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헉 하며 곧바로 가격부터 확인하는 셋과 달리 직원들은 빠르고 숙련된 솜씨로 물건들을 쓸어 왔다. 순식간에 비어 버린 매대와 계산대에 찍히며 올라가는 숫자를 본 병아리들은 덜덜 떨었다. 특히 하나는 자기 1차 정산 금액의 몇십 배는 되는 숫자들을 보곤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매장 직원들이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가며 인사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껴 가게를 후다닥 나온 지호는 쇼핑백 몇 개씩 들고 가게를 나온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백화점에서 가격 택을 뒤집어 보며 비슷한 제품을 몇 가게나 돌아다니며 비교하고 제품 번호를 외워 인터넷을 뒤지는 삶 같은 것들은 다 까마득한 오래전 이야기 같다던 소민의 소심한 말들을 들어 보면 그의 친구들 역시 각성하기 전에는 그렇게 부유한 삶을 살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돈도 써 본 사람이나 쓴다고, 지호가 없었으면 세 사람은 이것저것 둘러보고 만져 보다 한두 개 정도 간신히 골라 나왔을 것이다. 보현을 따라 사치스러운 쇼핑을 몇 차례 경험했던 지호는 하나에게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나 언니가 하고 싶었던 대사 제가 먼저 해 버려서 어쩌죠?”
“개쩐다 진짜. 쩌는 경험이야. 그래. 헌터가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지!”
옆에서 흥분하여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지윤을 모른 척하며 고개 돌린 소민은 뻣뻣하게 굳은 하나와 지호를 번갈아 보다 피식 웃었다.
“적응 안 되는 쇼핑이긴 했어요. 그렇지만 기분은 괜찮네요. 사실 저도 좀 끝내준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자기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내려다보다가 지호를 덥석 끌어안았다. 캠핑장에서와 비슷한 장면이 또 펼쳐졌다. 지호는 자기를 덥석덥석 안아 오는 나머지 친구들에게 붙잡혀 하하 웃었다.
백화점 한복판에서 나눈 급작스러운 애정 표현이 끝난 뒤 넷은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뜻밖에도 하나는 훈련 일정부터 이야기했다.
“이번에 다른 지역 사람들하고 몇 번 연합해서 전투했었는데 손발이 잘 안 맞더라고요. 그쪽에서 당연하게 쓰는 포메이션에도 적응해야 할 것 같고, 여러 응용에 대해서도 좀 배우고 싶어서 한동안 서울지부에 가 있을 것 같아요. 실은 어제 신청하고 캠핑 일정 잡았던 거예요. 마지막 휴식 같은 느낌이랄까.”
“엑, 어케 그렇게 벌써 훈련을? 언니 사실 신체 계열인데 힘을 숨김?”
“너는 야, 신체 계열 아니어도 기본 운동은 해야 되는 걸 좀 기억하고 운동하고 있어. 체력도 없이 비실비실해서.”
지윤과 하나가 익숙하게 투닥거리는 사이 소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얹었다.
“저는 아마 박찬민 팀장님 밑에서 일할 것 같아요. 이번 대형 균열만큼은 아니어도 이형 에너지가 이상 계측되는 곳들이 더러 있다고 해서 이동 능력자들이 파견돼서 조사하기로 했거든요.”
“또 이렇게 엄청난 일반 균열은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일반인들에게 대비하도록 공지해야겠죠.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요.”
이번에도 공지가 없던 것이 아니다. 균열이 수일 내로 열릴 거라는 뉴스는 이 주 전부터 있었고, 그나마 구조되기 전까지 집에서 먹을 것과 물을 비축해 둔 사람들은 굶지 않고 구조 팀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가 될 만한 사람들은 외지인이나 집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 정도. 시간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으며, 내일 당장 균열이 열려도 우선은 출근해야 하는 빡빡한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재앙을 피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윤 씨는요?”
“난 집에서 암것도 안 하고 쉬려고 했는데. 다들 뭐 이렇게 열심히 산대?”
“쉬는 것도 좋지. 그것도 중요하잖아요.”
“훈련 일정 잡은 사람이 하는 말은 하나도 위로 안 됨.”
“지호 씨는 뭐 할 거예요?”
지호의 머릿속에 입 밖에 낼 수 없는 온갖 일정이 휘몰아쳤다. 협회와 균열, 게이트에 관한 것들을 제친 지호는 그들에게 말해도 괜찮은 이야기를 골랐다.
“구금되어 있을 이주원 각성자 먼저 찾아가 볼까 하고요.”
“그거 사람 납치를 즐기는 범죄자 새끼였죠.”
“언젠 주원 오빠라더니 평 신박해졌네.”
“그런 거는 정상인일 때 붙여 주는 호칭임.”
하나와 지윤의 비아냥을 들으며 지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주원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지호를 납치했다는 사실은 그의 친구들 사이에 이미 마르고 닳도록 씹힐 거리가 된 지 오래였고, 덕분에 한때 주원과 친했던 지윤조차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또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나 불러요. 바빠도 곧바로 갈게. 위치 좌표 빼먹지 말고요.”
소민의 걱정 어린 시선이 지호를 웃게 했다. 분명 넷 중에 지호가 제일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제일 거칠게 구른 사람 역시도 지호일 터. 문득 지윤이 이상한 제안을 했다.
“우리 위치 추적 어플 깔아 볼래요?”
“엥, 무슨 그런.”
“아니, 이거 균열 내부에서도 작동하거든. 혹시 위급 상황인데 연락 못 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도우러 갈 수도 있고 뭐. 대신 배터리가 좀 빨리 닳긴 함. 팀원들끼린 깔던데.”
