런 중상자들을 치료하진 않잖습니까. 이송이 가능해질 며칠만 목숨이 붙어 있으면 밖에 나가서 몸을 고칠 수 있다고요. 그러니 저희를 그쪽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괴물이 되기 싫다고요!”
괴물들과 싸움을 하고 오기도 했거니와 승찬에게 자기 손을 보여 주느라 장갑을 벗고 있던 지호는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온 것을 보곤 뒤늦게 팔을 뒤로 숨겼다. 물론 무의미한 일이었다. 보현은 남자를 노려보다가 바깥을 가리키며 분노했다.
“여기서 꺼져.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릴 해? 지호 씨는 내 식구야.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다 사고를 겪었다고. 알지도 못하는 새끼들이 혓바닥 멀쩡하다고 아무 말이나 쳐 지껄여 대는데, 그렇게 원하면 길바닥에서 뒈져. 너희에게 제공할 치료기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왜? 균열에서 치료받으면 괴물이 될 거라고 주장한 건 너희잖아. 내가 ‘과도한 치료’로 너희를 괴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필요하면 저 괴물들 뚫고 병원까지 가 보든가. 어차피 괴물이 되는 것보다는 사람인 채로 괴물 밥이 되는 편이 생태계 순환에 생산적이지 않겠나?”
상대가 헌터가 아니었기에 예의를 갖추던 보현의 말이 반토막 났으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전직 헌터이자 살아 있는 전설의 서슬 퍼런 눈빛에 졸아 불만을 삼키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애새끼 하나가 있을 뿐.
그가 떠나자 보현은 피로한 얼굴로 돌아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쪽 자리가 비어 있다. 열 사람 남짓 모인 곳이었고, 보현은 그 자리를 지호에게 권했다. 친근하던 얼굴이 아니다. 보현은 냉정하고 건조하게 말을 시작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몇 사람의 전투 인력이 낙오되었다. 어차피 전투 훈련받은 헌터들은 아니었어. 이후로도 일반 각성자들이 잘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젖어 괴물 밥 제공하려고 달려드는 일을 삼가도록 알리는 것이 귀관들의 목표다. 협회로부터 지휘권을 일임받아 임시 사령관이 된 임보현이다. 모두가 귀환했으니 임시 팀을 지정하지. 우연히 균열이 열릴 당시 근거리에 있던 여덟 사람을 나누어 두 팀이 편성되었다. 나머지 호명하는 이들은 손을 들도록.”
최세진 팀과 김동주 팀을 제외하고도 두 팀이 더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간에 집에 남아 있었던 헌터는 얼마 없었고, 덕분에 그쪽 팀은 인원은 많아도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보조 팀으로 꾸려졌다. 보현은 인원 분배 이유를 명확히 했다.
“사냥은 정식 헌터들만 맡습니다. 여러분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고 현장 조사를 책임지는 인력이며, 새로이 나타나는 괴물들을 정찰하고 알릴 중대한 임무가 있습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사냥하는지 자료를 남기십시오. 협회에서 우리가 올리는 자료를 분석해 상대할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데이터베이스를 대조하여 알려진 괴물이라면 파훼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겠죠.”
헌터는 고작해야 세 사람이며 각성자 몇과 일반인 지원자 다수로 이루어진 팀들이다. 보현은 그들에게 큰 기대는 걸지 않았고, 첫째도 안전이며 둘째도 안전이라고 몇 번을 강조한 뒤 임시 포메이션 훈련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놀이터 쪽으로 움직이는 자들을 확인한 뒤 보현은 가라앉은 눈을 벽으로 돌렸다. 이 근방 지도였다.
“이후 사항은 기밀이니 다른 분들은 구경 그만하고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모님도 가세요. 청소 걱정 나중에 하시고요.”
근심 어린 얼굴의 도우미 이모님을 밀어 낸 보현은 문을 닫기 무섭게 근심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은 다시 아홉. 처음 그 인원들이다.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나쁘다. 균열 확장 속도가 빨라.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구조대가 외부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중이고 경찰이나 나머지 헌터들도 마찬가지야. 외부에서 우리를 도울 일보다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할 상황이거든.”
