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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96화 (197/260)

196화

지호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온갖 것들이 중첩된 풍경들이 그를 심란하게 했다. 그들이 찍어 온 풍경을 본 연구 팀들의 표정 역시 비슷하게 변했다. 양 박사를 필두로 머리 좋은 자들이 의견을 모으더니 결론을 내리곤 헌터들에게 통보했다.

“일차적 목표가 괴물로 변한, 혹은 아직 살아 있을 실종자 찾기죠? 그들이 게이트를 넘어오는 건 부차적인 일이고.”

“그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들을 게이트 앞까지 모으는 정도의 사소한 목표를 위해서 문 위치를 옮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실종자들이 아무리 괴물로 변했다 한들 자신에게 익숙한 건물들에서 멀리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게이트 저편으로 어떻게 자재를 옮기고 어떻게 건설을 시작하나 하는 문제에서 전자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현장의 재료를 변형해 가공한 뒤 곧바로 건축에 들어갈 수 있으면 시간은 훨씬 단축될 것이다. 이형 에너지 능력자들이 다수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차피 균열 내부에서 하는 공사라 일반인이 들어가는 건 가능하지도 않았다.

“위험한 정찰 임무를 맡아 주셨던 건 감사하군요. 이쪽에 오래 붙들어 두진 않을게요. 각자 다른 일이 바쁘지 않은 선에서 시간을 맞춰서 몇 번 더 게이트 밖 정찰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순자는 헌터들을 대표하여 대답했다.

“괴물 때문이겠죠? 아까 같은 상위종으로 추측되는 압도적인 능력의 괴물이 근방을 자기 구역으로 지정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캠프 건설은 꿈도 꿀 수 없을 테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어요. 맞죠? 이지호 헌터가 균열 안에는 약한 괴물들만 돌아다닌다고 했던 보고. 저것들은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는 강한 놈들일 테고. 놈들과 마주쳐야 한다면 당분간 건설 일은 좀 미뤄야 할 것 같은데요.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현장에 사람들을 투입할 순 없어요. 만약의 경우에 대피하기도 어렵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로봇들을 다수 투입해 외부 정보를 수집하고 서버에 저장한 뒤 신호 재수신까지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지시해 놓았는데 이상하게 족족 부서지고 돌아오질 않더군요. 뭔가가 있기는 할 겁니다. 그래서 헌터님들께 도움을 요청한 거고요.”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특히 나연은 영 불안한 얼굴이었고, 게이트를 넘어간 이후로 단 한 번도 밝은 모습을 보인 일 없이 뻣뻣했다.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순자는 캐묻지 않았다. 감지 파장으로 상위종을 확인한 건 그가 아니라 나연이었기 때문이다. 긴장할 이유가 있는 강함이었겠지. 그 때문에 순자 역시 최대한 위험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하는 헌터였다.

지호가 순자와 함께 촬영해 온 거대한 그림자의 존재는 한국 협회뿐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를 술렁이게 했다. 물리적 교류는 끊어졌으나 살기 위한 정보 교류는 큰 이득이나 조건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 측이 균열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도 괴물들의 세계에 진입할 기술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겠지만, 거기에서 괴물들의 우두머리로 추측되는 거체를 목격하고 그 영상을 찍어 오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모두를 술렁이게 했다.

희망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좋았겠지만, 마지막 희망이 꺾여 실의에 빠진 자들이 많았다. 협회 역시 해당 사항을 특급 기밀에 부치기를 원하며 헌터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해산이요? 이대로?”

“싫으면 지금 저기 들어가서 저놈 정체를 캐고 다른 괴물들이랑 싸울래요?”

물론 그럴 재간이 있을 턱이 있나. 나연은 협회로부터 내려온 해산 명령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로 해산인가요, 위장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무작정 들어가 개죽음당하는 건 당연히 안 될 일이겠지만, 우리가 거의 처음으로 찾아낸 실마리 아닌가요? 괴물 중에 그것들의 정점에 선 존재가 있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잖아요. 만약 그걸 모르고 여기 들어왔으면 저 그림자가 그 괴물의 것이란 사실도 추측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추측일 뿐이니 정확한 사실은 아니기도 하고요. 저것이 여왕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헌터들의 절망은 더더욱 깊어질 것이다. 지금도 저 태산 같은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 와중이었으니.

한나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려온 명령이었기에 주변은 어두웠다. 기묘하게도 게이트 저편의 풍경은 시간의 흐름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저쪽이 훨씬 밝아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누군가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지호는 처음으로 저쪽으로 넘어갔던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가 괴물들의 방식으로 저쪽으로 넘어갔을 때 말인데요…….”

상황을 설명하려던 지호는 멈칫했다. 자신의 표현에서 이상함을 느낀 탓이다.

괴물들의 방식이라고? 하지만 지호가 알고 협회 소수가 비밀에 부치는 바로 그 사실에 따르면 지호 역시 그것들과 다르지 않지 않나. 그는 어떻게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고, 그것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

“넘어갔을 때, 뭐?”

태양이 재촉한 탓에 기이하게 잡히던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그러나 지호는 그것을 쉬이 흘려 넘기지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걸 느낀 적이 있어요. 한 번뿐이었지만요. 그것들의 방법으로 균열을 넘어간 것 자체가 한 번이었으니 어쩌면 모든 균열이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니 몇 시간 헤매고 왔는데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고 했었죠?”

지호는 그가 균열을 통과하려고 하기 직전에 손을 미리 넣어 보았고 그때 손톱이 자랐던 일들, 며칠 굶은 것처럼 배가 고파졌던 상황들을 이야기했다. 양 박사와 연구 팀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보충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게이트를 넘어갈 때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걸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이쪽 게이트를 이용했던 전양련 측 사람들 증언도 일치하고요.”

