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92화 (193/260)

192화

22. 징조들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해 본 밤이었다. 지호는 그 행복이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밤을 꼴딱 지새웠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하나와 그것 때문에 세 번쯤 깨어나 하나 쪽으로 베개를 집어 던진 지윤,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소민의 조용한 숨소리 같은 것들로 채워진 밤이었다.

늦은 밤 불붙인 채 흔들다가 몇백 미터는 날아가 버린 폭죽도, 갑자기 남의 캠핑카에 불을 낼 뻔한 일도, 죄송하다며 사과하러 갔다가 이지호 헌터인 것을 들켜 사인에 사진 요청에 정신이 없었던 일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되려 간식을 잔뜩 얻어서 돌아온 탓에 챙겨 왔던 것보다 더 많은 음식으로 손이 꽉 찼다.

소민이 이동 능력자라서 다 챙겨 갈 수 있어 다행이라며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은 금방 피로를 느끼고 하나둘 수마에 굴복했다. 아무리 즐거워도 놀 체력이 있어야 놀 수 있는 법인데 바로 얼마 전까지 균열을 뛰어다니며 무리하던 헌터들이니 이때까지 논 것만 해도 불굴의 의지로 버틴 것일 터였다.

논다는 건 이런 거였지. 지호는 각성한 후 제대로 놀러 다닌 적 한 번 없었던 생활을 돌이키며 쓰게 웃었다.

날이 밝은 뒤에 사치를 부려 보자며 요플레 뚜껑 안 핥고 버리기를 시도하려고 새로 나온 요플레를 뜯었다가 현대 과학에게 패배하고 만 지윤은 투덜거리며 요플레를 퍼먹었다.

“요플레가 안 묻는 뚜껑이라니, 삶의 낙이 하나 없어졌어.”

“깔끔하게 먹으면 좋지, 뭐.”

하나는 낄낄 웃으며 낙담한 지윤 옆에 앉아 자기 몫 요플레를 한 입만 먹고 내려놓았다. 이것도 사치스럽다! 하고 외치는 모습이 웃겼다. 지호는 오늘 새 장비를 사러 가자고 했던 말을 떠올리곤 무엇을 살지 질문했다. 돌아온 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장비품 목록이었다.

“그걸 다 산다고요?”

“지호 씨는 은근히 이것저것 많이 갖고 있어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협회에서 기본 지원품으로 나오는 것보다 쓸 만한 것들이 많다고요.”

지호는 당황했다. 명은에게 받거나 다른 각성자 연합 장인들에게 받은, 가끔은 보현에게 받기도 한 여러 물건을 별생각 없이 써 왔던 탓에 더 그랬다. 하나는 특히 열을 올렸다.

“언젠가 잔뜩 벌어서 그거 할 거예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이거!”

“엇, 지호 씨는 벌써 할 수 있을 텐데!”

“나도 편의점 한 구획 정도는 털 수 있긴 할 듯.”

소민과 지윤이 덩달아 소리치자 하나는 버럭하며 자기가 사고 싶은 것들은 너무 고가라 그러기 어렵다고 항변했다. 말 나온 김에 곧바로 물건들을 사러 가자는 말에 어어 하고 휘말린 지호는 엉겁결에 균열 관련 취급품을 다루는 특수 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워낙 고가품이 많은 탓에 협회 센터들과 마찬가지로 특수 처리된 벽면이 그들을 반겼다.

지호는 한 번도 쓴 적 없는 블랙 카드를 꺼내 비장하게 말했다.

“많이 벌었고 또 막 월급날 같은 기분도 드니까……. 오늘 제가 필요하신 거 사 드릴게요!”

“지호 씨 완전 거덜 내야겠네.”

“카드는 함부로 남한테 맡기는 거 아니라는 거 알려 드림.”

지호 카드를 순식간에 낚아챈 하나와 지윤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소민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어서 따라가자고 손짓했다. 두 사람이 어디 있을지 알 것 같다면서.

예전 지호가 마정석 필터 브랜드를 찾을 때 알려 주었던 S사가 백화점에 입점해 있었는지 매장 간판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근처를 오가는 이들이 지호를 흘깃거려 우선 선글라스를 낀 그는 일부러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손을 숨기기 좋은 자세였다.

