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생각보다 센 놈들은 많지 않았어요.”
“다행이죠. 주안동 부근에서 메두사가 목격되었고, 여기와 달리 다른 곳엔 헌터가 없어서 난리일 거예요. 저희는 여기 정리하고 병원 쪽으로 움직일 겁니다. 거기도 설비는 되어 있지만, 그쪽 경비들 인력만으론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도 있을 거고.”
보현은 담담하게 지호의 말을 받으며 모인 각성자들에게 맡을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과 정찰이지 전투가 아니었기에 만약의 경우 경보를 울리라고 그들을 가르치는 보현의 뒤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지윤은 욕설을 참지 못했다. 환자의 상처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균열에서 치료하는 건 임시방편밖에 안 돼요. 데리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건 어때요?”
보현은 빠르게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어요. 그리고 아마 포화 상태일 겁니다. 여기와 비슷하게 안전 구역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 몰려들 거고요.”
“그럼 내보내야 해요.”
“환자를 데리고 경계까지 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이쪽 분이 능력 있는 이동 능력자라고 해도 안 돼요. 박찬민 팀장 정도 되어도 그런 일은 맡기지 않을 겁니다.”
세진은 단호하게 말을 막으며 맡고 있던 일반 환자의 상처를 지혈했다. 지윤이 맡은 중상자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마찬가지로 상처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숨넘어갈 것 같은 사람 아직 없어요. 생기면 바로 11층으로 올려 보내요. 제 치료기가 도움될 겁니다.”
그나마 균열이 열리자마자 대처를 시작해 죽거나 다친 사람이 적었다. 이쪽으로 넘어온 괴물의 수가 적은 것 같기도 했다. 소민과 함께 숨은 괴물을 추적해 사냥을 일단락했으나 이게 끝이 아니다. 보현을 비롯한 균열 내 헌터들이 협회 측을 통해 명령을 받았다.
생존자 우선 구조는 그들의 당연한 임무다. 신체 계열 능력자들이 투입 대기 중이지만 그들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에는 한계가 있는 법. 보현은 소민과 다은을 경계 부근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아 고심했다.
“다행히 멀지 않아서 이동 한두 번이면 경계에 도착할 수 있어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방벽 담당 신다은 헌터와 동행해요. 그리고 저쪽에 있는 중상자 두 사람과 함께 움직일 수 있겠어요? 곧바로 병원에 이송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팀 나머지 셋은 이쪽으로 피하러 들어오는 사람들 받고 경계 설 겁니다. 김동주 팀이 나가야겠어요. 그럴 수 있죠?”
괴물에게 신체를 뜯긴 자들은 실신한 상태였다. 상처를 손봤어도 그대로 놔두면 곧 죽을 것이다. 다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소민과 함께 위치를 확인했다. 세진은 염려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아파트 바깥에 뭔가 있습니다!”
감지계인 다은이 아닌 정신계 능력자 세진이 확인하는 힘이라면 당연히 그쪽 계통 능력일 것이다. 외부 CCTV를 확인한 헌터들은 당황했다. 마름모꼴의 번들거리는 물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약 삼 미터가량의 높이. 근방의 시민들이 쓰러진 것이 보였다. 아래쪽으로 삐져나오는 그림자 같은 것이 사람들을 향해 스멀스멀 움직인다. 보현은 버럭 소리쳤다.
“저쪽으로 절대 나가지 마요. 정신계 놈들 군집이야!”
괴물 중에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지호가 일전에 생존자를 구출해 냈던 포자 군집도 그러했는데,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마름모들이 허공에 뜬 채 기절한 자들의 귀로 검은 줄기를 밀어 넣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보현은 이를 악문 채 놈들의 범위를 확인했다.
“병원 쪽이군요. 빌어먹을!”
그들의 아파트와 특수 병동은 거의 근접 거리다. 걸어서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웠고, 그 때문에 놈들이 병원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람들을 기절시키는 것을 눈 똑바로 뜬 채 구경해야 했다.
