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중계기를 두고 오셨다고 했죠? 거리가 어느 정도까지 잡힐까요? 혹시 예전에 제가 주안 공단 균열로 넘어갔다 왔을 때 두고 온 기기 신호는 확인될까요?”
“그게 잡히면 저희도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 텐데, 아시다시피 균열이 열리는 위치가 매번 바뀌었다 보니 그럴 확률은 희박합니다.”
“괴물은 신호에 잡힌 적 있어요?”
신체 계열 능력만 가진 괴물이 아니라면 놈이 신호에 잡힐 것이다. 지호의 질문을 들은 양 박사가 등을 찌른 건지 송한결이 대단히 싫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둘 있기는 했지만 먼 거리였습니다. 사실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몇 헌터님을 초청했는데, 괴물이 혹시나 이쪽으로 넘어오면 놈을 제압해 주십사 해서요. 이지호 헌터님이 메인 공격수이고 몇 분 더 오실 겁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확인해야죠. 그러기 위해 게이트를 연구한 것 아닙니까. 이지호 헌터님은 괴물로 변한 실종자들이 돌아왔으면 한다면서요?”
“언젠가 그럴 수 있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요. 만약 게이트로 넘어올 수 있을 거야,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사실은 못 넘어온다는 결론이 나 버리면 어떻게 해요?”
지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당초 이 문으로 다른 이들이 넘어오는 것을 허락할 사람도 얼마 없을 것이다.
송한결의 말대로 몇몇 헌터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차나연은 이제는 한 사람의 어엿한 헌터가 다 되었다며 장난스레 지호의 등을 두드렸고, 방벽 담당으로 차출된 오솔잎 헌터는 난처한 얼굴이더니 인사만 까딱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태양은 모인 자들을 보고 놀랐다가 지호의 오른손을 눈빛으로 뚫을 것처럼 노려보았고, 마지막으로 온 박순자 헌터는 모인 자들의 조합을 둘러보더니 싱긋 웃었다.
“낯익은 면면들이네요.”
“정신계 능력자는 마땅한 자가 없었나?”
솔잎의 날카로운 지적에 조태양은 눈을 부라렸으나 반박하지는 못했다. 일선의 헌터들에게 태양의 불안정한 능력이 알려진 것은 당연했다. 지호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태양이 왔다는 사실로 꽤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던 탓이다. 태양은 으르렁거리면서도 나름의 추론을 내놓았다.
“차나연 헌터를 제외하곤 전부 신체 계열 병행 능력자들이군. 어지간하면 연구소를 부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이형 에너지 능력자가 더 편하지 않을까요?”
지호의 질문에 곁에 있던 박순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 기기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이 기계들이 이형 에너지에 민감한 모양이죠. 그래서 힘을 유독 섬세하게 다룬다는 오솔잎 헌터를 불렀을 거고.”
“야, 이거 부담되네요.”
나연을 제외한 전원이 신체 계열 병행 능력자다. 태양을 제외하면 안정적으로 능력을 다루는 데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무언의 압박에 조태양은 욕설과 함께 진실을 털어놓았다.
“젠장, 지금 정신계 헌터들 다 바쁩니다. 균열 저편에서 이쪽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괴물이 발견되었고 그 숙주 비슷한 걸 잡았는데 멀쩡히 살아 있고 돌아다니는 인간이었다고요. 심지어 이동 능력잡니다. 다행히 건실하게 돌아 버려서 멀쩡해 보였지만, 까뒤집어 보니 광인에 가깝더군요. 놈에게 수십 명이 들러붙어 기억을 살피면서 동시에 그 괴물의 힘에 대항하느라 저쪽이 너무 바빠서요.”
이주원의 이야기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태양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태양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길 하며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어, 그니까. 사실은 그냥 정신계 능력자를 보냈다는 시늉을 하기 위해 절 보낸 겁니다. 솔직히 제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불편한 이야기였을 텐데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군요. 그래도 정신 계통 능력을 쓰는 괴물이 나타났을 때 경고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죠?”