“소민 씨는 뭐 필요했던 거 없어요?”

“어, 저도 이번에 많이 벌긴 해서요. 다 지호 씨 덕분이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사 주고 싶단 말이에요.”

“필요한 거 생기면 말할게요. 이번에 보니까 하나 씨는 고성능 선글라스 갖고 싶어 했어요. 감지계 기능에 이것저것 딸린 거로. 아마 지윤 씨는 배터리 살 것 같은데?”

“배터리요?”

“치유계 능력자들은 자기 피 깎아서 남 피 채워 주잖아요. 기력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물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보조계 팀원들은 한둘씩 꼭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

“소민 씨도 필요하겠는데요? 이번에 이동 능력자들 죽어 가는 거 보니까 진짜 있으면 좋겠더라.”

“그게 도움되면 참 좋을 텐데, 이쪽은 아무래도 작용 방식이 좀 달라서…….”

두런두런 대화하며 S사 매장에 들어선 지호와 소민은 온갖 선글라스를 다 늘어놓고 하나씩 쓰며 모델처럼 포즈를 잡는 하나와 그것을 감상하며 ‘다음!’을 외치는 지윤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둘을 발견한 하나는 심각한 얼굴로 앞에 늘어놓은 선글라스 몇 개를 가리켰다.

“봐요, 이건 감지계 기능 기본에 50미터 범위 커버되고 통신 부가에 특수 추적, 그니까 은신 개체들 볼 수 있게 열 감지도 딸린 거고요. 이거는 80미터 커버되는데 시야 광각이 낮아서 어두운 데서 쓰기는 어렵고 내구도가 좀 약하대요. 이건 40미터가량 되고 좁은데 열 감지를 껐다 켰다 할 수 있어서 앞에서 본 것보다 훨씬 효율적일 것 같지만, 거리가 너무 달려요. 이건 50미터 표준이고 가격도 꽤 합리적인 편인데 너무 기초 기능에만 충실해서 일반적으로 협회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범위만 좀 넓은 것뿐이고 따로 기능이 있진 않은데 디자인이 장난 아님. 뭐가 좋아 보여요?”

“어……. 범위도 넓고 기능도 여러 개 있는 건 없어요?”

“그런 사치는 요플레 뚜껑 같은 수준이 아니거든요? 첫 월급 탔다고 인생 한 방 하면서 지르면 안 되는 거예요. 돈 쓰는 게 아무리 벌기보다 쉽다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나가 진지하게 조언하며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지호가 갖고 있는 것은 여기 널린 제품들보다 훨씬 가용 범위가 좁았지만 여러 기능이 많았고, 애당초 감지계 능력자인 지호라 범위 넓은 도구는 쓸 필요가 없기도 했다. 소민도 하나가 골라 놓은 것 중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음, 저도 이번 균열 다녀오면서 이동해 간 위치에서 갑자기 숨어 있던 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큰일이 날 뻔한 적 있어요. 이게 도움되긴 하겠네요. 열 감지 기능요?”

“어, 소민 씨는 범위 넓은 거 쓰는 편이 좋지 않나?”

“저 어두운 쪽으로도 잘 들어가는 편이라서 오히려 야간 시야 보정되는 쪽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깐 없어도 될 것 같다더니 물건을 보니 혹하는 모양이었다. 지윤은 벌써 골랐다며 라이터같이 생긴 배터리를 보여 주었다. 마정석 필터를 교체해 가며 사용하는 것인데, 단자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기력이 회복되는 식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지호는 구조를 보자마자 이것이 마정석을 직접 흡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즐거운 쇼핑을 방해할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알 필요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을 굳이 가르쳐 주며 친구들을 괴로움에 빠트리는 취미는 가진 적이 없었던 탓이다.

한참 이것저것 고르던 하나와 소민은 둘의 스타일에 맞는 종류를 선택했다. 소민이 고른 것은 유행하는 패션용 선글라스와 비슷해, 헌터보다는 어디 휴양지로 곧 여행을 떠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격표를 보니 다른 제품들에 비해 상당한 고가 라인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담될 금액은 아니다. 사 준다고 하니까 일부러 이런 걸 골랐나 싶을 정도였다.

