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며칠이나 기다리긴 어렵단 결론이 났습니다. 몇 시간만 더 있다가 게이트를 열어 봅시다. 그러고 나서도 저편에 흉악한 괴물이 있다면 그때는 진짜로 계획을 바꾸어 보지요.”
양 박사의 말이라 지호는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받아들였다. 장소를 변경하는 것이 금액적 피해 이외에 무슨 문제를 야기하느냐고 묻자,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현재 이 게이트는 맨 처음 전양련의 연구 팀이 열어 놓은 곳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호는 아까 나연이 했던 이야기로 짐작했다. 저쪽에 건축물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은 지호가 보고 지나쳐 온 것들이 분명하다는 사실도.
양 박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괴물로 변했다고 말한 실종자들이 게이트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겠죠. 솔직히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당신의 판단이었기에 저는 그 결정을 신뢰합니다.”
늘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입에 달고 다니는 양 박사가 하는 말이기에 진실성 있는 말이었다. 그는 괴물이 된 실종자들의 인간성이나 이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을 직접 보고 온 지호가 내린 판단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지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질문했다.
“헛소리 덧붙이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정체도 모를 위험한 괴물들이 넘어오는 것보다는 인간의 기억을 가진 것 같은 괴물들이 넘어오는 쪽이 안전한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죠? 그리고 제가 상대한 적 있는 것 같은 것들이고.”
양 박사는 싱긋 웃었다. 그 얄미운 얼굴이 대답이 되었다. 지호가 반박하거나 거부하지 않은 건 당시 게이트 위치가 그대로여야만 승환이가 머무는 건물을 쉽게 수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우와 함께 균열로 나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확률도 없지는 않다. 준우의 말에 따르면 그 ‘농장’은 효용성을 잃은 것 같기도 했고.
그러나 지호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멀쩡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 후,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
연구 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포식자로 추측되는 개체는 근방에 남아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나연과 지호는 감지 파장으로 전양련의 옛 연구 팀이 포기하고 와야 했던 고가의 장비들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넘어가서 하나 유인해 오는 쪽이 빠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오솔잎 헌터의 의견에 양 박사는 침음을 흘리며 결사반대를 외쳤다. 물론 그의 의견은 그다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박순자 헌터는 깊이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밀어 넣어 보죠. 감지 파장에 잡히지 않는 신체 계열 괴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우선은 미끼를 넣는 편이 좋겠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된 몇 킬로그램의 고깃덩어리를 대충 집어 든 순자는 게이트 너머로 그것이 철퍽 떨어지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다가오는 것은 없다. 두 감지계 능력자의 관측에도, 청력 예민한 신체 계열 능력자의 귀에도 딱히 걸리는 것이 없어 십여 분 후 통과해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헌터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알죠? 만약의 경우 곧바로 퇴각합니다. 교전하지 말아요. 최우선 목표는 생존입니다.”
균열에 조성된 인위적 생태계가 아니다. 특정 수준 이상은 강하지 않은 괴물들이 있는 곳이 아니다. 순자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며 게이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균열 소멸기에 휘말린 자들 정도나 보았을 황량하고 삭막한 풍경이 그를 반겼다.
순자의 진입 신호. 그를 필두로 네 사람의 헌터들이 게이트에 발을 들이밀었다. 기이한 장막을 통과하는 순간 지호를 향해 쇄도하는 이형 에너지가 엄청났다. 나연은 질겁하며 물러났다.
“무, 뭐예요?”
지호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지난 균열 사건 이후 그의 몸에 모종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하기야, 각성하기 전부터 지호에게 들러붙었을 이형 에너지들이다. 지호는 떨떠름하게 그것들을 통제해 자연스럽게 방벽을 쳤다. 자기 안에 내재한 에너지가 아닌 외부 에너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왜 그래요?”
“여기 주변 이형 에너지 밀도가 다른 곳보다 높아요.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도 하네요.”
“뭐 이상한 건 아니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괴물이라거나…….”
지호는 화들짝 놀라 태양을 돌아보았다. 감지계 능력자가 잡아낼 수 없을 유일한 것을 인지할 줄 아는 헌터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답했다.
“뭐 이상한 거 없다. 그냥 에너지일 거야.”
‘그냥’ 에너지 같은 것이 갑자기 헌터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균열이 아니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현상이 있을 확률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순자는 이 기현상에 관해 의논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색했다.
“계측기에 신호가 잡히는군요.”
“전양련 연구 팀이 이 근방에 임시 캠프를 차렸었어요. 주요 기기들이야 다 챙겼다지만,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신호를 발산하는 종류의 것들은 두고 왔을 수도 있겠죠.”
헌터들은 지호의 기억에 의존해 임시 캠프가 있던 장소로 이동했다. 이동 능력자가 아쉬웠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캠프가 있던 자리는 뭔가가 휩쓸고 간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대충 버리고 간 비닐 쓰레기가 바람에 날려 다리에 찰싹 들러붙었다. 솔잎은 다리를 탁탁 털어 그걸 떼어 내곤 부근을 둘러보았다.
“주변 지역보다 높네요. 저쪽 언덕을 제외하면 여기서 더 고지대는 없을 것 같고.”
“건축물 구조가 이상하고 중간부터 색이 좀 다른 걸 보니 이쪽과 저쪽이 중첩되었을 때 지반 구조도 달랐던 모양이에요.”
나연이 영상으로 주변을 기록하며 추측한 바를 입 밖에 내어놓았다. 지호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신기한 듯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순자는 부근에 남은 괴물들의 흔적을 몇 가지 찾아냈고, 개중에는 그들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것들도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들의 땅은 아니라는 의미다.
