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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82화 (183/260)

182화

정각이 되기 무섭게 특정 파장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동 능력자들의 힘이다. 단상 중앙에 나타난 이동 능력자 세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이름 적힌 종이가 담긴 모금함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 앞으로 전달되었고,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는 기뻐하며 앞으로 달려 나왔는데 그 순간부터 설치된 모든 기기가 당첨자를 향해 움직였다. 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상함을 이루 설명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박애리 씨 맞으시지요?”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음성이다. 머리를 깨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 이름 불린 자가 황급히 대답했다.

“네, 네 맞아요. 저희 언니예요.”

“지금부터 박애리 씨를 찾아볼 겁니다. 가끔 반응하지 않는 일도 있으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적어 넣은 이름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 이름이 아니라 균열에 남은 자들의 것이었나 보다.

중앙 조명 하나를 제외하고 주변 조명이 모두 꺼졌다. 사람들이 웅얼웅얼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들어 보면 누군가의 평안, 건강, 행복을 기원하는 상냥한 음성들이다. 그 와중에 앞에 무릎 꿇은 자는 어깨를 떨며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지호는 그 기괴하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장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기에 그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지호가 유일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 금이 가며, 아주 작게 허공이 깨져 나갔다.

지호는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에 자리 근처의 사람들만 지호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일어나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 균열이 생기는 줄 알고 소리치려던 지호는 우뚝 멈추었다. 가운데 있던 이동 능력자가 가면을 벗었는데 거기에 아는 얼굴이 있었던 탓이다.

주원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중첩되며 왕왕 울렸다.

세은이니?

입을 연 순간 들린 것은 주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리를 두드리는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진다. 뭔가 지호의 머리를 쪼개려는 것 같았다. 주원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기 시작한 정체 모를 타인이 연신 중얼거렸다.

괴물들이 돌아다녀. 먹을 것도 거의 다 떨어졌어. 언제쯤 구조대가 오는 거지?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집에 가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음성은 천둥처럼 커졌다가 모기만큼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대충 그곳이 괴롭고 자신이 고통스러우며 어서 구해 달라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지호는 굳은 얼굴로 그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다들 어떤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엔 정말 미세하게 균열이 열려 있었다. 주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저 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지. 그러나 그 매개체는 주원이 맞았다.

지호는 그제야 이주원이 보이던 불안정한 감정 변화나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을 이해했다. 그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었지만, 이 현상은 그보다 본격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주원에게 겹쳐진 무언가가 미소 지었다.

저기에, 나를 방해하는 자가 있구나.

지호를 향해 돌아오는 시선들은 더 이상 평범한 관조의 눈빛이 아니었다. 지호는 명백히 드러난 공격성에 당황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여기서 지호를 위협할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라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으나, 기분이 이상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구냐?”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진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힘이 강해졌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신계 능력이며, 여기에 정신계 능력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간인이 너무 많아 전투를 치러서는 안 된다. 지호는 곧바로 선글라스를 바꿔 꼈다. 그는 몰랐지만 이 초소형 카메라 탑재된 버전은 오디세이 팀이 사용하는 물건이며, 정식 헌터 중에서도 주요 대상들에게 지급된 물건이었다.

지호는 왼쪽 안경테를 두드려 방송 모드를 켰다. 덕팔이 떠난 후 전투복에 달린 도구들 이것저것 만져 보다 알아낸 것 중 하나다. 균열에서 괴물로 변한 생존자들의 기록을 남길 때 쓰려고 했던 거였는데.

“좌표 송신. 이상 현상을 발견하여 중계합니다.”

선글라스 상단에 작게 on표시가 켜졌다. 누가 방송을 보는지, 어느 서버로 송출되는지까지는 알기 어렵다. 중간중간 자리에서 일어나는 각성자들의 기운. 지호는 샛별이와 그의 보호자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나가요. 지금 당장.”

