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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89화 (190/260)

189화

“무지막지해 보이는 괴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자 기기들을 갖고 있지만 않으면 공격당할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네요. 혹시 균열에 휘말렸을 때 이놈을 만나게 되면 다들 이지호 헌터님이 해 준 조언을 떠올리고 실행하는 거 잊지 마세요. 그럼 구조 요청은 어떻게 보내냐고요? 아날로그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네요. 기억하시죠? 생존자 표식 매듭법.”

다은은 지호가 설명을 위해 흔들었던 벽에서 길쭉한 부분을 뽑아내더니 찬찬히 설명하며 매듭을 지어 보였다. 짠, 하고 내미는 것은 익숙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떻게 만드는 것이었는지는 낯설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한때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정보 중 하나였던 것이, 이제는 그와 아무 상관 없어 기억에조차 남지 않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 너무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도 언젠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무의미해지는 때가 반드시 오겠지.

지호는 이쪽으로 매듭을 흔들어 보이는 다은에게 웃어 주었다. 설명할 다른 괴물이 여럿 있기도 했고, 여러 헌터들이 관찰하고 경험한 새 기상 현상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구슬 안에 흰 연기가 들어 있고 거기에 닿으면 정신 착란 증상과 비슷한 현상을 겪는다는 말에 다은은 질겁했다.

“아니, 그럼 정신계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은 다 마비당한 상태로 서 있거나 쓰러져요? 그럼 정신계 능력 있는 괴물들이 막 뷔페처럼 골라 먹겠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서 이런 비가 내리는 지역에 고립된다면 꼭 실내로 피하거나 어디론가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안 되면 차 아래라도 기어 들어가든가요.”

지호가 맨 처음 괴물에게서 몸을 숨긴 곳도 차 아래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공포는 잊히고 당시의 기억만 남았다.

다른 헌터들과 협동 훈련을 할 수 있었다면 오디세이 팀이 만족할 만한 영상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헌터들의 훈련 영상은 누출된다 해도 어디에 해로울 만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헌터들은 각 센터 고유의 훈련 방식을 공개하고 서로 익힐 것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니 오디세이 팀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이지호 헌터라는 유명 헌터가 해당 훈련에 참여하여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는지를 찍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합동 훈련은 없었다. 지호는 굳이 센터에 와서 얻지 않아도 될 정보를 얻고 전투복의 기능을 점검받은 후에 다시 귀가하겠다고 선언했다. 후자는 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전투복 개발자에 가까운 서명은 장인이 직접 확인한 장비였으니.

오디세이 팀은 당황했다. 뭔가를 더 찍을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한 탓이었을 것이다. 함께 온 촬영 팀 중에 유일하게 헌터인 신다은만이 기묘한 낌새를 알아챘다.

“오늘은 합동 훈련 없는 날인가 봐요. 균열이 이제 막 닫혔으니 다들 쉴 때긴 하죠.”

“맞아요. 우린 휴식에 너무 인색한 사람들이죠. 조금이라도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매일같이 훈련을 빼먹지 않잖아요.”

“아침에 따로 훈련하고 오신 분이 하는 말이라 더 신뢰성이 있는데요?”

지호는 웃었다. 다은이 별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촬영 팀은 어어 하는 사이 금방 센터를 나오게 됐다. 오래간만에 실험도 재개된 탓에 센터 내부에 헌터 수 자체가 적었다.

“자, 그럼 어쩌죠? 딱히 찍어서 보여 줄 만한 게 없는데.”

“평소에 하시는 거 하면 되죠.”

“음, 평소엔 보통 훈련을 하거든요.”

이 훈련 중독자 같으니. 다은은 혀를 내두르며 고민했다. 그때 지호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지는 뜻밖에도 다른 지역의 협회 센터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고지 없는 지역이었던 탓이었다. 수상한 곳은 아니었기에 지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이지호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강준영이라고…….

“어, 그럼요. 몸은 좀 괜찮아요?”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임시로 손예린 헌터님이 보호자를 맡아 주셨는데 사실, 저. 제가 요청하면 바꿀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준영은 그 균열에서 그들이 어떻게 지호를 저버리고 떠났는지 목격했다. 헌터들 중에서도 손예린 팀을 불편해하는 자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과 비슷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을 것은 당연했다. 지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드러났다.

“음, 제가 보호자를요? 저를 믿음직하게 여겨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아쉽게도 제가 아직 경제적 기반이 잘 갖추어진 헌터는 아니라서요. 제 소유의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아니, 헌터님이랑 같이 살고 싶다는 그런 불손한 의미가 아니었어요. 진짜 아니에요. 저희 삼촌도 아직 살아 계시고 얼마든지 와도 된다고 하셔서……. 그런 게 아니라, 임보현 헌터처럼 저한테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고 선배 헌터로서 도움 주실 멘토가 되어 주셨으면 해서요.

부모님은 돌아가신 모양이다. 그의 사정이 어떠한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번 균열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균열에서 사고가 있었을 수도 있으며, 처음부터 양친이 모두 살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흔히 생각하는 정상 가정이라는 폭력적인 틀 안에 타인을 맞추고 싶지 않았던 지호는 머리를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저랑은 물리적인 거리도 멀고 좀 힘들지 않을까요? 제가 일산까지 올라가고 하기는 좀 오래 걸리는데.”

-가끔만 만나 뵐 수만 있어도 괜찮아요.

준영의 목소리에 묘한 얼룩이 있었다. 지호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대화를 듣고 있는 오디세이 팀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촬영 중이었다. 지호는 잠시 준영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한 뒤 통화를 마쳤다.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침해하셔도 되는 걸까요?”

