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21. 파편들
유명인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들의 거주지나 직장 근처를 배회하는 팬들이 문젯거리가 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호가 머무는 보현의 아파트는 그를 제외하고도 많은 각성자와 헌터가 사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시선이 가끔 따라붙는다 한들 거기에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거주민들만 들어갈 수 있게 통제하는 입구 옆은 유독 낯선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오늘따라 지호 쪽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리는 자들이 많았다. 지호는 일부러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거기 모인 사람 중에 목에 둥근 목걸이 건 자들이 여럿 있었다.
전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헌터의 예리한 감이 그를 붙들었다. 샛별이에게 받은 물건이다.
그러고 보니 인사 한 번 못 하고 허겁지겁 떠나보냈는데 아이가 많이 놀라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물론 거기 앉아서 괴상한 정신 계통 능력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조금 놀라거나 무서워하며 자리를 피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지호는 딴생각하며 한 사람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가 지호가 쳐다보는 사람을 돌아본 탓에 사방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눈길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황급히 가방을 열어 태블릿 pc와 네임펜을 꺼냈다.
“저, 사, 사인 좀 해 주세요!”
지호는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꽤 고가의 물건 같은데 여기 펜으로 낙서해도 된단 말인가. 지호는 고심했으나 연신 괜찮다고 말하는 태블릿 주인 때문에 결국 손을 슥슥 움직여 기계적으로 사인을 남겼다. 목적을 가진 서류에 서명할 때 말고 남에게 주기 위한 용도로만 사인하는 건 또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사인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 빵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빨개졌다. 그는 사인을 받고 눈을 굴리며 고민하더니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뭐 달라고요?”
“아니 그, 아, 악수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호는 선뜻 그의 손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오른손이었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뒤 왼손을 내민 지호는 빙긋 웃었다.
“오른손이 좀 불편해서요.”
방금 오른손으로 멀쩡히 사인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한 명과 악수를 해 주자 다른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내밀어 지호는 엉겁결에 거기서 악수회를 열었다.
한참 손을 흔들고 나자 누군가 마실 것도 주고 간식도 안겨 주었다. 당황한 지호에게 헌터 협회 마크 박힌 큼직한 종이 가방까지 내밀어지니 여기가 아파트 현관인지 이지호 헌터 팬미팅 장소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혹시 여기서 절 기다리신 건 아니죠?”
자의식 과잉인 질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토록 준비된 자세들을 보자 묻지 않을 수 없어 지호는 결국 질문을 던졌다.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어이가 없어졌다.
“제가 언제 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려요?”
“그, 이지호 헌터님 목격 제보 올라오는 sns도 있고요…….”
지호의 팬을 자처한 첫 사인 보유자가 행복하게 웃으며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지호는 여러 각도로 올라오는 자기 사진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유명인이 된다는 건 타인이 자기 엽사를 마음껏 찍어 소유하고 배포해도 그것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지호의 떨떠름한 시선이 잘 못 나온 사진에 멈추어 있자 팬들이 얼른 소리쳤다.
“언니 귀여워요!”
“사진보다 훨씬 나아요.”
“멋있어요!”
“언니 보려고 자주 왔는데 오늘 계 탔어요!”
누가 봐도 지호가 언니라고 불릴 나이는 아닐 것 같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호를 언니라고 칭했다. 헌터님, 헌터님 하던 예의 바른 칭호보다는 훨씬 격 없는 태도라 차라리 나았다. 지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칭찬에 당황하면서도 감사를 잊지 않는 예의 바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거기 모인 팬들이 sns에 미덕을 퍼트리는 일에 일조했다.
심지어 지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통행에 방해된다며 모이는 시간을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돌아가면서 나와 있는 거라고. 지호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했다. 답은 순순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저를 구해 주셨거든요. 이지호 헌터님이.”
“제가요?”
“왜 부평 균열에서 제가 역 근처에 있다가 각성자 연합 건물에 고립되어 있었는데요…….”
지호는 그가 장인들과 함께 구조된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짧게 감탄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에 상대는 방긋 웃었다. 덕분이라는 말이 간지러웠다.
그 밖에도 지호가 구해 준 사람, 혹은 지호가 구해 준 사람의 지인이라 그의 팬이 된 사람들 등등. 모인 사람들 모두가 지호 덕분에 삶을 얻거나 타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지호는 어쩐지 머쓱해졌다.
“그게 제 일인데요. 저만 일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는걸요. 다른 헌터님들도 분명 멋지고 존경할 만하긴 한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요.”
손을 내저은 지호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이 사람들이 이 오른손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싶은 생각이 덜컥 들었던 탓이었다.
그들의 영웅이 자신들을 돌아봐 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느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는 사실에 팬클럽은 당황하며 서둘러 흩어졌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좋아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편으로는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하다. 지호는 여러 사람과 악수를 한 왼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을 꽉 쥐었다.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적절한 인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사소한 감사의 표현들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파트에 들어선 지호는 화들짝 놀랐다. 보현이 거기 삐딱하게 앉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언니, 왜 여기 와 있어요?”