넷 중 고정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써 본 일이 없는 기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균열 내부에선 배터리 충전하기가 어려우니 썩 효율이 높지 않다. 의견을 냈던 지윤은 툴툴거리면서도 그럭저럭 납득 가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호 씨가 또 옛날처럼 어디 가서 사고 칠까 봐 걱정되니까 그렇죠.”
“손이 이러니까 좀 더 조심해야죠.”
“이거 걸리면 진짜 협회도 못 막는다. 완전 대서특필에 온갖 sns에 도배될 듯 옛날에 교과서에 실린 그 대통령 뒤에서 조종하던 무당 밝혀질 때처럼 나라 디비질 듯.”
지윤은 특유의 말투로 조잘거리면서도 그의 오른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의 치료 계열 헌터들만이 겪었다던 괴변이 현상이다. 지윤에게도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었다.
“가뿐히 떨쳐 내고 일어나서 사실은 이겨 낼 수 있는 거였다고 모두에게 보여 줘요.”
“어깨가 너무 무거운데요?”
“사실 그런 거창한 이유 아니고, 그냥 우리 오래오래 같이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해야 하잖아요. 안 해 본 게 너무 많은걸요. 그렇죠? 나 사실 통장에 이런 어마어마한 금액 찍힌 것도 처음이에요. 알바 연장이며 대타까지 해 가면서 풀로 뛰었을 때 받은 것도 정말 귀여운 금액이었는데.”
지윤의 표현이 지호를 웃게 했다. 넷은 또 연락하자고, 금방 보자고 아쉬운 인사를 남기며 미적거리다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지호는 진짜 우선순위를 점검했다.
이주원을 찾아가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아직 그는 특수반 사람들에게 넘어가 있다. 그들이 주원을 효과적으로 털 것이고, 말하지 않는 것은 머릿속을 뒤져서라도 알아낼 것이다. 그 부분에서 지호는 자기보다 특수반 사람들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기 싫은 이름자가 떠 있으나 옆에 쓰인 메시지는 그럭저럭 반가운 소식이다. 양 박사가 시흥 연구소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꽤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든 모양이었다. 연구소 초청 소식에 지호는 최단 거리를 확인했다.
***
양 박사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결과물이 지호를 맞이했다. 대단히 피로한 얼굴의 연구진들 사이에서 얼굴을 쏙 내민 송한결은 황급히 양 박사 옆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지호라지만 이런 괜찮은 목표를 달성한 사람을 우선 후려치기부터 하지는 않았을 텐데, 머리가 멍해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다. 그래도 자기 일에 충실한 모습이 보기 좋다. 지호는 한결에게 싱긋 웃어 준 다음 열려 있는 게이트를 응시했다.
이형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수직으로 선 문은 그것이 수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릿하게 흔들리거나 찰랑거렸으나 넘치지는 않은 채 독특한 단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어떻게 막고 있는 거예요?”
“그것까지 알면 제가 여왕이게요?”
“지금 막 한 대 치고 싶어진 걸 보니 여왕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제가 곧 세계를 구할 수 있을 텐데.”
양 박사와 지호 사이에서 한결만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이제는 성장한 덕분에 양 박사의 깐족거림과 덜 여문 인간성을 견뎌 낼 수 있게 된 지호는 그들이 무수한 시도 끝에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긴 했으나 원인에 관해서까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연이 준 선물이었다.
“수치대로 재입력해도 다른 연구소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까 뭔가 뭐 순서 같은 거나 저쪽 환경 때문이나 저희가 모르는 변인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다른 연구소에서는 다 실패했어요.”
“이쪽 게이트만 활성화되는군요. 닫았다가 열어도 그 자린가요?”
“드론으로 확인해 본 바로는 그렇더라고요.”
“아무도 안 넘어가 봤겠죠?”
눈치만 살피는 연구원들을 본 지호는 이미 협회로 올라갔다는 보고서를 확인했다. 일개 헌터일 뿐인 지호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허락한 건 남선일 사령관이었다. 지호는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게이트에 손을 가져가다 멈칫했다.
남선일 사령관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트라우마 치료도 받지 않고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는 헌터들에 관한 말들. 지호는 보고서에서 그의 이름을 읽기 전까지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른 일들로 워낙 바빴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연구원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지호의 행동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게이트에 손을 대려던 지호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송한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지호는 일반인인 연구원들이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만 언짢음을 표했다.
“그럼 이제 꿍꿍이가 뭔지 알려 주시겠어요?”
“꿍꿍이라니 섭섭하네요. 저희는 그냥 열심히 할 일을 다 했을 뿐인데요?”
“양 박사님이 말하면 속이 뒤집힐 것 같으니까 다른 분한테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호에게 직접 지목당한 연구원은 당황했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 일단 동물 실험까지는 성공해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게 가능하다는 것까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참관 오셨던 협회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셨던 말씀이 있었는데, 다들 이걸 만져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만져 보고 싶지 않아요? 되게 신기한데.”
“어, 아뇨. 그냥 무섭고 불편한 기분만 듭니다. 하지만 각성자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서도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능력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좀 시험해 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제 의견입니다.”
지호의 서늘한 눈길에 양 박사는 얼른 한결 뒤로 몸을 숨겼다. 설명하던 연구원은 쩔쩔매면서도 마저 이야기했다.
“추측으로는 이형 에너지가 각성자분들에게 친근한 힘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드론으로 백여 미터 거리 너머에 계측기와 중계기를 비롯한 몇 가지 기계들을 두고 왔는데 아직 멀쩡히 신호가 수신되고 있거든요. 진짜로 고정된 문이 생긴 겁니다.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하나 봐요…….”
마지막 말을 이상하게 마무리한 연구원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호는 안정적인 게이트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괴물이 이 문으로 넘어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