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헌터들과 한차례 충돌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들이 도훈에게 보였던 적대감은 지호까지 외면할 정도로 극렬했었다. 현역 헌터가 곁에서 떨어진 코드 레드 투에게 퍼부어졌을 공격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에 표정 변화가 너무 드러났는지 도훈은 씩 웃으며 지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 죽이지는 않았어. 그쪽으로 넘어가면 얼굴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냥 적당히 제압만 해서 보냈다고. 애초에 그러는 편이 서로한테 좋잖아. 저쪽으로 넘어가면 퀸 패러사이트가 있고.”
“이 거리에서도 놈과 대화할 수 있어요?”
“어. 전에도 보여 줬잖아. 내가 아니라 저쪽에 볼일이 있는 거였어?”
“아니, 그건 아녜요. 도훈 씨 보러 온 거예요.”
지호의 대답이 그를 만족하게 한 모양이었다. 도훈은 턱 밑을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역시 좀 힘들어도 이 모습을 유지한 보람이 있어. 이 구역에 저 하얀 비가 내리기에 망정이지, 다른 지역이었으면 지금쯤 다른 얼굴로 만나고 있었을 거야.”
“뭐 위험한 거라도 있었어요?”
“나는 싸우는 덴 별로 소질이 없다고. 죽고 죽이는 거면 모를까.”
헌터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애먹었다는 도훈의 대답이 지호를 슬프게 했다. 여기서 아무리 애쓴다 한들 다른 이들은 이미 그를 괴물로 취급하고 있고, 그들의 거처에 들어오지 못하게 제한하고, 나아가서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협조가 아니라 이용이었다.
준우가 지호에게 했던 것처럼.
도훈은 지호의 어깨너머, 서포트 담당이 매복하고 있는 위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회복한 지 얼마 안 되는 지호를 홀로 보내기엔 아무래도 리스크가 컸기에 근처까지 동행하다가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헌터는 아니고 각성자 연합의 지원자였다. 덕팔의 도제 중 한 사람.
문득 기묘한 깨달음이 고개를 든다.
도훈의 표정에서, 그리고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드러나는 몸짓에서. 지호는 헌터들의 적대적인 태도가 이미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글픈 앎이었다.
다 알면서도, 도훈은 여전히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외면하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샘솟았다. 도훈은 먼 곳으로 시선을 둔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묵묵히 다른 이의 말을 전했다.
“퀸 패러사이트가 어떤 헌터를 기다리고 있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 그 사람을 잠시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군.”
“불가능해요. 몸이 너무 약해져서 균열로 다시 들어올 수 없어요. 말을 전하는 정도라면 중간에서 도와드리죠.”
“그 헌터만 만나면 이 균열을 떠나겠다고 하는데도?”
퀸 패러사이트의 위치가 확인된 이상 그가 이동하는 것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면 헌터들에게 큰 위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현역도 아니에요. 은퇴한 헌터라고요. 현장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무의미한 기다림이라고요.”
“다른 놈들이 다 죽을 때도 은퇴했으니 모르겠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텐가?”
“뭐라고요?”
“라고 하는데. 진정해. 나 아니야.”
도훈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지호는 눈에 쌍심지를 켠 채 퀸 패러사이트가 있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 알려 줬던 방법대로 균열을 탈출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균열을 닫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어요. 우리가 굳이 저쪽으로 접근할 필요까진 없단 뜻이죠.”
“그럼 굳이 말을 전할 이유가 있어?”
“그때 타이밍 좋게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악의 상황에서나 선택할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퀸 패러사이트가 자리만 좀 옮겨 주면 피차 편할 텐데.”
도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피차라고 하긴 좀 그렇지. 너희한테만 유리한 일이니.”
“저기서 오지도 않는 사람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는 것보다야 한쪽이라도 이득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 헌터가 균열을 넘어갈 방법을 알고 있는 거지?”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훈은 그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 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지호는 도훈의 등 부분이 거의 너덜거리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지호의 것과 유사한 신형 전투복이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망가지기 어려울 텐데.
“여왕은 너와 접촉한 내가 어떤 좋은 방법을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나를 잡으려는 것들이 그 호위대 말고도 많더군.”
“괜찮았다고 했잖아요.”
“이 몸에서 벗어날 만큼의 상처는 아니었어.”
그러나 고통스럽지 않았을 턱이 없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도훈의 상처로 손을 뻗다가 움찔했다. 내민 손마저 오른손이다. 그를 상처 입힌 괴물들의 것과 같은 모양.
“그나마 위쪽만 이 지경이고 아래는 좀 괜찮아. 아까 네가 등을 문질러서 놀랐다고.”
“아니 그건 도훈 씨가 먼저 저를 안으니까 반사적으로…….”
“상처라도 건드렸어 봐. 얼마나 아팠겠어?”
먼 곳에서 구름이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비를 쏟아 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저쪽 차례일까. 저 비구름의 규칙성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성 팀장이 생각났다.
지호는 도훈의 등에 왼손을 얹었다. 왼쪽 날개뼈 부근은 아예 살이 다 드러나 있었다. 녹색 빛이 느릿하게 몸으로 스며들자 도훈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저 녀석만 궁금한 게 아니야. 나도 궁금해.”