지도에 협회에서 보낸 정보를 띄운 보현은 다른 헌터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에 찍힌 점들은 각기 붉거나 노랗다. 대부분이 그랬다.
“아니, 어떻게 코드 레드랑 옐로우가 이렇게 많아요?”
“정신계 괴물들이 너무 많아. 밖에 있는 놈들이 잔뜩 퍼져 있지. 바깥에 있는 헌터들이 왜 바빠졌는지 이해하겠지?”
이전 대형 균열에서 경계를 넘어오려는 괴물들을 상대했던 하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거의 똑같은 것 같은 약한 괴물 다수. 헌터들 사이에서는 비밀도 아니게 된 이야기를 거론하며 보현은 힘겹게 추측을 꺼내 놓았다.
“아마 저 코드 옐로우 배정을 받은 정신계 괴물은 본디 한 놈이었을 거다. 현재 병원 측에서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쪼개졌던 괴물은 서로를 공격하고 삼키는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도로 몸을 불리고 있다는군. 하지만 워낙 수가 많고 퍼진 곳이 넓어 외부로 나가려는 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재 협회는 근방 모든 헌터들을 경계 태세로 균열 앞에 배치하고 군대와 함께 대기 중이다. 우리는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본격적인 사냥에 나서야 한다.”
“구조 작업은 다른 분들한테 맡기나요?”
“정신계 괴물이 많이 돌아다녀서 피해가 적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진짜 큰일이 벌어지겠지. 본래라면 한 팀으로 뭉쳐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너무 모자라고, 당장은 놈들과 싸우지 않더라도 어느 놈을 잡아야 하는지 정도는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보다 균열이 더 넓어지면 그걸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질지도 몰라. 옛 대구와 균열 커지는 속도가 비슷하거든. 당시처럼 균열 폭주 현상이 동반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쩌면 그때보다 심각할지도 몰라.”
지도에 표시된 점 중 이형 에너지를 강하게 발산하는 놈일수록 크기가 컸다. 코드 레드로 찍힌 점은 크기가 아주 작았는데 부근을 돌아다니는 코드 옐로우 포지션의 호위대들이 대단한 에너지를 발하고 있어 그 빛이 가려질 정도였다. 퀸 패러사이트일 것이다. 지호는 보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두려웠다.
“아직 주변 정찰이 끝나지 않아 더 강한 괴물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상황으로 볼 때 여기서 강한 개체로 잡히는 몇 놈이 있어.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가 그중 하나다. 이상한 일이지만 퀸 자체는 능력이 그렇게 크게 감지되질 않더군. 아마 호위대 없는 개별 전투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모양이야. 그 외에도 정신계 괴물이 다수 발견된 군집의 중심, 또 관교동 부근에서 강하게 관측된 신호 역시 확인해야 한다. 우리 팀은 둘이며 확인 장소는 셋. 선택하자. 어쩌면 셋 중 어떤 것도 이 균열의 강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지.”
세진 팀과 함께 움직이는 보현이었으니 지호네가 퀸 패러사이트와 맞부딪치길 원한다면 준우와 보현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호는 그것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한 놈을 상대할 때도 헌터들 여럿이 쩔쩔맸었다. 그때도 강했는데 더 많은 괴물을 먹으며 성장했을 지금은 더하지 않을까?
아는 강함보다는 모르는 미지를 상대하는 쪽이 좀 더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양측 리더들은 서로 다른 지점을 가리켰다. 정신계 괴물 군집을 상대하러 가게 된 최세진 팀 측은 보현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결정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임보현 헌터님이 본디 이보다 더 많은 헌터들을 정신 공격에서 보호해 왔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지금은 현역이 아니셔도 이 정돈 해 주실 수 있겠죠. 제 힘으로는 한두 명 정도를 보호하는 게 다라 안 그래도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놈들이 저희에게 간섭하지 못하는 동안 약한 것들을 처리하며 안쪽으로 움직여 보죠.”
