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98화 (199/260)

198화

“예?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죠. 도준우 헌터 사망 이후 가장 빠른 헌터의 타이틀을 제가 가지고 왔으니 원한다면 저를 이용하려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 기억은 끊긴 적이 없고, 누구와는 달리 혼자서는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동행이 없었던 상황이 더 드물죠. 다행히 파트너가 알리바이가 되어 준 셈이에요.”

김 반장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보호자한테 나쁜 것만 쏙쏙 골라 배웠다는 그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주리는 지호를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여기에 와 있긴 하지만 제일 큰 건 제가 분노로 동생을 패 죽일까 봐, 저를 말려 줄 몇 안 되는 대상에게 몸을 의탁하는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도움은 안 돼요. 임보현 헌터님도 저와 비슷하게 조용한 분노에 몸을 내맡기는 사람이니.”

“제가 보기에 이주원 씨는 퀸 패러사이트에게 조종당하는 균열 외부의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게 싫어서 괴물이 미치도록 무서운데도 자꾸 균열로 뛰어드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 안에서는 놈의 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놈을 게이트에 처박아야겠군요. 다른 자들에게 영향이 미칠지 모르니.”

주리는 담담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하며 열람 끝난 파일들을 한쪽으로 밀었다. 때맞춰 보현이 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돌아왔다. 붉게 물든 눈가가 약간 부은 것 같았으나 아무도 그것을 거론하지 않았다.

보현이 본인의 본래 용건을 마치고 양 박사가 원하는 자료를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했기에 지호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 옆에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다가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게이트에서 겪었던 현장 상황들을 전하고 여왕에 대한 정보를 나눌 생각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의 적이었으니까.

두 번째 세트를 마치고 몸을 푸는데 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디세이 팀 신다은 헌터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신다은 : 이지호 헌터, 오늘은 뭐 해요? 깜짝 방문 괜찮나? 전에 너무 훈련하고 일하는 영상만 찍어 왔다고 촬영 팀이 한 소리 들었다니까요. 오늘은 너무 불편하지 않게 사람들 우르르 데려오진 않고 저랑 세진이만 왔어요. 게릴라 촬영! 저 문 앞에 있으니까 열어 주세요~]

하트 뿅뿅 날리는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였다. 또 운동만 하고 있던 지호는 당황스러워하며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이밍 좋게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활짝 웃는 신다은 헌터 옆으로 불편한 얼굴의 최세진 헌터가 보였다. 일전에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썩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던 것이 기억났다. 도훈과 함께 캠프 앞에서 쫓겨났던 때였던가. 지호는 난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이지호 : 집에 손님이 계셔서 제가 나갈게요.]

[신다은 : 네? 오늘이야말로 이지호 헌터님의 집을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이지호 : 아시다시피 보현 언니네 집이라서요.]

현관 밖 얼굴들을 확인한 보현은 거실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손짓해 보였다. 주리는 순순히 자료를 챙겨 일어났으나 김 반장은 그래서 어쩔 테냐는 얼굴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오디세이 팀이네. 대원이 이번 게스트인가 보지? 별로 보여 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입 다물고 들어가기나 해요. 여기 와 있는 거 카메라에 찍히면서 자랑해 댈 거 아니면. 그 잘난 정신계 능력들은 기계 앞에 무용지물이잖아.”

“현대 과학이 사람을 무능력자로 만드는군.”

김 반장은 툴툴거리면서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보현 역시 윙크하며 들어와도 괜찮다고 일 보라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지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곧바로 카메라 렌즈가 반짝이며 이쪽을 찍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멀뚱히 선 두 사람뿐이었다. 지호는 그들 뒤쪽을 두리번거렸으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은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기 가슴 포켓에 달린 초소형 카메라를 가리켰다. 헌터 배지 옆에 달려 있었는데, 옷 장식이나 버튼처럼 보여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또 만나서 반가워요, 이지호 헌터. 여기는 최세진이라고 해요. 말재주는 좀 없지만 날카롭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우리 오디세이 팀의 태클과 설명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세진은 썩 편하지 않았는지 고개만 슬쩍 숙이고 고개를 돌렸다. 지호 역시 굳이 친교의 시간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어, 제가 다른 임무로 잠깐 옛 선배의 조언을 얻으러 집에 들른 거라서요. 이게 촬영되는 건 좀 곤란할 거 같은데요. 꼭 오늘 찍어야 할까요?”