부드럽게 말을 받은 순자 덕분에 태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헌터들을 통솔하게 된 순자는 나연을 태양 옆으로 보냈다.
“본디 감지계 능력자들은 정신계 능력에 저항이 없으니 조태양 헌터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지호 헌터는 본인 상태 보고합니다.”
“손은 이래도 능력 쓰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좋아요. 살아남는 쪽이 좀 더 중요하니 오솔잎 헌터가 방벽을 맡죠. 저는 만약의 경우 여러분을 비롯해 이곳 연구원들을 대피시킬 인력이겠군요. 책임감이 막중하네요.”
다수를 옮길 만한 염동력뿐 아니라 현장을 파악하고 통제할 팀장 역할을 위해서도 박순자가 적임이었을 것이다. 지호는 괴물과의 직접 대치를 위한 공격조로 배정되었으나 거기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전투가 최선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연의 파장이 게이트 너머를 넘실거리며 흘러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와중에 나연이 고개를 갸웃한다. 지호와 달리 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형태의 파장이 아니었다. 타인의 능력 운용을 보며 새롭게 배우던 지호는 나연의 힘이 갑자기 비눗방울 터지듯 사라진 것을 느끼곤 당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저기 뭔가가. 그러니까 뭐가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대단히 위협적인 느낌인데요. 원래 능력을 도중에 거두어들이는 게 맞는데, 그러면 이쪽으로 거슬러 따라올 것 같아서 그대로 놨어요.”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지호는 저쪽 세계에 존재한다던 포식자의 존재를 떠올렸다. 나연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균열에서 마주치곤 하는 괴물들은 저쪽에 사는 것들의 먹잇감일 뿐인 나약한 놈들이었으니.
“저쪽에 있는 놈들은 원래 엄청 세요. 우리가 균열에서 만나는 것들이 약한 거고.”
지호의 작은 설명이 나연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뭐 잘못 확인한 줄 알았는데. 사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쪽 평균이 제가 방금 확인한 놈 정도라면 우리 절대로 넘어가도 안 되고 넘어오게 해서도 안 되겠는데요.”
“그 정도예요?”
일반적인 괴물 수준이 아니라면 포식자가 분명했다. 도훈이 몸을 피하려고 했던 원인 중 하나. 준우는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는 위협이 아니었는지 알기 어렵다. 지호 역시 도훈을 처음 만났던 균열에서 놈들의 존재감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처음 게이트 근처에 나타난 놈이 그런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놈이면 승산은커녕 우리가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맞는 말이에요. 시간을 좀 두고 다시 문을 여는 게 좋겠어요.”
연구원들이 앞다투어 의견을 내놓았다. 겁에 질린 얼굴들이다. 내로라하는 헌터들 반응이 이상하니 사정 모르는 일반인은 더더욱 겁을 먹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것이 헌터들이 긴장하며 준비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며 일이 잘못되면 죽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고심하던 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에 공급되던 동력이 끊기자 이형 에너지로 흐늘거리며 펼쳐져 있던 길이 물처럼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며 닫혔다.
며칠 간격을 두고 다시 열자고 물러나는 연구원들을 보며 거기 모인 헌터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임시로 모였다가 할 일만 하고 흩어질 수 있을 줄 알았던 탓이다.
순자는 그의 임시 팀원들을 돌아보곤 이마를 짚었다.
“아니 뭐 급하게 임무 들어가지 않아도 돼서 좋지. 우리 합이나 좀 맞출까요? 각자 제대로 인사나 좀 하고, 그 뭐냐. 서로 뜨거운 냄비 취급하면서 데일까 봐 가까이들 안 가는 짓거리 좀 하지 말고……. 어린애들 아니잖아요?”
