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나쁘지 않은데요?”
지호의 기대와 달리 보현은 순순히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손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새 온라인으로 자료 저장하는 거 못 믿는다고 완전 아날로그로 연구 자료 기록해 놓는 사람도 많긴 해. 특수반 일 할 때도 종종 봤지. 자기들이 구린 짓거릴 쳐 하니까 딴 새끼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놈들 말이야.”
“그리고 임보현 씨가 무리하다 잘못되었을 경우의 보험으로도 괜찮은 길입니다.”
지호는 주리를 흘겨보았다. 김 반장의 험악한 말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주리의 발언은 선을 넘은 수준이다. 그러나 화내야 할 보현이 별 반응 없이 어깨나 으쓱이고 있으니 지호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 박사 아이디어라는 건 별로 맘에 안 들지만, 확실히 제가 잘못된 후를 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균열에 안 들어오면 오래오래 건강할 수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에이, 지호 씨는 균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릴 줄 알고 생활해요? 어쩌다 보니 그냥 들어가고 막 그러는 거라고요. 사람들 위험한 상황인데 여력 있는 내가 어떻게 두 다리 뻗고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겠어요?”
지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당초 각성한 사람들에게 자기 안위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니 자신을 챙기라는 말이 잘 먹힐 턱이 없기는 했다.
지호는 불평을 쏟아 내는 대신 그런 말을 하고 싶다는 얼굴로 입만 꾹 다물었다. 보현의 선택이고 결정이다. 거기에 지호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집에 돌아왔더니 손님이 와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애당초 지호나 보현이 집에 잘 머무르는 일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피차 병원 신세 진 시간이 길어 더 그랬을 것이다. 지호는 슬그머니 질문했다.
“용건 끝났으니 물어보는 건데요. 오늘 언니 집에서 무슨 모임 같은 거 있는 건가요?”
“사람들 눈 피하기에 집만큼 좋은 데가 없잖아요. 원래 김 반장님이 여기 있으면 안 되거든요.”
다른 특수반 사람들이 모두 조사당하고 있는 와중이다. 김 반장은 별 대꾸도 없이 어깨만 까딱이고 말았지만, 주리가 지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에 관해 이야길 하러 모인 겁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지호의 표정이 너무 엄청났는지 보현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지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덮었던 파일을 펼쳤다. 보현의 팔 아래에 눌려 있던 흔한 플라스틱 파일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는데……. 퀸 패러사이트가 가진 다섯 호위대 중 네 놈의 상대법을 조사해 왔거든요. 그중에 셋을 주리 씨가 직접 봐서 기억 정보도 전달받을 겸 차출 요청했어요. 뭐 여러 일이 있긴 하다고 알고 있는데, 우선 조사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씩 혐의 벗고 있다고 해요.”
“균열에 다시 들어가려고요?”
“그렇겐 말 안 했어요. 하지만 알고 있으면 좋은 정보잖아요. 언제 어디에 균열이 생길지 모르는데. 참, 지호 씨도 그 호위대 중에 본 거 있어요?”
준우의 멀끔한 얼굴이 곧바로 떠오른다. 지호는 거의 척수 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숨길 것은 아니니 와서 보라고 손짓한 보현 덕분에 지호는 슬그머니 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균열에 들어갈 생각이 만만이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는 때라는 게 올 수도 있잖아요. 눈앞에 균열이 열리고 거기에 퀸 패러사이트가 나타나는 어떤 순간 같은 것들.”
지호는 보현을 게이트 앞으로 데려가는 일만큼은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보현이 가진 것들은 불분명하게 촬영된 퀸 패러사이트와 그 호위대원들의 사진이었다. 준우와 달리 지능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던 괴물들. 한때 다른 헌터였던 자들을 잡아먹은 것인지, 아니면 퀸 패러사이트에게 세뇌당한 몸이 더 효율적인 사냥 태세로 모습을 바꾼 것인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흔들리는 사진 속 괴물들은 흉악하고 난폭하며 잔인한 성정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붉은색이 없는 사진이 없을 정도로 선혈이 낭자해 보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지경이었다.
“검암 캠프에서 찍힌 것들입니다.”
주리가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보현이 균열 부근에 나타났고, 준우가 같은 위상에 자리하던 그 순간이 떠올라 다시금 불편한 기분이 된 지호는 사진을 몇 장 넘겼다. 퀸 패러사이트에게 연결된 괴물들이 닥치는 대로 인간을 뜯으며 살육하는 모습들이다. 사진 찍은 자도 죽었을 것이다.
“괴물들 대부분은 먹기 위해 인간을 사냥합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들이 있죠. 협회가 그들에게 코드 레드를 부여하는 이유죠.”
도훈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의미다. 언급하지 않아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지호 역시 그를 두둔할 수는 없다. 도훈이 많은 인간을 먹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당연했다.
“최근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퀸 패러사이트는 이번 검암 캠프에서 유독 잔인하게 인간들을 살육했습니다.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행동했죠. 처음에는 그저 헌터들을 도발하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만…….”
주리는 말끝을 흐리더니 클립으로 서류 옆에 고정해 놓은 사진을 가리켰다. 호위대 없이 퀸 패러사이트만 단독으로 찍힌 사진이다. 그런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곤충의 키틴질 가득한 갑각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웠던 표면은 어디 가고, 주름지고 거뭇하게 물든 외피로 힘겹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준우의 행동 양식이 달라졌던 것이 생각났다. 여왕의 호위대 놈들을 잡아 족치기 시작했던 이유가 퀸 패러사이트에게 이상이 생겨서였으니 놈이 죽어 가고 있으리란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충격적인 변화다. 쇠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놈은 자신의 숙주 위에 얹혀진 채 다른 것들이 사냥해 온 것을 받아먹고 있었다.
