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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80화 (181/260)

180화

장인 서명은은 대노했다.

협회의 무리한 요구와 균열에 들어가는 온갖 장비 때문에 몇 날 며칠 철야로 고생했다. 가뜩이나 연합이 균열에 휘말린 후 제작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작업량을 맞추기 힘들던 마당이다.

그렇게 몸 갈아 가며 납품 일정에 맞췄던 이유는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헌터들이 위험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명은 역시 한때 헌터 일을 했던 적이 있었고, 균열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 잘 알았다. 이 때문에 명은은 자기가 만드는 것들이 그들의 목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호 씨가 이 지경 될 때까지 아무도……. 그러니까, 아무도 서포트 안 해 줬어요?”

서포트는커녕 그를 버리고 가기까지 한 서포터의 마지막이 생각나 지호는 뻘쭘하게 웃었다. 이 상태로 어디 갈 만한 곳이 생각나지를 않아, 그는 우선 언제나 자기편이 되어 주었던 호들갑스러운 명은을 떠올렸다.

운이 좋게 각성자 연합에 있던 명은이 지호를 맞이했다. 그는 지호의 상태를 스캔하면서 그간 균열에서 있었던 일의 설명을 들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시시각각 주변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최근 덕팔과 선경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명은은 지호를 버리고 도망친 덕팔의 도제가 각성자 연합에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욕설을 섞어 가며 말했다. 그놈이 이주원 각성자를 통해 연합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명은은 싸늘한 얼굴로 일갈했다.

“그딴 짓 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 새끼네 일 안 줬을 거예요. 전양련 이 개새끼들이……. 지호 씨 전투복 제작하는 데 들어간 것들 때문에 하던 작업들 다 미뤘단 말이에요. 근데 정작 중요한 본인을 이렇게 외면해? 협회 새끼들도 가만히 안 둬요. 거기서 그 새끼들을 쫓고 있다든가, 처벌은 어떻게 하겠다든가 뭐 그런 말 한마디도 없었어요?”

“워낙 급히 처리해야 할 게 많았으니 그렇겠죠.”

지호는 자신을 위해 화내 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성격이 순하고 무딘 사람일수록 그런 친구의 고마움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반쯤 못 쓰는 물건처럼 보였던 전투복은 명은의 손에서 새 물건으로 되살아났다. 본디 그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작업복을 하나 빌려 긴 소매를 걷지 않고 축 늘어뜨린 상태로 손을 감춘 지호는 왼손으로 쥔 컵을 슬쩍 기울였다.

“혹시 균열 방호복 만드는 회사랑도 좀 관련이 있으세요? 그쪽 관련 기술을 아신다든가.”

“전혀 없진 않죠. 최근에 박찬민 팀장이 물어보고 가긴 했었는데, 그쪽도 전양련이랑 관련 있대요?”

아마 있을 것이다. 지호는 박 팀장이 방호복 관련 업체 이야기를 몇 번 하고 지나갔던 것을 잊지 않았다. 여유가 없으니 대화를 할 시간도 없었을 뿐.

“그쪽에서 물건을 빼돌려서 허튼짓을 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빌미를 잡을 수 있을까요?”

“글쎄, 원자재 공급 측을 확인하는 건 박 팀장이 하러 간 것 같은데. 지호 씨는 사냥꾼들을 만나 보면 어때요? 우리 쪽 부자재들도 그쪽에서 많이 넘겨줘요. 헌터들이랑 사냥꾼들이 썩 좋은 사이가 아닌 건 아는데, 이번 여러 사고로 사냥꾼 수도 많이 줄었고……. 당분간 위험하게들 움직이진 않을 것 같거든요.”

“제가 따로 만나 볼 수 있어요?”