“그 괴물들 방법이란 게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요? 불안정하다든가.”

일부가 그럴싸한 추론을 내어놓았다. 모인 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동안 양 박사 옆에 있던 한결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이지호 헌터 외에도 한 사람 더 있잖습니까? 균열을 넘어가 다른 균열로 돌아온 사람이……. 그쪽에 의견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면…….”

“안 돼요.”

지호는 딱 잘라 거절하며 말 꺼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으나 그 의견이 퍽 좋게 들린 것인지 눈을 빛내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양 박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수상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지호는 황급히 말을 덧붙여야 했다.

“언니는 지금 몸이 많이 약해졌어요. 신체를 보호하는 보조구 없이는 들어가자마자 쓰러질 정도로 약해졌다고요. 옛날에야 전설이었지만 그것도 한때예요. 오솔잎 헌터님도 아시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균열에서 사람들을 구하다 일어나지 못하게 됐는지.”

솔잎은 주변을 둘러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보현과 마찬가지로 대균열 당시에 각성한 몇 안 되는 1세대 헌터 일원으로서 그는 진지하게 부연했다.

“이지호 헌터 말대롭니다. 1세대 헌터들 중에 아직 활동하는 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그중에서도 신체 계열 능력자 아닌 사람은 없다시피 해요. 게이트를 넘어가면 또 이형 에너지의 영향을 받게 되죠. 추천하고 싶지 않군요. 심지어 더 이상 헌터가 아닌 사람이기까지 한데…….”

순자 역시 동의하자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좀 더 우세해졌다. 지호는 안도했다. 보현을 여기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으니.

그러나 솔잎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이지호 헌터가 임보현에게 균열 이동법을 배운 게 아닌가 보군요?”

“균열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이 알고 있어 봐야 좋은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돌아올 방법 하나 남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정신을 조종하는 종류의 괴물한테라도 넘어가 봐요. 대재앙이에요.”

“그러면……. 그 방법에 관한 걸 여기 연구원들에겐 공유할 수 있지 않나요?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균열과 이형 에너지에 관해 연구하면서 본인들이 뛰어들 위험을 감수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닌데요. 괴물에게 당할 염려는 없고, 그러면서 임보현의 방식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우리 다 모르잖아요. 시도 정도는 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현이 여기에 연루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고 본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지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 박사가 슬쩍 끼어들어 제안했다.

“그럼 임보현 헌터에게 그 방법을 좀 받아다 주시겠습니까?”

“전화로 물어보시든가요.”

“이지호 헌터가 염려하는 바로 그 상황을 우려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누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엿듣고 있을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헌터 웹뿐 아니라 온갖 곳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을 전양련과 그 비슷한 집단들을 떠올린 지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양 박사가 맞는 말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다. 친구들과 단체 대화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조심했던 기억 때문에 지호는 어물거리다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여기 있는 연구진 중에 누가 정보를 빼돌린다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기 되게 싫네요.”

“알아서 말씀드리죠. 여기 들어온 열두 명은 특수반을 통해 정보를 주기적으로 검열받습니다. 정확히는 머릿속을 확인받는 절차를 거친다고 해야겠죠.”

나연만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특수반의 존재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태양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태연하다. 이 바닥에서 꽤 오래 구른 두 사람이니 지호가 뒷 사정을 알게 된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알고 있을 것은 자명하다. 잠시 불편한 기색을 보였던 솔잎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 특수반이 지금 혐의로 의심받는 중인 것을 모르는 자가 있습니까?”

그의 이의 제기에 태양이 부리나케 변호에 나섰다.

“우리 팀원 중에는 자신이 본 것을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들도 몇 있습니다. 개중에는 그것을 데이터로 보존할 능력 있는 놈들도 있죠. 그러니 특수반 관련 일들이 지금 영상 자료로 저장되고 있다는 사실도 추측할 수 있으시겠죠?”

“머릿속을 털어 내보이고 있단 뜻입니까? 하지만 환상은 촬영되지 않잖아요.”

“해당 정보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디스크에 직접 입력시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아무튼, 정신계 능력자들이잖습니까. 뭘 속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기억을 복사하는 일은 뭔가를 꾸미거나 조작하기 어렵고, 그래서 정신계 능력자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때 대충 그런 방식을 씁니다. 우리라고 유쾌한 건 아니에요. 머릿속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들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많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무거운 공기가 흐른 뒤 솔잎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순자는 지호에게 지시했다.

“이상 협회의 명령대로 우선은 해산할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 임보현에게 물리적 방식으로 해당 방법을 전달할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지만, 본인이 해당 자료를 열람하지 않는다면 괜찮은 방법일 것 같군요. 그것을 전달해 준다면 연구 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임보현 헌터를 여기로 부르지 않아도 되고, 동시에 균열에 들어가는 다른 이들에게 그 정보가 전달되지도 않을 좋은 타협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오래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정찰 임무를 맡은 임시 팀은 잠시 해체되었고, 지호는 시흥 연구소를 나오며 어느 때보다 무거운 걸음에 괴로워했다.

보현을 현장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가 결국은 좀 더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게이트를 확인하거나 연구소로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길 넘어가 볼까 할 수도 있고, 어쩌면 퀸 패러사이트나 도준우가 게이트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고가 있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양 박사가 임보현의 이름 석 자를 들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아침의 어린애처럼 설레어하는 것을 봐 주기가 힘들었다.

지호는 양 박사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의논은 해 볼게요. 하지만 결정은 언니가 해요. 제가 균열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했을 때 그걸 이해해 준 사람이에요. 더 현명하고 옳은 의견을 내놓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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