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지호는 세진이 선택한 어휘에 집중했다. 일전 균열에서 만났을 때 그는 분명 지호를 적대하고 있었다. 괴물이 된 인간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으니 명확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헌터들 속에 있지 않은 최세진은 힘없이 지호를 응시했다. 언뜻 그 눈길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헌터로서의 입장은 전과 동일합니다.”
세진은 최근 지호가 보현에게 들은 것과 비슷한 느낌의 문장을 만들어 냈다. 사람은 다면적인 존재이기에 지호는 얌전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세진은 여태 마주 잡고 있던 다은의 손을 느릿하게 놓으며 지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호는 당황하여 막 땅에 닿으려던 그를 붙잡았다.
“아니, 왜 이러세요?”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를 비롯해 꽤 많은 헌터들이 그러하겠죠. 이지호 헌터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우리는 이런 힘을 얻으며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았습니까.”
지호는 단박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내내 그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던 탓이다. 그는 세진을 무릎 꿇지 못하게 일으켜 세우며 단호히 일렀다.
“두 가지 모두를 제게 요구하실 수는 없어요.”
“이지호 헌터…….”
“헌터로서의 여러분도, 그리고 실종자 가족으로서의 여러분도 선택해야 해요. 저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겠다고 결정했어요. 하지만 저만의 선택이고, 이런 저조차 그들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인간인 척하는 것이면 어쩌나 걱정하죠. 만약 그렇다면 제가 아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러 사람이 필요해요. 최악의 사태가 왔을 때 신속하고 빠르게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요.”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속내를 뒤집을 때까지 의심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요.”
“그렇다면 기다려야죠.”
“예?”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겁박할 수는 없잖아요. 그들이 진짜 인간의 마음을 가진 괴물일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완전히 눈을 돌리지 않은 사람도 필요해요. 저는 실종자 가족분 중 몇 명은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거든요.”
엄밀히 말해 지호는 그들과 처지가 달랐다. 지호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죽어서야 만날 수 있으니까. 돌아올 수도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삶을 건 사람들이 부러웠다.
세진은 강제로 일으켜진 뒤에도 주저하며 지호와 다은을 번갈아 보았다.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헌터로서 제 판단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실종자 가족으로서 그들을 멀쩡히 구조해 오길 기다리는 건 불가능해요. 당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어쩌면 여러분이 기억하는 가족들은 한 마리 괴물에게 먹히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도훈의 경우를 떠올리며 한 말이지만, 그를 제외하고도 불가능한 상황일 턱이 없다. 오히려 괴물 한 마리에 주변에 모여 있던 여러 사람이 사냥당하는 쪽이 좀 더 일반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화가 시작된 후 침묵하고 있던 다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전에 믿을 수 있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죠, 우리?”
도훈이 그들에게 균열 소멸기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 주었던 때의 일이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은 발치에 눈을 고정한 채 속삭였다.
“지호 씨 외에도 신체 괴변이 현상을 겪은 헌터들을 많이 봤어요. 방송 쪽 일을 하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고요. 다른 헌터들이 서로 마주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과 조우하고, 더 많은 상황을 겪고, 더 많은 정보를 다뤄요. 지호 씨, 어쩌면 노련한 헌터들은 이미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 각성자들이 사실은 괴물과 크게 다른 존재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진은 다은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은은 바닥을 보고 있던 탓에 그의 표정 변화를 읽지 못했다. 힘겨운 목소리로 다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괴물들도 이형 에너지를 사용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린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 순간부터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물이 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의 힘을 다루게 되어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람 잡아먹는 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엇이 된 거죠. 저는 이형 에너지 능력자이고, 균열에 들어갈 때마다 제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의 에너지들을 움직이곤 하는데……. 가끔은 그곳을 채우고 있는 에너지들이 제 뜻에 따라 움직여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럴 때면 제 본래 능력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쓸 때면 그 감각은 더 선명해져요. 알잖아요. 지호 씨는 알잖아요. 그렇죠? 다른 어떤 헌터들보다 빠르게 강해진 사람이니 알 수밖에 없겠죠?”
지호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협회 사람들이 알고 있고, 지호조차 깨달았다. 전양련 사람들도 알았는데 다른 헌터들이 그것을 아주 깨닫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추측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은은 여전히 소리 죽여 중얼거렸다.
“사실은 우리가 괴물과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겉모습이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는 저 너머에서 괴물이 되었다던 실종자들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지 않을까?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여기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저를 괴롭혀요, 지호 씨. 전에 그랬죠. 믿을 수 있는 괴물이 있을까 하고. 지호 씨는 도플갱어를 신뢰했어요. 그가 준 정보를 믿었고, 또 균열에서 그놈과 협력했었죠.”
다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창백해진 지호와 눈이 마주친 그는 씁쓸하게 자기 생각을 토해 냈다.
“이 결론은 최근에 내린 게 아니에요. 오랫동안 해 왔던 생각이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추측을 나누었던 헌터들과 대화하고 나면 며칠 후에 그들은 그런 일이 있었나 하며 그 대화를 잊어버려요. 적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죠. 당신도 그럴까요?”