“균열 다녀와서 정밀 검사받고 왔거든요. 사람들 많이 몰려 있는데 보니까 다 지호 씨 팬이더라. 지호 씨 스승님이라고 나한테 간식도 챙겨 주던데.”
보현은 피식 웃으며 작은 쇼핑백을 흔들었다. 스승님이라니 너무 웃기지 않아요? 하는 말에 지호는 자기가 뭐에 동의하는지 모르면서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보현은 창백했다.
본래도 건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이번 사태를 겪고 나서는 더더욱 몸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지호처럼 신체 계열인 사람들은 간단한 검사로 끝나지만 다른 이들은 균열에 다녀온 뒤에는 여러 검사를 받고 상태를 확인받아야 한다고 했다. 보현은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몸은 좀 괜찮아요?”
“그럼요. 언제나 말짱하지. 얼마나 튼튼한데요.”
말과 달리 별로 건강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지호의 얼굴에 걱정이 고스란히 보였는지 보현은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 좀 할까요? 날씨도 선선하니 좋은데.”
아파트 단지엔 잘 조성된 산책로가 있었으나 보기만 했지 제대로 걸어 보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굳이 조깅하러 단지를 돌 일은 없었고, 보현과 함께 돌아다닐 일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각자의 삶으로 바빠 오히려 함께 거주하는 서로에게는 조금 무신경했었다. 워낙 굴곡진 나날들이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요. 지호 씨한테 소식 제대로 안 들어가서 지호 씨가 거기 휘말릴까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이 새끼들 아무리 의견이 안 맞아도 그렇지, 최선을 다해 싸운 동료를 헌신짝처럼 균열에 내버려 두는 게 말이 돼요?”
“보통은 서두로 인사말 좀 나누고 잡담 좀 한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왜 해요?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걸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는데요.”
언제나와 같은 거침없는 발언에 지호는 빙긋 웃었다. 비록 의견이 다르다 해도 보현이었다면 다른 헌터들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다 각성한 사람들이라 좀 앞뒤 없이 행동할 때가 많아요. 더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일수록 좀 그런 경향이 강하죠. 부천 센터 소속으로 이름 올릴 때 그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쪽에는 유독 돌볼 가족 하나 남지 않은 헌터들이 많아서요. 좀 극단적이죠.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다들 제 의견을 부정하고 거부해도 괴물이 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잊어버립시다, 하면 또 그것도 부정하고 거부하게 될 것 같은데요. 그 사람들이 사람일 수 있는 면이 있단 걸, 결국 다들 인지하게 될 거예요.”
“그렇죠. 그런 사람들도 없진 않겠죠. 하지만 그 소수 때문에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일 거예요. 있죠, 지호 씨. 저는 설령 제 옛 파트너가 괴물이 되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 의견을 꺾을 수가 없어요. 제게 소중했던 사람을 다른 방법으로 되찾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선택은 그 녀석부터 거부할 거고요.”
지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준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저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가 살아 있는 걸 알면서도 저 이야기를 한다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현은 준우를 마주 보면서도 저런 말을 하게 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만 해도 균열 앞에서 모진 말과 날 선 태도로 서로를 상처 입혔던 사이라 둘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낫다. 평화로운 분위기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몫했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자면 이 소중한 일상을 지켜 낸 데서 오는 묘한 뿌듯함이 함께 떠올랐다. 놀이터 옆 낮은 철봉에 앉은 보현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지호 팬에게 받은 간식을 꺼내 옆으로 넘겨주었다. 둘은 사탕을 우물거리며 잠시 저녁노을 지는 산책로 풍경을 감상했다.
“제가 헌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엄청 옛날이야기 같네요.”
일 년도 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지호가 아직 임시 헌터일 때의 이야기. 헌터 교육을 받기로 선택하기도 전의 이야기. 보현은 포장된 쿠키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열었다.
“제가 협회에서 뛰쳐나오면서 협회랑 크게 다퉜어요. 보기 좋게 은퇴로 포장해 줘서 그렇지, 사실 그렇게 좋게 끝난 건 아니었죠. 지금 지호 씨가 다른 헌터들이랑 대립하는 것과는 좀 궤가 다르지만, 저도 한때 다른 헌터들과 의견을 달리했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저처럼 괴물로 변한 사람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자고 말하지도 않으셨을 텐데, 왜요?”
“퀸 패러사이트가 코드 레드 원이라는 이름을 받기도 전이죠. 제가 소중한 팀원들을 모두 잃었던 바로 그때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냐며 보현이 과자를 내밀었다. 보현의 이야기로는 밤도 거뜬히 새울 수 있는 지호는 무슨 당연한 소릴 하느냐며 과자를 받아 오물거렸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지 괴로운 얼굴로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응시하던 보현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