물론 박순자 헌터 앞에서는 다 어린애가 맞긴 하다. 1세대 헌터이기에 각성 시기는 오솔잎 헌터가 빠르지만, 삶을 살아온 세월은 박순자 헌터를 따를 수 없었던 탓이다. 솔잎은 불편한 눈으로 지호를 넘겨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하면 따르는 것이 우리 일이고 구태여 불편하게 일에 임할 필요는 없죠. 멀쩡하다곤 할 수 없지만, 꽤 건강해 보입니다. 신체 괴변이 현상을 겪었던 다른 헌터들이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동반했단 걸 상기하면 꽤 고무적인 일이군요.”
“여태 신체 계열이었던 괴변이 대상자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묘하게 오솔잎 헌터와 연이 있는 듯 없이 헌터 생활을 해 온 기분이었다. 첫 임무 투입 때부터 몇 차례 스쳐 왔으나 정작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하게 되고 나서는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다. 그가 지호를 못 미덥게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호의 생각과 달리 사방에서 이지호 헌터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온 솔잎은 단기간에 제 몫을 하게 된 어린 헌터를 흥미롭단 시선으로 훑었다. 설령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한들 거기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훈련까진 좋아요. 하지만 균열에 들어가면 다시 악화되지 않을까요? 이지호 헌터가 함께하는 건 연구실 방비 정도까지겠네요. 나머지는 아마 내부 진입을 시도할 것 같고.”
힘을 통째로 소진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연은 인상 쓰며 나머지 셋을 돌아보았다. 지호와 달리 그는 얼굴 아는 사람이 박순자 헌터뿐이었다.
“저기서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하죠? 이쪽에서 여는 위치를 바꿀 수가 있나?”
“그럴 수야 있지만 설치해 둔 기기를 다 버려야 할 것 같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옮겨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이 제일 우선이니 얼마든 말씀하십시오.”
연구원들의 표정이 푸르죽죽해지건 어쩌건 양 박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연은 코를 문질렀다. 그의 것은 냄새를 맡는 것에서 확장되는 듯이 전두엽 부근으로 감지되는 힘이라 많이 쓰면 코가 간지럽다고 했다. 사람마다 발현 방식이 참 달랐다. 사실상 각기 다른 개체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능력을 분류하다 보니 생긴 헤프닝일 것이다.
“게이트 너머에 도시가 있을 확률도 있을까요?”
지호를 돌아보고 던진 질문이었다. 감지 파장으로 훑었던 풍경 때문일 것이다. 지호는 당시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이 있긴 했었다. 다 망가진 것이긴 하지만…….
나연은 단어를 좀 더 면밀히 골라 재차 질문했다.
“분명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는 있는 걸 이용하는 쪽이 유리하긴 하거든요. 제가 방금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저쪽에 건축물 비슷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어, 네. 균열이 닫힐 때 그쪽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가 넘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저쪽 횡단해서 게이트 쪽으로 이동할 때 멀쩡해 보이는 건물 몇 개 보긴 했어요.”
심지어 모 극장 있는 대형 마트의 경우에는 통째로 남아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있던 곳……. 지호는 다른 곳보다 그곳을 먼저 찾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승환이 머물던 건물과도 멀지 않으니까.
그것보다 이렇게 특정 지역에 고정된 게이트를 열 수 있으면 준우나 도훈 쪽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지호가 실종자들의 거처에 관한 정보를 나누자 나연의 얼굴이 한층 심란해졌다.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어 봤자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법. 나연은 이곳에서 자신 외에 유일하게 감지계 능력을 보유한 지호에게 자기 능력 사용법을 설명했다.
“우리 능력의 맹점은 역추적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제가 아까 한 대로 밀어 넣던 힘을 일순간에 전부 방출해 버리면 출력이 끊기면서 파장이 그대로 사라져요.”
“전부요?”
“네, 전부…….”
나연은 말끝을 흐렸다. 애석하게도 다른 헌터들보다 에너지 보유량이 월등히 많은 지호가 쓸 수 없는 방법이란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래도 요령 정도는 알아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호가 모든 힘을 다 쓰고 탈진할 정도가 아닌 이상은 나연과 같은 곡예를 부리기 어려울 것이다. 애당초 나연은 그렇게 강한 능력자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