계산대 근처로 가던 도중 지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선경의 발명품인 팔찌가 있는 곳이었다. 대놓고 명품 라인으로 취급받는 모양인지 두꺼운 뱅글 팔찌 형태의 보조구들이 간격을 두고 장식되어 있었다. 지호가 뭘 보는지 돌아본 지윤은 혀를 찼다.

“아 저거는 나중에 하나쯤 마련하기는 해야 하는데 좀 무거워요. 좀 아이러니한 게, 신체 계열 능력자들은 균열에서 몸이 망가지는 속도가 느리다고 하거든요. 근데 저걸 착용하고도 본래 속도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신체 계열 능력자들뿐이에요. 진짜 써야 할 사람들에겐 족쇄 하나 달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고요. 운동깨나 한 사람들이야 그래도 좀 묵직한 감이 있네 정도겠지만, 사실 몸을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사람들도 신체 계열 능력자들이잖아요.”

“많이 무거워요? 승찬 아저씨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고 다니던데.”

“그 오빠는 운동 많이 한 사람 카테고리에 들어갈 듯요. 구조대원이고, 몸도 이렇게 두껍고 그렇잖아.”

까르륵 웃으며 팔을 접어 없는 알통을 만들어 보려고 애쓴 지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호를 잡아당겼다.

“저거는 개량품 나오면서 다른 헌터들도 많이 쓰게 될 때쯤 사는 게 좋겠어요. 지금 당장 필요한 거기야 하겠지만, 들고 다니는 것부터 짐인 거를 어떻게 쓰겠어. 목숨 위험할 때는 되어야 어찌어찌 챙기겠지.”

보현 역시 신체 계열 능력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꿋꿋이 저 팔찌를 차고 있던 것을 떠올리면 심경이 복잡해졌다. 일반인이 들고 다니기 그렇게 힘든 것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약해진 보현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사실 정밀 검진을 받아야 할 사람은 지호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라도 새로이 열린 균열에서 퀸 패러사이트가 발견될 수 있고, 그의 호위자인 준우 역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여태까지 다른 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쪽에는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리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쪽에 모종의 변화가 있는 모양인지 준우가 직접 움직여 여왕의 호위대들을 사냥했다. 지호는 여왕 휘하에 있는 괴물들 간에 알력이 있을 수 있겠다고 짐작했다. 준우가 말하기를 퀸 패러사이트의 몸이 균열에서 버티기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괴물과 근간이 같은 각성자들 역시 균열에 오래 드나들다 보면 몸이 쇠약해진다. 하물며 거기에 사는 것들 같은 경우엔 더 심할 터였다.

퀸 패러사이트가 발견된 시기가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다.

“지호 씨 카드 쓴다는 거 농담이었어요. 우리가 낼게…….”

지윤이 지호의 심각한 표정을 오해했는지 슬그머니 카드를 돌려주었다. 그제야 계산대 부근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호는 당황했다.

“아니, 아녜요. 딴생각 좀 했어요. 보현 언니도 이걸 쓰고 있거든요. 언니가 몸이 많이 약해졌단 생각이 들어서 좀 감상적이게 됐네요.”

“진짜로 우리가 사려고 알아서들 고른 거라…….”

“아니,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라고 배웠는데! 이거 말고 또 필요한 건 없어요? 오늘만 날이니까 빨리빨리들 갖고 와요. 아까 보니까 저쪽에 일회용 응급 치료기도 있더라고요.”

그건 지윤이 고른 배터리와 원리가 다르지 않은 마정석 공급기였으나 사람들 눈에는 마치 그럴싸한 기술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각성자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문구가 있는데도 다들 의심하는 기색이 없다. 진실을 알고 있는 지호 눈에만 너무 많은 것들의 본래 용도가 보였다.

그러나 지호는 일부러 과장된 태도로 이런 것들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제일 많이 나간다는 소모품 진열장 앞에서 외쳤다.

“다들 필요하단 거 더 안 골랐으니까 제가 그냥 알아서 고를 거예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셋으로 나눠서 포장해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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