“그럼요. 아마 균열 닫힌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이쪽으로 손질한 것들 팔려고 올 텐데, 같이 볼래요? 우리 지호 씨한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해 준 일도 없는데 마음을 열어 주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중한 법이었다. 지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내 친절하고 호의적인 명은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가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뭐 어때요. 그치들도 균열에 너무 오래 들어가서 괴변이 겪은 놈들 없진 않아요. 각성했어도 헌터 일 대신 사냥꾼 일만 하면서 구조 작업 나 몰라라 하고 싶은 각성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정말요? 본 적 없는데.”

“애초에 사냥꾼들을 볼 일이 별로 없었을 텐데요?”

일반인들은 균열이 터지면 대피하기 바쁘니 당연한 일이다. 지호는 멋쩍게 웃고는 명은의 제안에 동의했다. 작업복이 퍽 잘 어울린다는 말에 하하 웃고 넘어간 그는 잠시 후 자기와 똑같은 복장을 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어, 이지호 헌터? 왜 여기에…….”

“오랜만이네요, 서상원 씨. 여기 와 있으실 줄 몰랐어요.”

“어, 음. 배울 때는 늘 최고에게 배워야 한다고 해서 좀 와 있어요. 헌터 웹이며 뉴스며 시끄럽던데, 괜찮아요?”

“그럼요. 전 언제나 괜찮죠.”

지호는 헌터 웹을 비롯한 온갖 커뮤니티에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 올라온 온갖 소문들은 그를 머리 아프게 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좀 들여다보기는 해야 했다. 준영이 말한 것 같은 이상한 소문들의 실체도 파악할 겸, 사람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알아낼 겸.

전에 헤어질 때 보였던 여유는 어디 가고, 상원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호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금세 알았다. 애초에 도플갱어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었던 사람이 상원이다. 헌터를 그만두었어도 각성자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을 터.

아마 지호를 보면 도플갱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때의 죽음 역시 함께 떠오를 것이다. 지호는 금세 그에게 흥미를 잃었다.

지호는 일부러 말을 붙이거나 하는 일 없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사냥꾼들을 기다렸다. 명은의 도제 몇 사람이 같은 작업복을 입고 안에 들어오는 걸 보니 무언가 옮길 것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무겁다.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상처투성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익숙한 것처럼 움직였으나 지호는 그러지 못했다.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호를 알아본 것처럼 움찔했으나 금방 고개를 돌려 버렸다.

“종류가 얼마 없네?”

“이번에 사냥꾼 팀에서 사망자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괴물들이 점점 지능적으로 움직여서 생명 수당 좀 높게 쳐주셔야겠어.”

“그럴 거면 협회에서 받지.”

“아 좀, 부탁 좀 합시다. 진짜 이번 균열은 뭐가 좀 이상했다니까.”

“그런 것치곤 양은 많은데?”

명은은 비아냥거리며 사냥꾼들의 전리품을 둘러보았다. 지호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균열을 넘어가려고 자신을 쪼갠 괴물들일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사냥꾼들이 위험하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냥꾼 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자가 머뭇거리더니 지호의 눈치를 살폈다. 척 봐도 지호가 헌터라는 사실을 아는 눈치다. 명은 역시 그가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었으나 별 내색 없이 부산물들을 지목했다.

“이번에 균열이 짧게 열려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적당히 쳐줄 테니 말해 봐.”

“괴물들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저희야 장인님 편으로 괜찮은 방어구를 살 수 있다지만, 다른 놈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꼭 유인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죽여서 균열 저쪽으로 끌고 가는 새끼들이 있더라니까요. 이번 균열은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요.”

“열렸을 땐 이만한 크기라니 내 인생에 대박이 난다면서 뛰쳐나갔잖아.”

사냥꾼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호는 사냥꾼들과 각성자 협회가 생각보다 친해 보인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기며 그들을 관찰했다. 사냥꾼들은 대부분 상처투성이였으나 잘 보면 괜찮은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개중에 몇 개는 협회로 바로 올라가는 신형이다.

“어쩔 수가 없다니까. 상태 안 좋은 놈들 데리고 들어가려고 해도 방호복 구하기가 힘들어서…….”

“방호복? 왜?”

