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87화 (188/260)

187화

지호가 보현에게 촬영 사실을 뒤늦게 알리며 씻으러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지호는 절대 그 영상을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호는 마른세수하며 한숨 쉬었다.

“원래 이렇게 각본 없이 진행되나요?”

“그게 날것 그대로라 이 기획은 그렇게 가요. 머리에 새집 짓고 나오시는 분들도 꽤 되거든요. 저희가 없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운동하셔도 돼요.”

가볍게 몸을 풀 필요는 있었다. 지호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가뿐한 몇 가지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그에게만 가뿐한 단계였다는 사실은 이지호 헌터의 팬들에게 필수 시청 영상으로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겠지만.

오디세이 팀은 이지호 헌터의 운동 영상만으로도 꽤 분량이 나올 거라며 좋아했다. 지호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좋아할 만한 일인지, 이 정도면 평범한 헌터들이 하는 훈련이 아닌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호의 정신은 맑았다. 그는 붕대로 둘둘 감아 부상자처럼 보이는 오른손을 바닥에 댔다가 다친 척해야 하는구나, 싶어 왼손만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이주리 헌터에게 배운 신체 계열 헌터 훈련 과정 중 하나였다.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훈련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지호가 훈련에 잘 임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엄격한 눈이 아니라는 건 좀 어색했다. 지호는 머뭇거리다가 폴짝 뛰어 바른 자세로 선 다음 다은에게 질문했다.

“어, 같이 하실래요? 훈련…….”

“저, 저는 신체 계열이 아니라서 그런 건 못하겠는데요. 하하하.”

다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지호도 이렇게 튼튼해지지 않았다면 온갖 운동으로 단단한 신체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훈련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몸을 거꾸로 돌린 채 팔굽혀펴기하는 헌터의 옷이 흘러내려 잘 잡힌 등 근육이 화면에 잡힌다. 촬영 팀은 숨죽인 채 거기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을 잡아냈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훈련은 다은을 질리게 했다. 진짜 한마디 말도 없고, 보여 주려고 하는 게 아닌 탓에 그럴싸한 모양만 잡고 다음으로 넘어가자며 편집을 요하는 손짓도 없다. 투박하게 운동을 마친 지호는 목에 걸고 나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좀 씻고 나올게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저희가 밥상 구경 좀 해도 되나요?”

“제가 있는 데가 저만 쓰는 집은 아니다 보니까……. 음, 오늘은 나가서 먹을까요? 어차피 협회에도 들러야 해서. 얼른 다녀올게요.”

지호의 말을 전해 들은 오디세이 팀은 욕실까지 따라가겠다는 무례한 말을 던지지는 않았으나 그러고 싶다는 욕망 담긴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혼자 조용히 운동만 했다고 생각한 지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남녀를 막론하고 잘 다듬어진 탄탄한 육체는 평범한 이들의 경외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신체 계열보다는 이형 에너지와 염동력계 능력자로 이루어진 오디세이 팀원들은 이지호 헌터가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시끄럽게 떠들었다.

“와, 봤어요? 소문으론 들었는데 그 팔 진짜 괴물 손 같드라. 위험해 보이진 않던데.”

“신체 괴변이 현상 겪는 헌터가 흔한 건 아니어도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신다은 헌터도 전에 같이 일한 적 있을걸요?”

다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그 일을 겪을 당시는 2세대 헌터들이 막 탄생할 시기였다. 그때 각성했던 많은 이들과 달리 다은은 이형 에너지 계열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되살아났으나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정신계 괴물이 살아남았던 자들에게 했던 온갖 짓거리들에 신물이 난 나머지 정신계 능력을 다루는 헌터들에게까지 묘한 거부감을 느끼는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변했던 사람은 오래 못 버티고 죽었다고요. 균열 안에 오래 있을 때는 그렇게 변하는 현상도 빨라지는 것 같던데요.”

“이지호 헌터가 알고 있을까요?”

“몰랐어도 이제는 알아야겠죠? 방송 촬영하면서 슬쩍 운 띄워 보면……. 아니다. 저 손은 못 내보내죠, 참.”