지호는 다은을 비롯해 그 주변에 있던 헌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특수반 사람들의 행각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그들의 정신적 피로도를 관리해 주어야 하는 자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호는 그가 깨닫게 된 사실을 입 밖에 내놓지 않았다. 다은과 세진이 그들이 내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특수반과 그들의 상황이 엮이게 되는 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도훈 씨는, 그러니까 도플갱어는 제게 좋은 동료였어요. 어쩌면 제가 헌터들 사이에서는 갖지 못했던 파트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를 가리켜 좋은 괴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예요.”
좋은 괴물이라니! 지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느낌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그건 애들 만화에서나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야겠지만, 바로 그 ‘좋은 괴물’이고 싶은 지호는 도무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
“같은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란 게 이유라면 같은 산소를 마시는 우리나 지구상의 무수한 동물들은 같은 종으로 묶이게 될까요? 저 하늘을 나는 새나 우리를 같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겠어요? 생명체나 유기체라는 개념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그 근원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거랑은 달라요. 이형 에너지를 다루고 그것으로 회복하는 헌터들을 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지호 헌터, 당신은 알고 있지 않나요? 저는 이형 에너지 능력자이자 동시에 감지계 능력자예요. 당신이 찍힌 영상마다 몰려드는 에너지들을 보고 있다고요.”
지호는 두통을 느끼며 한숨 쉬었다. 게이트를 들어갔을 때 느껴졌던 에너지들의 흐름은 그에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을 터. 지호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괴물의 외형이 된 오른손이었다.
“이렇게 될 전조라도 느꼈나 보죠. 내내 불안정했든가, 아니면 뭔가 다른 괴물 새끼들이 덫이라도 놓았든가.”
“하지만 그건…….”
“당신들조차 온전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저한테 이유를 알려 달라고 말할 생각 마요. 아무도 이형 에너지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살려 내어 새 삶을 선사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것들이 왜 특정 사람에게 들러붙는지는 설명이 되겠어요? 에너지를 붙들고 물어보시든가요.”
도훈이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자기 모습이 웃겼다. 지호는 그가 왜 현상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알 수 없었으니 당연했겠지. 여전히 묘하게 느껴지는 두통 때문에 뒤통수가 쿡쿡 당겼다. 지호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몸을 돌렸다.
“제게 실종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물으러 오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하러 오신 것인 줄 알았다면 말도 섞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지호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호와 달리 자비 없이 정보 차단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두통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던 그는 서글픈 눈으로 느릿하게 열리는 보현의 방문을 응시했다. 김 반장이 배부른 수사자처럼 느릿하게 걸어 나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군, 그래. 임보현의 집이 방음이 잘 안 된 탓에 내가 이야기를 좀 엿듣게 됐소.”
“김동주 반장? 어떻게 여기에…….”
다은과 세진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보현의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단 소식은 들었으나 그가 하필이면 특수반 책임자일 거란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호조차 그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불행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두통이 옅어진다. 두 사람만을 겨누는 모양이었다.
정신계 공격에 약한 감지계 능력자답게 다은은 금방 쓰러졌으나 세진은 비틀거리며 버텼다. 미약하게나마 정신 방벽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래 견디기는 어려웠는지 그의 무릎이 푹 꺾였다. 김 반장은 한숨과 함께 지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협회 놈들이 불렀다고 했을 때부터 알고 있을 거란 짐작은 했다만 너무 부주의한 거 아니냐? 덕분에 기억 전달하던 도중에 둘을 재워야 했어. 부작용들이 좀 있을 거다.”
“이주리 헌터님하고 언니도 모르고 있나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이야기야.”
김 반장은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이들을 번쩍 들어 소파에 기대도록 앉혔다. 신체 계열 능력자는 아니어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 여럿 제압할 피지컬의 소유자라 가능한 광경이다. 지호는 머뭇거리며 침대와 책상에 각기 엎어진 보현과 주리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제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유는 도플갱어 때문이에요?”
“그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괴물들이 대원에게 호의적인 것 같아서 말이지. 어차피 정보 얻을 창구를 대원으로 정했으니 우리의 협조자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잘해 주었다. 오디세이 팀이니 가진 카메라나 녹음기가 있을 거야. 좀 찾아봐라.”
지호는 다은이 달고 있던 가슴 부분의 소형 카메라부터 떼어 냈다. 어디에 정보가 저장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다행히 김 반장은 아는 것 같았고, 인상을 한 번 찡그린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오디세이 팀 두 헌터 이름을 읊었다. 특수반 반장 정도 되면 이 정도 일은 뒤에서 처리해 주는 팀도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한테 기억을 전달해 주러 직접 오신 이유가 뭐예요?”
“내가 제일 먼저 검토받고 무혐의로 풀려나서.”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것 같았어요. 이주리 헌터님이 보고 들은 것 중에 혹시 검열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