“그럼 우린 관교동 쪽으로 가지. 이쪽엔 뭐가 있는지 아는 사람 있나?”
김 반장이 짚은 위치를 본 지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전에 승찬과 함께 봉사 갔던 교회 근방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머무는 동네. 몸 하나 제대로 숨기기도 어려운 곳일 터. 아파트 단지와 제일 먼 곳이기도 했다.
“빈민가가 있어요. 균열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요.”
망할. 김 반장은 욕설과 함께 내려놓았던 장비를 챙겼다. 다른 헌터들 역시 말없이 움직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동 능력자가 있어 움직임이 수월한 최세진 팀과 달리 지호네는 지호가 날며 모두를 들고 가든가 육로로 가는 방법밖에 택할 수 없다. 전자가 좀 더 빠르긴 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데다 안전하다고도 장담할 수 없었으나 김 반장은 과감히 날아가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위험한 새끼들 정리하면서 가야 해. 달려드는 것들 사냥한다고 생각하고 미끼 하자.”
세 사람이나 붙들고 날아가는 것은 지호에게도 꽤 무리한 일이 될 터였다. 그 정도의 무게까지는 들어 본 일이 없었던 지호는 신중하게 힘을 가했다. 오른쪽 팔이 왼쪽 팔보다 더 많은 무게를 들 수 있었기에 주리를 오른쪽, 그리고 하나와 김 반장을 왼쪽 손으로 붙든다.
신체 계열 능력자라 다른 이들보다 훨씬 무게가 나갔던 주리는 미동도 없이 지호의 손을 붙잡았다. 김 반장에게 업힌 하나는 불안했는지 몇 번이나 위를 확인하며 방벽을 유지했다. 간간이 허공을 돌아다니던 괴물들이 달려드는 일이 있었으나 지호 선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위태로운 곡예를 하며 네 사람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균열에 휩쓸린 빈민가의 모습은 참혹했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고, 숨어도 먹을 것이 확보되지 않는 거리다. 도망칠 수 있었던 자들보다 그럴 수 없던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접근할수록 찌릿한 두통이 느껴졌다. 김 반장이 매섭게 경고했다.
“정신계 능력을 사용하는 괴물이 있다. 이 이상은 지상으로 내려가. 허공에서 공격받아 추락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어져.”
내려서기 위해 전투가 시작됐다. 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달려든 놈들을 염동력으로 처박은 지호는 주리가 허공에서 자기 손을 놓기 무섭게 아래에 있는 놈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김 반장과 하나는 주리가 싸운 자리에 떨어진 후에 부근을 살폈다. 생존자 표식이 몇 보인다. 그러나 당장은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이동하자.”
지호와 주리가 길을 뚫었다. 구웨엑 소릴 내며 달려든 놈을 터뜨리자 사방으로 산성 액체가 튀었다. 하나의 방벽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가 두께를 회복하는 것을 본 김 반장은 창백해졌다.
“이상한 놈들이 너무 많은데요!”
“여차하면 튈 준비나 하자.”
두통이 심해졌다. 김 반장의 힘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랬다. 귓가에 묘한 속삭임 비슷한 것이 울린다. 아이의 웃음소리 같다가도 노인의 음성이 되고, 젊은 여자의 비명에서 갓 입대한 청년처럼 우렁찬 외침이 들리기도 한다. 정신을 멀쩡히 차리고 있기 힘든 와중에 발목을 물려는 놈의 아가리를 양쪽으로 찢었다. 오른손은 그런 용도에 더 적합한 것처럼 수월하게 괴물들을 제압했다.
주리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하나의 방벽 역시 눈에 띄게 얇아졌다. 김 반장이 두 사람을 붙잡고 힘을 집중하는 사이 지호는 드디어 온전한 음성이 된 소리를 들었다.
구해 줘.
엄마, 엄마!
여기 사람, 사람 있어요. 살려 주세요!
흐느낌과 비명, 구조 요청이 번잡하게 뒤섞인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지호는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음성들을 들으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온갖 소리 이후에 가느다랗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은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가.
목소리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여왕의 것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