촬영 팀이 멋쩍게 웃었다. 협회에 들러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하고 추측하며 방송 분량을 어떻게 뽑을지 고민하는 때였다. 지호가 한참 운동했던 자리 근처의 공기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그 자리의 유일한 감지계 능력자인 다은만이 이상 현상을 눈치챘다.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느낌에 그는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없다. 이상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뒷덜미가 싸했다.

“왜 그래요?”

“아니, 기분이 좀…….”

“컨디션 안 좋은 거라니까. 어젯밤에 이지호 헌터가 촬영 수락하자마자 회의 들어가서 밤새고 온 거잖아. 잠깐이라도 눈 붙일래요?”

“아니, 괜찮아요. 그냥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지호는 씻는 데 오랜 시간을 쓰지도 않았다. 덜 마른 머리를 늘어뜨려 어깨 부근이 살짝 젖어 보였고, 머리 묶지 않은 얼굴은 평소보다 좀 더 앳되고 순해 보였다. 협회로 나가는 거라 습관처럼 전투복 차림으로 무장을 마친 지호는 아까 묶었던 붕대는 풀었다며 머뭇거렸다.

“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요? 가리면 될 것 같은데. 이게 촬영의 일관성을 위해 필요한 거면…….”

“아녜요. 며칠 걸려서 찍었다고 하면 되지. 괜찮아요!”

전투복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신다은 헌터는 생긋 웃으며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손사래 쳤다.

부천 센터에 갈 거라며 말을 꺼낸 지호는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혹시 제 손이 이렇게 되어서 저를 촬영하러 오셨던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갑자기 이 시기에 저한테 오셨다는 건 이거 외에는 의심할 게 별로 없어서…….”

“아녜요. 저희 영상 덧글에 다음 게스트로 이지호 헌터를 불러 달라는 요청이 되게 많았거든요. 괴변이 현상에 휘말린 건 공교로운 일이지만, 저희도 방송 윤리를 지켜서 그 손에 관한 건 촬영하지 않을 거고, 영상에 혹시 찍혀도 잘 편집할게요. 걱정 마요.”

다은이 윙크하며 시원시원하게 웃자 지호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듯 마주 웃었다. 다른 것보다는 모양이 기괴한 손이 영상을 탄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는 얼굴이었다.

“찍기 싫으면 거절하셔도 괜찮았는데요.”

“아녜요. 사람들에게 일상을 돌려주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조금만 방심해도 균열이 터지고 사람이 죽는다. 예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죽음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았다. 모든 사람이 환자이고, 정신병 앓지 않는 사람이 없다. 확고하게 정해진 데드라인이 없다뿐이지, 문명은 느리고도 확실하게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힘들고 좌절스러운 시기를 살아가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죠. 당장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잖아요.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고, 각성자들도 그렇지요.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박탈감을 느낄지도 몰라요. 이렇게 변해 버린 세상에서 나는 자칫 삐끗하면 그냥 죽을 수 있는데 어떤 놈들은 운 좋게 힘도 얻고 돈도 얻고 팔자 좋게 살아가고 있다고 불평할 수도 있고.”

그것은 지호가 어릴 적 지내 온 동네에서 미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타인에게 열등감을 느낀 자들은 사방을 공격했다. 하다못해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공격에는 처절한 슬픔이 있었다. 지호는 더 많은 사람이 그런 삶에 매몰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집 안을 촬영하지 않으셨으면 했던 건 굳이 보여 줄 필요 없는 것들이라 그랬던 거예요. 아무튼, 빈부 격차나 삶의 질이 차이 난다는 것 정도나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요.”

다은은 뜻밖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오랫동안 생각한 사람처럼 말하는 지호에겐 더더욱 신기하단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기 감상을 솔직히 이야기했고, 지호는 웃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배웠어요. 누구에게든 배울 점은 있는 법이잖아요.”

지호는 당시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는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다은은 이지호 헌터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했으나 지금 역시 그에게는 충분히 어린 시절에 속하리란 생각에 그 질문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무튼, 이지호 헌터는 아직 십 대다. 얼굴만 어린 헌터들과 달리 진짜 어린애란 뜻이었다.

“부천 센터에 가면 뭘 하세요?”