눈짓으로 허락을 구하는 지호에게 김 반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선 남쪽으로 이동해 생존자를 구출한다. 틈나는 대로 약한 개체들 수를 모조리 줄이는 게 우리 목표고. 저것들과 싸울 궁리 마라. 다른 놈들을 여럿 잡는 쪽이 훨씬 나을 테니.”
임시 편성 팀은 그대로 유지됐다. 김 반장은 괴물 군집의 힘이 어디까지 뻗어 나왔는지 먼저 파악한 다음 북쪽 입구를 아예 폐쇄하도록 지시했다.
지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김 반장 팀은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는 보수 덜 된 주택지구의 민낯이 펼쳐져 있다. 망가진 건물만 밀어 버리고 지은 단지라 재개발에 포함되지 않은 주택가는 허름했다.
네 사람은 느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빠르다고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골목길의 괴물들을 사냥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 역시 군집을 이루고 있어 상대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최대한 근접하게 내려오는 것들만 몇 마리 잡을 수 있었다. 신체 부위에서 네 개로 뻗어진 날개 같은 것들을 제멋대로 푸드덕거리며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들. 각기 신체 부위를 매달고 날아다니던 날파리 같은 괴물은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면 우르르 모여 휴식을 취했다. 그럴 때면 놈의 원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다시금 신체 부위별로 쪼개지는 모습은 기이하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지호는 신음하며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살아 있는 생존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지호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생존자 표식이 여럿. 단지에서 먼 곳이 아니었기에 헌터들은 큰 소리로 생존자들을 불렀다. 밖으로 고개 내밀 정신이라도 있던 자들은 전투복 입은 헌터들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생존자가 생각보다 많은데?’
지호는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생각을 누르며 주변을 확인했다. 핏자국이며 괴물의 흔적이 가득했으나 괴물의 수가 많지는 않다. 그들은 몇 차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생존자들을 아파트 단지로 옮겼다. 언제 괴물이 습격해 들어올지 모르는 집구석에 숨어 있는 것보다는 남의 집이어도 방비 시설 있는 건물에 신세 지는 편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꾸역꾸역 짐 보따리를 들고 도망쳐 왔다.
생존 가방을 현관에 꾸려 두는 것이 철칙이 된 시대다. 빈손으로 나오는 자는 거의 없었다. 주택가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평일 낮 시간이라 대부분 가정주부나 어린이, 노인이다. 인파 가운데 드물게 젊은 사람들이 보였다.
“이 사람들 전부 수용할 수 있나요?”
“해 봐야지.”
아파트 단지가 뚫리면 재앙일 텐데. 지호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헌터들은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워 섣불리 두려운 추측을 내놓지 않았으나 사실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급성 균열에서는 버틴 전적이 있는 시설이지만 악성 균열에서도 그게 통할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길게 울리는 경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호는 고개를 홱 돌려 김 반장과 눈을 맞췄다. 코드 레드다.
지호는 황급히 신호를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경보에 놀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놈들이 포착된 지점은 고작해야 몇 블록 떨어진 위치다. 준우가 근방에 있을 것이다. 보현과 함께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심장이 곧 떨어져도 이상치 않을 것처럼 쿵쾅쿵쾅 뛰었다.
“퀸 패러사이트인가?”
“애석하게도 그렇네요.”
도훈이 나타난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지호에게 이제 도플갱어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물론 다른 헌터들에게야 그럴 리 없는 이야기지만, 지호는 이 신호가 차라리 도훈 때문에 울린 것이었다면 반가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갑다니, 이 난리 통 속에서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다시금 생존자들을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호위한 헌터들은 벌써 굳어 오는 몸을 주무르며 짧은 휴식을 취했다.
지호의 핸드폰이 또 전화라도 온 것처럼 울렸다. 전화는 아니었으나 뜻밖의 이름이긴 했다. 짧게 울리는 메시지들. 전화를 걸 뻔한 지호는 멈칫했다. 승찬이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쪽에서야 전화를 거는 것처럼 신호가 울리게 해야 하지만, 막상 전화 자체는 할 수 없는.