샛별이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애 아빠가 다급한 얼굴로 아이를 달랑 들어 올렸다. 혼란한 와중에 짧게 눈이 마주친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도주했다.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

이들의 간절한 소원을 방해하는 악한 자가 누구냐?

“선악도 구분할 줄 아나? 그쪽에서 인간 좀 먹었나 보네.”

지호는 덤덤히 말을 읊으며 전신을 이형 에너지로 코팅했다. 몸에 밀착되는 형식의 방벽이라 그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무방비 상태인 모양새로 보일 것이다.

뒤쪽으로 급격한 에너지 흐름이 느껴졌다. 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짓했다. 일부러 날 선 에너지 화살이 아니라 구체를 날렸기에, 그 자리에 나타난 이동 능력자는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가면 벗은 자는 주원뿐이다. 나머지 놈들은 어차피 전양련 새끼들이겠지. 지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려는 놈들의 어깨에는 제대로 된 화살을 박아 넣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방에 모여 있던 민간인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서 주었고, 덕분에 지호는 아무의 방해도 없이 단상에 오를 수 있었다.

주원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여왕의 힘은 아니다. 애초에 그 낯익은 섬뜩함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자들이 많을 텐데.

날 선 협박이었다. 놈이 타인의 몸 너머에서 말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애초에 위협적인 괴물은 아닌지 지호는 여전히 놈 앞에서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오히려 지호가 한 걸음 다가가자 주원이 주춤하며 물러선다. 시퍼런 빛 돌던 그의 눈이 잠시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이지호 헌터?”

“기세 좋게 사람 이용해 처먹으려던 태도는 어디 가고 남의 꼭두각시 짓이나 하고 있어요?”

주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시퍼렇게 물든 눈동자가 노기를 띠었다.

너희의 가족을 하나 죽이겠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지호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는 당황했다. 놈은 기세등등하게 주변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 자를 처리해! 그러지 않으면 너희 가족의 목숨은 없다!

주춤거리는 모습들이 처량했다. 지호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어디 처박혀서 남을 통해서만 나불거리고 있으니 그런 소릴 편히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균열에서 빠져나온 힘은 주원에게만 닿아 있었다. 다른 것들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놈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은 주원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주리 헌터가 알면 슬퍼하겠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놈을 잡아. 놈을 죽여!

악바리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두통이 심해진다. 주변 사람들의 눈이 흐려지더니 몇 사람이 좀비처럼 걸어 나왔다. 다른 정신계 능력자가 없어도 놈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여왕의 자식새끼들은 하나같이 정신계 능력자네. 아니면 정신 방벽으로 여왕에게 저항할 수 있는 놈들만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는 걸까?”

놈이 머리를 쩌렁쩌렁 울리며 소리치는 순간 지호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형종의 주먹이 지호를 후려칠 때와 비교하면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은 공격이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개중 일부는 제정신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거나 울기 직전인 얼굴로 달려왔다.

그러나 어떤 손도 지호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개중 각성자인 자들이 방벽을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틈으로 사람들 손이 비집고 들어온다. 정신계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휘둘리는 자들 대부분 정신 방벽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쩐지 유독 감지계 능력자들이 많더라니.

차나연 헌터와 비슷하게 일반인 수준으로 힘없는 각성자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지호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공격하려는 자가 더 다칠 텐데도, 그들은 울며 매달렸다. 누군가 흐느꼈다.

“우리 마지막 희망이에요. 제발 저 사람을 공격하지 말아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밀쳐 낼 수 없었다. 그러면 여럿이 우르르 다치게 될 테니까. 지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붙잡힌 채 가만히 기다렸다. 지호가 붙잡혀 주었으리란 생각은 못 하는지, 주원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간신히 편안해졌다.

방해자를 죽여!

“실수하는 거야, 지금.”

웃음소리 비슷한 파장이 울렸다. 두통이 심해진다. 주변 사람들의 흐느낌조차 사라진다. 모두가 그 수상쩍은 이형 에너지에 지배당하는 순간, 지호는 두통을 딛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오른쪽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주원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정적 동요가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의 것 아닌 손 위로 푸르스름한 이형 에너지가 덧씌워진다. 상대를 해치는 힘이었다.

