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준우가 저를 살려 놓고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거기엔 이형 에너지 흐름을 되짚어갈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알죠? 정신 계통 능력에 강한 소질을 가진 각성자일수록 감지계 능력이 적거나 없는 수준이라는 거. 저는 타인에게 영향이 미치는 정신계 능력을 차단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정신 계통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헌터예요. 그 말은, 저만의 힘으론 그 기묘한 흔적을 추적할 수 없다는 뜻이었죠.”
“그러고 보니 감지계 헌터 수가 많은 것 같진 않네요.”
“차나연 헌터가 괜히 우대받는 게 아녜요. 그를 비롯해 감지계 능력을 서브로 가진 헌터들이 드물게 있긴 한데, 그 능력만 메인으로 가진 사람은 별로 없죠. 그나마 약간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수준인 사람들도 좀 있고요. 하지만 이동 능력보다 훨씬 다방면으로 쓰이는 힘이라 끊임없이 보조적인 도구들이 개발되고 있는 쪽이기도 하죠.”
지호가 아는 사람 중에도 고작 둘뿐이다. 물론 아는 사이가 아닌 헌터들 중에서야 좀 더 꼽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다른 계열에 비해 수가 적기는 했다.
“감지계 능력자들이 언니 요구를 거절했나요?”
“처음에는 돕겠다고 했었어요. 우리 수가 적으니까 서로서로들 도우며 살아야죠. 새 팀 꾸려서 곧바로 추적 들어갔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내려온 지시로 수색이며 임시 팀 편성이며 다 중단됐어요. 준우를 살리러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는 균열로 다시 들어가는 건 인력 낭비라는 답이 돌아왔고요.”
너무 차가운 단어였다. 지호는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심했고, 보현은 그 의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협회에서 보기에 막강한 공격력을 가진 쪽은 저였어요. 준우는 저를 보조하는 신체 계열 능력자 중 하나일 뿐이었고요. 거기 얼마나 위험한 새 괴물이 있을지 모르는데, 정예 팀 하나 잃고도 정신 못 차리는 거냐고. 당장 나와서 회복에 전념하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균열로 들어가려고 했죠.”
“헌터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더니.”
“그러게요. 사실 제 몸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아마 준우가 자기 소질도 아닌 치유계 능력으로 목숨만 붙여 놓은 수준이었을 텐데 무리했던 거죠. 균열에서 다친 상처라 잘 안 낫는 것도 있었을 테지만요.”
보현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이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먼 곳. 어쩌면 홀로 과거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끄러미 한 곳에 시선을 두었던 그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감지계 능력이 없다고 해도 편법으로 이형 에너지를 추적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아무도 저를 돕겠다고 나서지도 않고, 또 저를 돕지 말라는 명령까지 떨어지고 나자 저는 그때 개발되어 있던 장비란 장비는 다 챙겨 가지고 균열로 들어가려고 했죠. 하지만 역으로 그 장비가 문제가 됐어요. 아무래도 고가에다 귀한 물건들이다 보니까 추적 장치 같은 것이 없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선경 이모는 덕팔 아저씨가 만든 감지 계통 추적 장치를 회수하러 왔을 때 저한테 그랬어요. 어, 두 사람 알죠? 각성자 연합의…….”
지호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보현은 지호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선글라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거요. 덕팔 아저씨가 만들었던 당시 시제품은 안경보다는 바이크 고글에 가까운 물건이었거든요. 엄청 무겁고 오래 쓰고 있으면 목이 부러질 것 같았어요. 신체 계열 능력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인데 무리해서 가지고 나오다가 걸렸죠. 그거까지 뺏기고 나니까 진짜로 편법을 써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이형 에너지끼리는 충돌하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힘으로 다른 에너지를 밀어 내면서 방향을 잡는 방식이죠. 제 체력도 엄청 소모되고 무엇보다 그 에너지가 준우와 관련된 에너지가 맞는지 알 수도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해요.”
“그거 단점이 아니고 그냥 다른 에너지일 수 있는 거 아녜요? 특히 균열이면…….”
“하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보현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지호의 주머니에 꽂힌 선글라스를 쏙 뽑아 갔다. 그걸 걸치자 평범한 추리닝을 입었는데도 멀쩡하고 멋진 헌터처럼 보였다. 지호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그냥 보현이 헌터 체질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제 능력으론 준우를 추적할 수가 없었어요. 녀석을 비롯한 팀원들을 해친 놈의 꼬리도 잡기 어려웠고요. 코드 레드 원이 몇 군데에서 더 관측되고 이름이 부여되면서 위험 개체로 분류되기까지 저는 계속 제 팀원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을 거예요. 이게 아마 실종자 가족들의 심리겠죠. 사실은 그래서 지호 씨가 말하는 그들의 간절함이 뭔지도 이해해요.”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자의 공허한 울림이 지호를 슬프게 했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볼 수 없어도 보현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보현은 이제 텅 빈 과자 비닐을 탈탈 털고는 남은 쓰레기를 차곡차곡 접었다.
“결과는 지금 지호 씨가 아는 대로예요. 저는 그들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고, 끝끝내 그 수색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협회와 결별했죠. 저에게 있어 헌터란 고작 그런 것이 되었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는데 내가 또 무얼 지키겠어요. 그런 핑계로 현장에서도 도망쳤어요. 그게 지금 지호 씨가 알게 된 저예요.”