건축물들은 불규칙하게 얽혀 있었다. 본디 일반적인 건물이라면 이런 식으로는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연과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온 태양은 근처 건물들이 모두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대단히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두 사람이 촬영해 온 영상을 함께 본 헌터들은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이해했다.
1층으로 진입한 영상 저편에는 701호라는 팻말 걸린 현관이 보였다. 그것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으로 뜬금없이 도서관 이용 시 조용히, 라고 걸린 팻말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는 벽이 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자 벽 재질이 바뀐 복도가 나타나며 위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구도의 낯선 천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발에 밟히는 쪽에 형광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음, 이건 굉장히…….”
“2층을 걷다 보면 5층에 도착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나와요. 어떤 건물은 누워 있고 어떤 것은 건물이 아니고 그냥 외부 바닥재인 것 같은데…….”
헌터들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균열 내부와 외부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한 번 균열 열린 자리에 두 번 같은 균열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 이 건축물들의 무덤 같은 광경을 보면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 사는 곳에 열리는 균열이야 거리 상관없이 먼 곳이 열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거기서 괴물들 사는 곳으로 들어오는 길은 모두 비슷한 곳으로 연결되는 듯한 풍경들.
고심하던 순자는 지호에게 공중으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볼 것을 요구했다. 지호는 그와 함께 꽤 높은 지점까지 올라가 영상을 촬영했다.
괴물들의 눈을 피하고자 고공비행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호 역시 균열의 정경을 한눈에 담은 것은 처음이었다.
날이 궂은 것이 아닌데도 균열은 온통 어두침침했다. 지호는 그것이 흐린 날씨 때문이라고 내내 생각해 왔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간 뒤에 돌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건물들이 이리저리 뒤엉킨 시멘트 숲 위로 그림자 같은 것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호와 순자는 그것이 어디까지 뻗어져 있나 보려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그 끄트머리를 볼 수 있었다. 꽤 큰 도시 하나를 전부 덮고 있는 그것은 황당하게도 무언가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여왕의 것일까?”
노련한 사냥 팀 일원답게 박순자 헌터는 지호와 같은 추측을 해냈다. 한정적인 정보만으로 그런 결과를 도출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지호는 동의의 고갯짓을 보이며 다소 빠른 속도로 아래로 추락하듯 내려섰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내려온 둘을 맞이한 세 사람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순자가 촬영해 온 영상들을 보여 줄 때까지도 그랬다. 그들은 의미 모를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 너머의 황량한 땅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에만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좀 이상한 추측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가 좁은 건 아니고, 그러니까 꽤 넓은 편이긴 하지만 위험한 괴물이 없다는 전제를 둔다면 저 그림자 진 어두운 곳들을 몇 주 정도면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좀 더 정밀한 장비가 있으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우선 저나 이지호 헌터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어두운 지역에만 사람의 흔적이 있어요. 인류의 무수한 부산물들 말이에요.”
도심이었던 것은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어딘가는 인천이고 어딘가는 서울이며 어디는 부산이고 또 어디는 이름 모를 외국의 도시들. 특정 지역이라고 거론하기 어려운 문명이 한꺼번에 섞여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정돈된 적 없는 소란이었다. 그것을 도심이라고 부른다면 현대 문명에 모욕일 것이다.
순자는 그가 관찰한 몇 가지 주요 건축물들을 거론했다. 남산 타워,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멀리서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서 상징적인 것이라 단박에 인식되는 종류의 대형 건축물들이다.
“우리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균열과 괴물의 출몰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죠. 하지만 그 모든 균열이 사실 이곳으로 통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한 번 균열 열린 자리에는 다시 같은 균열이 열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사실 잘못된 지식이라면?”
먼 곳에서 괴물 울음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닭 울음소리도 아닌 주제에 아침을 밝히듯이 길게 소리를 뺀다. 물론 어둠이 걷히는 일은 없다. 애당초 해와 달을 공평하게 가리고 있던 그림자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균열 바깥 세계의 어둠이 모종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은 신음했다. 게이트를 열어 이곳으로 넘어온 지금, 그들은 경계 바깥에서 넘어오는 정상적인 햇볕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선 돌아가요. 혹시 우리가 균열 아닌 곳으로 여기에 넘어왔단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을까요?”
나연의 말은 그럭저럭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근방에 보이는 괴물은 없고 그들의 자취만 남아 있어 운 좋게 교전 없이 게이트 앞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지호는 자기 몸에 무거울 정도로 들러붙은 이형 에너지들에서 벗어나며 게이트를 통과했다. 트램펄린에서 오래 뛰다 내려왔을 때나 느낄 법한 감각 이상이 전신을 관통했다. 다른 이들은 멀쩡해 보이니 원인은 이형 에너지가 분명했다.
지호가 비틀거리자 헌터들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발을 헛디뎠다며 말을 둘러대자 짧은 안도가 이어진 후, 그들은 각기 모아 온 자료를 연구 팀과 공유했다. 지호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경력들이 꽤 되어 이런 현장에서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멀뚱히 순자의 지시대로만 움직였던 지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모자람을 깨달으며 연구 팀으로 넘어가는 정보들을 찬찬히 확인했다.
“여기서 게이트를 다른 곳에 연다고 하면 또 문제가 되겠네. 저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인류의 흔적을 쫓는 게 하려던 바가 아닌가? 하지만 섣불리 문을 옮기면 완전히 괴물들의 자생지뿐인 동네로 떨어질 수도 있겠어.”
조태양 헌터가 문제점을 명확히 지목했다. 별다른 위험이 없어 보였다 한들 운이 좋았을 뿐이지 내내 괴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므로 연구 팀은 수확 없이 게이트를 닫았다. 무작정 열어 두기에는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