명은과 지호의 눈이 마주쳤다. 지호는 그가 일부러 그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냥꾼은 자기 전리품들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숨기려고 애썼다. 실패했지만.

“그, 얼마 전부터 방호복 가격이 진짜 천정부지로 올라서요. 어지간한 벌이로는 구하기도 힘들더라고요. 최근에 급성 균열만 수두룩하게 생기다 보니까 사냥꾼들은 진짜 목숨 내놓은 거 아니면 돈벌이하기도 힘들고…….”

“그러니까 왜 올랐어? 급성 균열 때문에?”

“당연하죠. 급성 균열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생겨나는데 혹시나 싶어 방호복 갖춰 두려는 놈들이 늘었다고 하던데요.”

그럴 리가 없다. 방호복을 구할 루트가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존 키트나 저장식을 준비해야지 방호복을 사려는 사람이 있으려고.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균열에 오래 머무를 때 신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일 터였다. 지호의 의심이 구체화될 즈음, 명은은 사냥꾼들이 가져온 부산물들을 적당한 가격으로 구매했다. 가격이 결정되자 뒤에서 기다리던 연합 사람들이 물건을 나르러 움직였다. 상원 역시 지호에게 말 붙이거나 눈 마주치려는 시도 한 번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나 버렸다.

한때는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던 이가 지호를 외면하고 떠나간다. 다른 모든 헌터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러나 쓸쓸함을 느낄 여력은 없었다. 지호는 명은의 협조에 감사를 표하며 그가 고쳐 준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몇 군데 조정을 더 마쳤으니 좀 더 움직이기 좋을 거라며 큰소리친 명은은 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나는 그 헌터들도 왜 그러는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지호 씨는 옳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각성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렇죠?”

“아뇨. 그렇지도 않아요. 처음 각성할 때에야 분명 선한 의도를 갖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과 타협하면서, 점점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되는걸요. 하지만 지호 씨는 여전히 남들을 위해 이렇게 발로 뛰며 노력하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요.”

금 박사나 남선일 사령관은 그것이 비정상적인 이타심이라고 말했었다. 지호는 명은의 감상을 깨는 대신 방긋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오른손도 티가 안 나네요.”

“그 정도 개량이야 간단한 일인데요, 뭐. 아차, 협회에서 지호 씨 여기 있는 거 알던데요. 이거 전해 주라고 하더라고요.”

지호의 위치 파악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호는 명은이 내민 카드를 받아 들었다. 한때 보현의 이름이 적힌 것을 지갑 한쪽에 품고 다녔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지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은은 고개를 저으며 협회 뒷담을 늘어놓았다.

“그거 분명 한참 전에 줬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있다가 이제야 부랴부랴 발급했을걸요. 하여간 위험 현장 나가는 헌터들일수록 자기 몫 안 챙긴다고 미적거린다니까. 지호 씨 출동하면서 나가는 생명 수당이며 위험 수당이며 이것저것 쌓여 있을 거예요. 그리고 구조 작업이나 마정석 관련 작업에 동참했으면 더 있을 거고.”

“돈 될 만한 일은 별로 안 한 것 같은데…….”

“그런 큰일 날 소리를! 앞으로 마정석 잘 챙기고 부산물도 잘 수거해요. 본인 손으로 안 할 거면 수거 팀에라도 연락하고. 그거 다 우리 연합 재료가 된다고요. 나를 위해 그러기예요. 알겠죠?”

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잘해 주시나 싶었는데, 일 잘하는 부산물 공급자가 필요하셨군요?”

“그것도 물론 없진 않죠. 세상사 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요.”

명은은 과장되게 가슴을 펴 보였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지호에게 인사한 뒤 자기 공방으로 달려갔다.

지호는 핸드폰 뒤에 카드를 수납한 뒤 생각에 잠겼다. 박 팀장을 찾아가 전양련을 어디까지 추적했는지 확인해 볼까. 아니면 지윤의 말대로 지금 몸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다.

후자가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 지호는 손이 철저히 감추어진 것을 몇 차례 확인하곤 각성자 연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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