“듣고 싶어서 들었다기보다는 들려주셔서……. 그나저나 보호자가 되어 주십사 요청받으신 모양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이지호 헌터도 4세대 헌터인 거 아니었어요?”

“이번 균열에서 구조한 새 각성자가 있어요. 아직 병원에 있을 텐데, 그 친구가 구조자로 등록된 헌터랑 마음이 안 맞는 모양이에요.”

다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잠깐 찾아보겠다며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한 다은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확인한 이름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사회의 신뢰 자본을 갉아먹은 사람이긴 하네요. 제 생각엔 지호 씨가 맡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가 뭘 가르친다고요.”

“아니 뭐, 가르치고 알려 주는 거야 실질적으로는 센터에 담당자가 다 있잖아요. 이지호 헌터 역시 모든 걸 임보현 헌터에게 배운 건 아닐 테고요.”

지호의 감지계 관련 스승은 차나연 헌터이며 신체 계열 훈련 및 격투 스승은 이주리 헌터이고 이형 에너지를 다루어 복합적으로 전투하는 방식은 박순자 헌터에게 배웠다. 그 밖에도 몇 헌터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의 선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호는 고심했다. 다은의 말이 영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음, 하지만 저는 임보현 헌터님께 여러 가지로 의존하고 있는걸요. 거처도 제공해 주시고…….”

“그거 말인데, 이지호 헌터님도 정식 헌터가 되셨으니 임대 아파트 거주 자격 되실걸요? 물론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걱정이야 되겠지만, 조건만으로는 충분하다는 의미예요.”

“제가 뭐라고 누구를 보호하고…….”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임보현 헌터처럼 실거주지를 제공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책임지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고요. 그래서 유난스러웠던 거고, 그래서 여기저기 회자된 건데요. 보통은 뭐, 과외 선생이나 같은 과 선배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텐데.”

다은은 지호가 알지 못하는 여러 관계의 헌터들을 거론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라는 친숙해 보이는 사이로 묶이는 각성자들 중 헌터가 된 자들의 수는 적고, 또 헌터가 되어도 오래 그 일을 지속하는 자들의 수는 더 적다.

다은이 언급하는 이름들 중 지호에게 낯익은 건 하나도 없었다. 지호는 그저 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지호에게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는 생각보다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다. 그가 가족을 잃었고 의지할 곳이 보현 한 사람뿐인 상황에 놓였기 때문일까? 운 좋게도 지호와 달리 준영에게는 남은 피붙이가 있었다.

“그럼 보통은 뭘 하죠?”

“뭐, 여러 상황에서 조언자가 되어 주는 편이죠. 구조자가 자신을 거부하는 상황이 손 헌터 측에도 썩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이지호 헌터가 빨리 결단을 내려 줘야 그쪽에서도 뭔가를 결정하지 않겠어요? 이번 균열에서 구조된 거면 병원에서 검진받고, 크게 다친 곳 없으면 오늘 안으로 바로 퇴원할 수도 있을 텐데.”

“어, 그래요? 저는 며칠 걸렸는데.”

“아마 어디 다쳤었던 모양이에요. 균열에서 다친 상처는 오래가잖아요.”

지호가 썩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도 다은이 태연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돌려주었기에 지호는 천천히 생각을 고쳤다. 사실 지호는 준영을 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가 각성자가 된 셈이니까.

또래의 남자아이가 보내는 열렬한 애정도, 존경하다 못해 경외해 버리는 후배 각성자로서의 맹목적인 태도도 모두 부담스럽다. 더욱이 이런 식으로 그를 지목해 연관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니 한층 더 복잡했다.

본래 같았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균열에서뿐 아니라 그곳을 나와서도, 그리고 이제는 지호 삶의 일부분이 된 헌터들 사이에서도 그는 온통 거부만 당해 왔다. 파트너 하나 없이 임무 때마다 임시 파트너를 배정받았던 세월들이 머리를 스쳤다.

필요에 의해 다가온 오디세이 팀은 예외로 둔다. 어차피 지호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니까. 너무 많은 거절은 지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필요로 하며, 근래에 만난 이들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지호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을 그는 쉽게 내치기 어려웠다. 고심하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다은 헌터님 말이 맞아요. 별것 아닌 조언자의 위치 정도라면 저도 할 수 있겠죠. 더욱이 함께 있는 사람이 불편하다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주면 제가 선배 헌터가 아니겠죠?”

다은은 지호가 바라는 것이 대답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누군가의 동의가 필요한 얼굴. 어떤 때는 분명 노련한 헌터 같은 인상이지만, 이럴 때의 지호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신다은 헌터는 빙긋 웃었다.

“그 각성자도 지호 씨 연락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 촬영 말인데, 좀 피곤해 보이셔서 나중에 다시 이어서 해도 될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만 찍어 가도 다들 좋아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콘텐츠 창출이 필요한 방송인걸요. 뭔가 재밌을 만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 줘요. 물론 촬영해도 괜찮은 거로요. 오늘 조언 값으로 그 정돈 괜찮죠?”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오디세이 팀이 아니라 신다은 헌터 개인 연락처를 받은 지호는 일 있을 때 연락하겠다고 이야기했고, 지호가 떠난 뒤 신다은 헌터는 점잖은 척하던 태도를 집어치우고 기뻐 폴짝폴짝 뛰며 촬영 팀에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야, 누가 계는 머글이 탄다고 했냐! 봤어? 나한테 연락처 주는 거? 봤어? 어? 나한테 이지호 헌터 연락처 있다!”

오디세이 팀은 한참 호들갑 떠는 다은의 영상을 촬영해 이지호 헌터 편 예고로 쓰기로 했다. 물론 다은의 의사는 그다지 반영되지 않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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