“그때그때 다르죠. 일반적으로는 여러 헌터들과 협동 훈련을 하고요. 드물게 실험 대상이 될 때도, 어, 위험한 게 아니고 특정 포메이션에서 괴물을 상대할 때 같은 거요. 전에는 위험해 보이는 실험도 종종 있었는데 요새는 그럴 인력도 여유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장 균열에서 괴물들이 뛰쳐나오려는 판국이니 다른 쪽으로 눈이 돌아갈 턱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출근은 어떻게 하느냐는 다은의 다음 질문에 지호는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며 바닥에서 삼십 센티 정도 떠올랐다.

“차 막히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날 줄 아시죠?”

오디세이 팀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평균적인 능력치를 보유한 각성자와 헌터로 이루어진 팀이었고, 이지호 헌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건 어려웠다. 덕분에 그들과 동행한 비행은 아주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지호는 붉어진 얼굴을 부채질하며 속삭였다.

“아니 그, 참 쉽죠? 같은 소리를 한 게 아니고요.”

“완전 있는 자들만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요! 이동 능력자가 아니셔서 다행이에요. 먼저 번쩍 떠나신 다음에 왜 아직도 안 오세요? 하고 전화하실 수도 있었던 거 아녜요.”

“아니, 그 정도는…….”

지호는 변명하기를 포기했다. 부천 센터에서 지호와 만나기로 했던 박 팀장은 갑작스러운 동행자들의 모습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디세이 팀이 어쩐 일. 아하, 이지호 헌터가 이번 게스트예요?”

“박찬민 헌터님 안녕하세요. 여러분, 보이세요? 저희 촬영 요청에 꾸준히 거절하시는 몸값 높은 분이시지요. 2세대 헌터들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내는 이동 능력자 중 한 사람이에요.”

“제 소개 시간입니까? 촬영 중에 미안합니다만, 이지호 헌터 좀 빌려 가야겠어요. 기밀이라 동행은 허락 못 하겠네요.”

“어, 오래 걸리나요?”

“어느 정도는요.”

오래 걸릴 일이 대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지호는 얼떨결에 회의실로 동행해 들어와 착석했다. 박 팀장은 옆에 놓인 노트북을 조작해 프로젝터로 벽면에 사진 몇 장을 띄웠다.

“김 반장님한테 연락받고 저한테 오신 거죠? 지금 수사받느라 나올 순 없다셔서요.”

“어, 아뇨. 딱히 뭘 받은 건 아니고요. 헌터의 일상을 촬영하신다길래 습관처럼 센터에 온 건데…….”

“마침 잘됐네요. 어제 꼬박 새워 가며 이주원을 탈탈 털었어요. 여왕의 자식이란 것과도 접촉했고요.”

지호는 반색했다. 벌써 그렇게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박 팀장이 띄운 사진은 균열이 열렸던 지역 지도와 그 흔적들이었다.

“여기 어딘지 알겠어요?”

“음, 다른 덴 잘 모르겠고 대구가 있네요.”

“대구를 비롯해 그간 나타났었던 악성 균열들의 자료예요. 악성 균열. 급성 균열이 아니고 악성 균열 말이죠.”

갑작스레 나타나는 급성 균열보다 흉악한 것. 점점 몸집을 불리는 악성 균열의 존재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트렸던 일이 몇 번 있었다. 지호는 여기서 왜 갑자기 악성 균열 이야기가 나오는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박 팀장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주원 각성자가 말하기를, 놈은 균열 안에 있을 때는 그에게 말을 걸거나 타인에게 간섭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균열만 생기거나 그 조짐이 있으면 뻔질나게 거기에 드나들었다고요. 각성 과정이 워낙 험난했던 탓에 괴물만 보면 덜덜 떠는 사람인데도 그런 선택을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시달렸는지는 대충 알겠더군요.”

“설명을 들어서 알게 되신 것보다는 머리를 뒤졌겠죠?”

박 팀장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노트북을 조작해 몇 사진을 확대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알아냈느냐가 아니에요. 또 다른 악성 균열이 곧 열릴 거란 사실을 알아냈다는 게 중요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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