“앗, 그치만 게릴라 촬영인데요! 무슨 임무 중이다, 하는 걸 찍을 수는 없어도 그 중간 과정이라든지 준비 단계 같은 것들을 보여 줄 수는 없을까요?”

지호의 난처한 얼굴은 다은을 체념시키지 못했다. 그는 콧소리와 온갖 애교로 지호를 더더욱 불편하게 한 다음에서야 억지로 승낙을 받아 내곤 이것 보라는 승리의 미소를 세진에게 지어 보임으로써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두 분이 뭐 내기라도 하셨어요?”

“네! 세진이가 좀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어서요. 한동안 헌터님을 취재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거라나 뭐라나. 물론 저는 헌터님이 언제나 저희에게 협조적일 거라고 자부했지요!”

수완으로 얻어 낸 협조지만 어쨌거나 지호가 촬영을 허락한 건 맞았다. 나가자고 했던 메시지와 달리 지호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을 보이자 다은은 활짝 웃었다.

“잠깐만 구경하고 나갈게요. 손님들께도 죄송하니까~”

몸을 숙여 신발이 여러 켤레 놓인 것을 촬영한 다은은 유유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시네요, 아주 심플하고 깔끔한 성격이신가 봐요, 하는 말들은 다 따지고 보면 집에 뭐가 별로 없다는 의미 아닌가. 지호는 자기가 말을 삐딱하게 듣는 어른으로 자라 버리고 만 것인지 염려하며 잠자코 다은을 따라 움직였다.

들어오자마자 직진한 탓에 현관 옆에 놓인 치료기를 제일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거 본부에 있는 그 기종이네요?”

“제가 집에 왔을 때부터 있었어요. 언니 물건이에요.”

사용이 끝난 필터가 한쪽에 상자째로 쌓여 있었는데 그걸 비우는 건 도우미 이모님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양이 상당했다. 다은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치료기를 많이 사용할 만큼 자주 다치셨던 걸까요?”

“1세대 헌터들은 보통 그랬다고 하던데요. 사실 저는 잘 몰라요. 아시다시피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대균열 직후 벌어진 지옥도를 마주하기에 지호는 많이 어렸다. 다은은 자신 역시 1세대 헌터는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다은과 최세진 두 오디세이 팀 헌터들은 2세대 헌터로, 전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정신계 능력 보유자가 있는 시대에 태어난 각성자였다.

“일반적으로는 직상 상사나 동료를 위해 각성할 계기를 얻는 일은 없잖아요?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위해서는 각성해도. 저 새끼가 저기서 죽으면 안 된다, 내 손으로 죽인다, 뭐 이런 원한 있는 사람 아니면야……. 운 좋게 저흰 사내 커플이었어요. 덕분에 살아남았죠. 결혼도 약속했었고……. 애는 못 가지게 됐지만요.”

그때까지도 내내 좋지 못한 표정이었던 세진은 옛이야기가 나오자 슬금슬금 다은의 옆에 다가와 섰다. 어깨에 닿는 온기를 느낀 다은은 싱긋 웃으며 곁에 온 연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서 대균열 당시의 일까진 알 수 없어도 2세대 헌터 된 입장에서 어느 정도 빈도로 균열을 드나들고 다치고 굴러야 이런 걸 집에 구비해 둘 수 있을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죠. 임보현 헌터가 이제야 은퇴하는 게 놀라울 정도네요.”

일부는 지호가 쓰긴 했지만, 아무튼 이 빈 필터 대부분은 보현의 것이다. 지호는 보현이 스스로 몸을 혹사시키며 달려왔을 나날들을 생각하곤 씁쓸해졌다.

“지금 열린 균열 중에 중부 지방 부근에 있는 건 없으니, 다른 지역으로 파견 가는 게 아니라면 게이트 정찰대로 나가시겠죠?”

지호는 눈만 끔뻑였다. 카메라 앞에서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가슴팍을 가렸다.

“이건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생방도 아니고 편집 엄청 할 거라고요.”