지호는 보현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놈들의 정보를 긁어모으는 이유를 깨달았다. 퀸 패러사이트는 이대로 내버려 둬도 죽을 것처럼 보였고, 보현은 아마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텨 온 사람이다.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을 이유였다.
“알아서 죽게 놔둬요.”
지호의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남은 것은 이거 하나였다. 보현이 손대지 않아도 퀸 패러사이트가 죽는다면, 그 이후에 보현은 더 이상 위험한 행동을 하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균열에 대뜸 뛰어들지도 않고 아픈 몸으로 병원을 탈출하지도 않을 것이며 단독으로 위험한 현장을 돌아다니며 행동하는 일도 없겠지. 지호의 말을 들은 김 반장은 혀를 찼다.
“그런 말 들어 먹을 놈이었으면 여태 이러고 안 있지. 우리라고 알아서 죽을 길 선택하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고 있던 건 줄 아냐.”
“놈이 자연사하고 나면 오히려 제 마음속 어딘가가 공허해질걸요. 저한테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갔는데 그 대가는 치르고 죽어야지, 어딜 편히 가려고 해요. 안 그래요?”
지호는 차마 동의하지 못했다. 준우가 살아 있다는 걸 말하면 오히려 나아지지 않을까? 목 끝까지 차올랐던 생존 소식은 보현의 눈 속에서 불타는 차가운 분노 때문에 도로 발치까지 추락한다. 지호는 고개를 숙였다.
보현의 반응, 그리고 그의 삶의 목표로 미루어 짐작할 때 지호는 보현이 자신의 근원에 관해서는 무감각한 삶을 살아왔으리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보현이 살아왔던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고, 그는 아무것도 명확한 것 없는 부연 안갯속을 맨손으로 개척해 온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라보기 바빴을 것이고, 그 사건 후에는 잃은 것을 갚아 주기 위해 전력으로 달리느라 돌아볼 새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보현이 자신 역시 괴물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보현과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늘어날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미듯 아팠다. 지호는 주리와 김 반장이 협회에서 빼낸 검암 캠프의 상세 자료들과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 정보들을 보며 침묵했다. 이렇게 정보를 빼돌리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그 상대가 임보현이라면 어느 정도는 참작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지호는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주리가 늘어놓은 사진 속 명확한 구형 전투복의 존재. 보현의 시선이 그것들을 당연한 듯 훑다가 석상처럼 멈추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이다. 김 반장은 몰랐겠지만, 지호와 주리는 알아볼 수 있을 변화이기도 했다. 현장 상황을 시간 순서대로 읊어 나가던 주리가 말을 멈추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습니까?”
“퀸 패러사이트가 데리고 다니는 괴물 중에 3세대 이후는 없는 것 같아서. 구형 전투복이잖아요.”
주리는 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최근에 준우를 보았던 지호가 보기에도 구형 전투복이라는 것 외의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사진이라 보현이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턱은 없었다. 그런데도 보현의 눈길이 구형 전투복에 오래 머문다.
파일이 탁 덮였다.
보현은 한쪽 눈썹만 삐딱하게 올리며 주리를 응시했다. 주리는 무표정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제 신경이 둘째 새끼한테 쏠리지 않도록 협조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조건으로 가지고 온 자료들인데 딴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언제 딴생각했다고 그래요.”
“제가 임보현 헌터님 습관 중에 모르는 게 있을 줄 아셨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당신의 복수에 집중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짜 딴생각은……. 아녜요. 옛날 생각이 자꾸 나서.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올게요.”
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물 틀어 놓고도 한참 찰박거리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영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웠던 탓에 슬그머니 주리와 김 반장의 눈치를 살피던 지호는 소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저, 근데 이주리 헌터님의 기억만 보여 주는 거 아닌가요? 왜 굳이 현장 설명을 듣고 사진을 봐야 해요?”
“대원이 일 년도 안 된 초짜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되는군.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작정 기억을 만들어 봐야 오래 남지도 않고 금세 왜곡되고 사라지기 마련이야. 전에 내가 한 번 보여 주지 않았던가? 타인의 기억을 전달한다곤 해도 결국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니 흐려지는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거든.”
김 반장은 픽 웃으며 다른 헌터들에게는 보편적인 상식을 하나 알려 주었다. 지호는 헌터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주리는 보현에게 보여 주었던 사진들을 정리하여 번호대로 수납하며 한숨 쉬었다.
“그러니까……. 활약상은 잘 듣고 있습니다. 이지호 헌터. 제 동생을 또 잡아넣어 준 것도요.”
지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그가 보아 온 이주리 헌터는 원칙주의자처럼 보였지만, 한편으론 가족에 대단히 집착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의 막내 이야기를 떠올린 지호는 얌전히 입이나 다물고 있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협회를 통해 조사 중인데 제 동생을 통해 이쪽으로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가 꽤 긴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눈치채지 못했죠.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신체 계열 퓨어 헌터가 뭘 느끼고 뭘 알 수 있었겠어요. 협회에서는 그 새끼가 주원이를 통해 저를 조종했을 수도 있으니 만약의 경우 절 격리하겠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