설마. 지호는 다시 지도를 떠올렸다. 승찬의 집이 포함된 위치이긴 했다. 하지만 당연히 부천 구조 센터로 출근했을 거라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생존자들을 방벽 안에서 벗어나지 않게 줄 세우느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하나는 뒤늦게 지호의 얼굴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표정이 왜 그래?”
“승찬 아저씨가 균열에 휘말린 것 같아요.”
코드 옐로우도 아니고 코드 레드니 퀸 패러사이트 본인이 나타난 것일 터. 위치가 하필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을 구하러 이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으나 한 번 신경이 쓰이자 생각이 그쪽으로만 쏠렸다.
짧은 휴식 후에 다음 블록으로 이동해 생존자들을 불러 모으고 단지로 돌아가던 일행은 재차 습격을 받았다. 그늘에서 튀어나와 생존자를 습격하려던 괴물을 맨손으로 찢어 버린 지호는 결국 우뚝 멈추었다.
“가 봐야겠어요.”
“뭐? 어딜 가?”
“아저씨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연약한 일반인이에요. 제가 지켜 줘야 해요.”
“너 제정신, 아니 지인이 휘말렸나?”
지호에게 남은 가족이 없음을 알고 있던 김 반장은 욕설과 함께 지도를 켰다. 지호는 승찬의 집이 있는 위치를 짚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동쪽으로 몇백 미터 떨어진 위치. 일 킬로도 되지 않는 거리다.
“아저씨네 집 괴물이 한 번 부딪치면 금방 망가질 거예요. 거기 숨어 있으면 위험하고…….”
다급한 지호를 진정시킨 김 반장은 해당 위치가 그들의 구조 루트와 겹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어차피 남은 사람들 구하러 갈 곳이야. 조금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겠지. 이쪽으로 먼저 가 보도록 하자.”
그 와중에도 협회에서 꾸준히 공지가 내려왔다. 다행히 소민과 다은은 주안동 부근에서 신체 계열 능력자들과 합류한 모양이었고, 이 동네 특수 병동을 이용하려고 와 있던 헌터 몇 사람이 병원을 안전 지역으로 등록했다. 예전 판교 균열에서 지호를 구해 주었던 이주환 헌터의 이름도 보였다. 이동 능력자는 언제나 많을수록 도움된다.
“다른 팀도 있으니 괴물들의 수가 폭발적으론 늘어나거나 불운한 사고가 있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게다가 병원을 확보했다고 하니까.”
하나가 지호를 비롯해 팀원들을 안심시키고자 덧붙였다. 주리는 그 와중에도 부근을 정찰하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달리 잡히는 소리가 없자, 오히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아요. 조용해졌군요.”
균열의 고요는 강한 괴물을 피해 달아난 것들이 만들어 낸 공백이다. 지호는 황급히 이동하자고 팀원들을 보챘다. 지금이야 메시지라도 보낼 여력이 있지만 도착했을 때 시신으로 승찬을 만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거의 떠밀리다시피 움직인 그들이 만나게 된 건 타르처럼 끈적이는 액체가 바닥을 덮은 주거지였다. 차이점은 색이 하얗다는 것이며, 발이 닿기 무섭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와 곧장 물러나야 했다. 김 반장이 다시금 그것을 밟았다. 그는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그거 같은데. 검단 쪽 대형 균열에서 내렸던 구슬 비 말이야. 거기 들어 있던 연기랑 비슷해.”
“그건 연기였잖아요?”
“그러니까 더 나쁘지. 이게 증발해서 그런 구슬이 되는 것 같은데.”
끈적이는 흰 액체가 아주 느리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전략 게임의 외계 종족 터전에도 이 비슷한 것이 퍼지곤 했다. 김 반장은 때에 안 맞는 게임 이야기를 꺼내며 팀원들을 뒤로 물렸다.
“밟으면 환각을 본다. 그동안 신체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고. 그렇게 멈춘 놈을 사냥하는 것들이 부근에 있을 거야. 너희와 상성이 너무 나빠. 내가 혼자 들어가든가 아니면…….”
“안 닿으면 되는 거잖아요. 날아서 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