지호가 보여 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다은은 그의 옷장을 재미있어하며 둘러본 다음 보현의 옷들과 대비된다며 깔깔 웃었다. 색 대비가 극적이기까지 했으니 지호가 보기에도 좀 웃기긴 했다. 그는 담담히 똑같은 옷 여러 벌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러면 고르지 않고 바로 입고 나갈 수 있고 좋은데요.”

물론 보현은 질색하는 옷장이기는 하다. 보현이 꾸며 주었을 당시에서 전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몸만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방이라 사실은 보현의 방과 다름없는 제 방을 소개한 지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정도 보여 줬으면 된 것 아닌가? 하는 얼굴이었다.

지호 소개랍시고 보현의 집 촬영을 마치게 된 둘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지호의 개인 소유물이 없을 줄 몰랐다. 지호 물건이라고 볼만한 건 핸드폰이나 옷 정도가 전부였다.

“이지호 헌터, 되게 많이 벌지 않아요? 소박하네…….”

지호는 그 큰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말하려다 그냥 물건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집을 대강 둘러본 뒤 11층에서 밖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보현의 효율적인 통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란다 창문인 곳을 소개한 지호는 머뭇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다른 사람들도 집 구경하고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오디세이 팀 일상 방송 같은 거는 잘 챙겨 보질 않아서요. 정보 방송 위주로 보고…….”

각성하기 전 지호가 제일 자주 보던 것이 오디세이 팀 방송이었다. 여러 괴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 생존에 필요한 이야기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새로이 알려지는 헌터들 이야기에 관한 것들을 비롯해 다양한 것들을 가르쳐 주는 채널이었다.

지호는 균열 생존 정보를 위주로 습득했었기 때문에 헌터들을 연예인처럼 조명하는 일상 방송에 관해선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주머니 부근의 브로치를 움직여 카메라를 가린 다은은 보현과 그 일행이 있을 방 쪽을 눈짓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크게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이지호 헌터 분량은 거의 다 뽑았거든요. 실은 오늘 저희 둘이 온 건 촬영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추가 분량은 이미 다 찍었고요.”

“촬영 때문이 아니라고요?”

“네, 실은. 할 말이 좀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것도요.”

다은이 시작한 말을 세진이 받았다. 지호는 머뭇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집에 들어온 이후 거의 모든 대화를 다은과 나누었기에 지호와 세진은 인사 정도 나누었다고 말할 수준의 타인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난 균열에서는 미안했습니다. 도플갱어에게 죽은 조민재 헌터가 제 친구였거든요. 도무지 이성적인 머리로 볼 수가 없어서 좀 더 날 선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른스러운 대처는 아니었죠.”

거의 처음 듣는 수준의 이름이었으나 지호는 세진의 추가 설명 덕분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상원과 함께 계양 균열에 들어갔다가 그를 살리고 죽었던 신체 계열 헌터였다. 지호는 썩 편하지 않은 심경으로 세진의 사과를 받았다.

“제게 미안해하실 이유는 없죠. 친구의 원수인 괴물이 옆에 있는데 거기서 도훈 씨를 공격하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셨던 것 같은데요.”

“이길 수 없는 상대라 덤비지 못했던 겁니다. 부끄럽게도 헌터로서 그렇게 강한 축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 옆에서도 그를 충분히 제압할 여유 있는 이지호 헌터와 달리…….”

“아니, 그런 이유로 같이 있던 건 아니에요.”

지호는 황급히 세진의 발언을 정정했다. 세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협회에서 보기에 이지호 헌터는 꽤 중요한 인물이죠. 하지만 현장 헌터들이 보기엔 임보현 헌터의 무모함을 쏙 빼닮았으면서도 경험은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합니다. 물론 각성하며 타고난 능력 자체가 상당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러나 여태 해 온 독단적인 행동들이 이지호 헌터를 고립시켰죠. 아마 느끼고 있었을 테지만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으며 몸을 사리기엔 지호의 삶이 너무 바빴다. 위에서 김 반장을 강제로 임시 파트너 삼아 주지 않았으면 여전히 혼자였을 상황까지는 생각해 낸 지호는 그저 그러냐고 고개만 까딱였다. 어차피 현장 들어가 사람들을 구할 때는 이해관계는 뒷전이 되기 마련이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여태까지 꽤 많은 이들은 이지호 헌터를 평범한 헌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균열 경계로 사라졌다가 돌아와서 모두가 너무나도 기다리던 그 소식을 전해 주기 전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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