“이주원 각성자에게만 제대로 영향을 끼칠 수 있나 보지?”

놈은 날카로운 공격성을 발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두통은 심해졌으나 일전 특수반 사람들의 정신계 트랩에서도 버텨 낼 만큼 견고해진 정신 방벽이 지호를 지켰다. 재차 접근하는 자들을 밀어 내며 이형 에너지로 이루어진 불투명한 방벽이 풍선처럼 커졌다. 모두 비명을 지르며 밀려났으나 한 사람은 저항감 없이 방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새파란 빛 사라진 눈으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주원은 지호 앞에 다급히 무릎 꿇었다. 엎드린 뒤통수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주원 각성자. 우리 할 말이 많죠.”

“지호 씨도 봤잖아요. 내게 나오던 목소리……. 내 머리에서만 울리던 때는 이미 한참 지났어요. 생존자들이 기다려요. 그들에게 가야 해요.”

간절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지호는 한쪽 무릎을 굽혀 그에게 몸을 숙였다.

“그들이 살아 있고, 여전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한 짓거리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에요.”

“분이 풀린다면 나를 때려요. 어떻게 해도 좋아요. 죗값은 언젠가 치를 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들을 구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직접 들어가려고 했지만 무력이 부족해 실패했고, 연구하던 문은 정부에 빼앗기고 지금 남은 건 이 빌어먹을 목소리뿐이라고요.”

“놈을 믿을 수 없을 텐데요.”

“당연히 못 믿죠!”

주원은 버럭 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에 불이 튀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면서도 꿋꿋이 외쳤다.

“차라리 시체라도 본다면 편하겠어요. 하지만 알잖아요. 놈들은 밥 먹는 것처럼 인간을 먹고, 또 먹은 것들의 기억을 일부 가지게 된다고요. 놈이 생존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먹고 그들을 흉내 내고 있다 해도 우리가 알 도리는 없다는 거 다들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알면서 이랬다는 건 더 나쁜데…….”

“그래서 계속 이지호 헌터에게 도움을 구했던 거예요. 우리는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그들이 다 죽어서 우리가 형편없이 이용당하고 휘둘려 왔었다는 사실을 차라리 두 눈으로 보고 인정하게 해 줘요. 부탁합니다. 이지호 헌터잖아요.”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저는 고작해야 당신에게 납치된 전적 몇 번 있는 운 나쁜 헌터에 불과한데요.”

지호의 덤덤한 태도가 주원을 좌절하게 했다. 차라리 그가 화를 냈다면 어떻게든 대화를 감정적인 방향으로 틀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엎드린 주원의 멱살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방벽 저편에서 이쪽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일반인들에게 일렀다.

“여러분의 희망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각성자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 왔고, 또 그의 몸을 매개로 다른 이들까지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겠어요.”

아우성치는 목소리들로 지호의 뒷말이 묻혔다. 이지호 헌터가 왜, 하고 소리치는 자들의 태도에 처음에는 당황과 슬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가 차츰 분노와 적대감, 원망으로 뒤바뀌는 것이 보였다.

숨을 쉬려고 지호의 손을 붙잡으며 켁켁거리던 주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를 잡은 손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지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지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감사를 표해야 할까요? 덕분에 괴물들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 나는. 내가……. 그러려던 게…….”

“그러려던 게 아니라고 말하면 죄가 사라지나요?”

몇 번 버둥거리던 주원은 축 늘어졌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형 에너지 방벽은 정신계 공격 자체를 완전히 막거나 무위로 돌리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밀어내거나 영향력을 약화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지호는 주원의 머리 위 깨진 틈새가 본래 색을 되찾아 가는 것을 보며 다시 선글라스 왼쪽을 두드렸다. 녹화 표시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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