보현은 잘 접은 쓰레기를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쓰레기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으나 보현의 염동력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튕겨 나갔던 방향에 부딪친 것처럼 되돌아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비닐 공에서 눈을 돌린 보현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는 실종자 가족들의 기분이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녜요. 오히려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의 절망과 슬픔도 잘 이해하고 있고요.”
“절망과 슬픔요.”
“사실은 모두 시체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렇겠죠. 괴물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라졌을 때가 훨씬 나았으리란 생각을 하게 될 텐데요.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보수적이에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균열이 터지며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는 이런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사회이기에 더 그렇죠. 그렇게 변한 자들이 돌아오면 그들은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될 거예요. 외면하고 배척하기만 하면 다행이게요.”
아마도 오랫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보현은 그들의 삶과 결부되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결과들을 하나하나 읊어 주었다. 지호는 단편적으로 실종자들이 괴물이 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던 가족은 기뻐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했다.
“알아요. 사실은 협회 높은 분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길 하고 왔어요. 다들 제 의견을 긍정적으로까진 생각할 수 없다곤 했는데, 대신 다른 대안이 나왔어요. 누군가에겐 마음에 차는 결론이 아니겠지만, 저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지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균열 저편에 조성될 도시에 관해 언급했다. 보현은 지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지호의 물건을 도로 돌려준 보현은 철봉에서 일어났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네요. 협회에서 나왔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문을 계속 열어 둘 때의 치명적인 단점도 극복할 수 있고요.”
“하지만 그 열린 문으로 괴물이 된 실종자가 몰래 넘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그곳을 밤낮없이 지킬 인원이 필요하겠는데요. 만약의 경우 상황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어야 할 테고. 그리고 게이트가 닫혔다가 열려도 다시 그 자리에 고정된다는 전제하에 일을 진행해야겠죠.”
그런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일들은 지호보다 좀 더 똑똑한 사람들이 맡아 생각해 줄 것이다. 보현은 이제 집에 가자며 손짓했다.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귀가한 지호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도우미 이모님의 타박 아닌 타박을 받았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준비된 카드만 우르르 꺼내 탁자 앞에 늘어놓으며 무서운 표정을 짓는데, 눈을 굴리며 회피할 방법을 알아보려다 그대로 붙잡혀 한참 잔소리 카드를 읽었다.
쉬는 날도 얼마 없이 매번 센터에서 밤새고 먹고 자고 일하며 뛰어다니니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문제라고 보현의 이름 등장한 카드까지 나오자 보현은 슬슬 씻고 오겠다며 혼자 쏙 도망쳐 버렸다.
이런 잔소리와 걱정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싫지 않아, 지호는 얌전히 앉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집에 꼬박꼬박 들어오겠다고. 밤새며 훈련하고 며칠을 외박하며 무리하고 다치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다음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준비된 저녁상 앞에 모인 둘은 아까 과자 몇 개 주워 먹은 탓에 잘 들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웃었다.
“이모님은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같이 계셨던 분이신데 가끔 엄마 같아요. 참, 제 가족 이야기 잘 안 했었죠. 두 분 다 해외에 계시다 균열에 휘말리셔서 지금은 안 계세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까 절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곤 옛 파트너나 우리 이모님 정도 남았네요.”
“그러네요. 엄마 같네.”
그리운 단어였다. 지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밥과 반찬을 입안에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보현은 싱긋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고기 반찬류를 지호 앞으로 밀어 주었다.
“밥 같이 먹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쵸? 저도 바빴고 지호 씨도 바빴고 우리 일도 좀 그렇고. 아, 김동주 반장이 저한테 한 소리 하던데요.”
“김 반장님이 왜요?”
“임시 헌터일 때야 보호자 필요하고 그런 건데, 지호 씨 정도 되면 이제 협회 통해서 새집 분양 신청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뭐 그쪽 팀 통해서 알아봐 줄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 아저씨 어떻게 구워삶았어요? 나랑은 별로 안 친한데.”
“저도 뭐, 친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이용당하고 그러다 그럭저럭 죄책감 생기는 관계?”
보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특수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을 보니 김 반장은 현시대의 영웅을 더러운 뒷일에서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남은 밥을 비웠다.
“독립하고 싶으면 언제든 그쪽 알아봐요. 나야 적적하지 않고 좋긴 한데, 또 지호 씨도 이제 정식 헌터고. 그쪽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까요.”
“이제 나가라고 돌려 말하시는 건…….”
“아니거든요? 지호 씨 맨날 헌터 전투복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밖에 못 봐서 내가 옷장 다 바꿔 줘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러기 전에는 못 나가요. 내 심즈 인생에 칙칙한 운동복만 고집하는 심은 없었다고요!”
지호는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보현은 십 년이 뭐냐, 이십 년은 더 전에 했던 심즈란 게임이 있는데 하며 열변을 토했다. 확실히 지호가 생각하기에도 보현과 그의 옷장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하고 무작정 훈련에만 매진하던 지호는 보현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훨씬 나아져서 한참 웃었다. 그래도 괜찮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