지호는 여전히 대답 없이 그의 등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다. 괴물이라고 해도 쓰고 있는 몸이 사람의 것이라 그런가, 다행히 회복 체계 자체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애당초 지호의 힘은 다른 이들처럼 기적 같은 상태 회복에 있지 않다. 도훈의 살이 본래 속도보다 빠르게 아물어 갔다. 그것이 간지러움을 유발하는지 도훈은 몸을 꿈틀꿈틀 움직이며 웃었다.
“아, 이거 말 못 하게 하려고 간지럽히는 건가?”
“원래 상처가 나으면서 간지럽기도 해요.”
“봐 줄 만한 게 반반한 껍데기뿐이니 간수를 잘해야 하거든. 잘 고쳐 줘. 속에 든 건 괴물이어도 일단은 사람 모양인 쪽이 덜 부담스럽잖아.”
“겉모습이 괴물로 변한 다른 사람들보단 덜 거북할 거예요.”
각성자들도 괴물이고 도훈도 괴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어느 쪽이 좀 더 사람처럼 느껴질까. 아마 후자 쪽일 것이다. 도훈의 말마따나 그럴싸한 껍데기는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퀸 패러사이트가 기다리고 있는 그 헌터만 균열을 넘어갈 방법을 알고 있는 거지? 너는 모른다고 했잖아. 전에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빠져나갈 때 그 헌터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군.”
“언니는 못 와요. 몸이 너무 약해졌다고요. 여기서 괴물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만큼 약해졌어요.”
“신체 계열 각성자가 아닌 모양이지? 하긴, 퀸 패러사이트도 그렇지. 저 녀석은 부리는 것들은 살벌하기 그지없는데 정작 본인은 유리보다 약하단 말이야.”
“어떻게 알아요?”
“본인이 가르쳐 주던데. 자기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그래서 그 헌터를 기다리는 거라더군.”
이대로 시간만 끌어도 보현이 갚으려던 원수는 확실히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지호는 그 말을 들은 보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자기 손으로 하는 것이 복수라고 말할까, 아니면 놈의 최후가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기뻐할까.
문득 퀸 패러사이트가 데리고 있는 숙주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준우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많았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퀸 패러사이트가 죽으면 데리고 다니던 것들은요?”
“몰라. 죽어 봤어야 알지. 저 녀석이나 나나 변이체야. 비슷한 동족이 여럿 있는 게 아니라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아프지 않을 만큼 등의 상처가 아물자 도훈은 어깨를 으쓱이고 팔을 휘두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또 활짝 웃었다. 웃음이 헤픈 자였다. 그리고 이제는 예전만큼 미소가 어색하지도 않았다.
“퀸 패러사이트가 저쪽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그 헌터, 아니 그러니까 은퇴했다는 자를 보호하고 있는 거지?”
“아니 정말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거라니까요.”
도훈은 지호의 변명 아닌 변명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했던 요구는 진작 실현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호가 함구하고 있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던 것이니. 이 시점에서 도훈이 지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보다 이상한 소문이 돌아.”
“소문요? 어디의 누구한테?”
“괴물들끼리도 의사소통 방법 정도는 있어. 보통은 대화하는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 균열에서만큼은 좀 예외가 많더라.”
도훈과 퀸 패러사이트 역시 대화를 나눈다. 그 밖에도 인간이 모르는 방식의 대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다. 도훈은 주변을 의식하더니 지호 쪽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혹시 우리 대화, 누가 듣고 있어?”
사실 듣고 있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수신할 수만 있는 기기였다. 지호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키더니 얼마 충전되지 않은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도독 화면 두드리는 소리가 꽤 빠르다. 오래 걸리지 않아 장문을 완성한 그가 화면을 넘겨주었다.
[긍정적인 소식일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유행이 시작되고 있어. 약해지면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소문이야. 일단 너만 알고 있어. 진짜 소문이 퍼진 건지는 다른 놈들에게도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원래 같으면 여기로 넘어온 놈들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고 먹고 먹어. 그게 일반적인 생태계니까. 하지만 처음 자리 다툼 며칠 외에는 그다지 싸움이 일어나는 일이 없잖아.”
일반 균열은 처음인 데다 멀쩡하게 임무에 전념할 수 있던 시간이 적어 몰랐다. 지호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서둘러 반박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싸웠는데요? 이런 놈 저런 놈…….”
“여길 나가는 데 관심 없는 놈이었거나 어떤 명령을 받은 놈들이었지?”
금속 먹는 놈들이나 여왕의 호위대들을 칭하는 것이다. 균열에 들어와서 절반 정도는 함께 있던 도훈이니 지호가 누구를 만났는지 봤을 수밖에. 키클롭스들은 여왕의 호위대에 딸려 오는 놈들이라 예외로 치고, 준영을 보호하기 위해 마주쳤던 것들을 제외하면 정말로 그렇다.
그에 앞서 지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많은 전투를 겪었어야 했단 말이에요?”
“네가 계속 이동해서 그래. 한곳에 가만히 있었으면 놈들끼리 구역이 정해졌을 거고, 그러면 그렇게 부딪치지 않아도 되었을걸.”
“미등로 각성자를 보호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했다고요.”
“둘러보니 너희 쪽 녀석들이 특정한 구역 부근에 몰려 있더군. 아마 거기가 경계일 테고, 이제 균열도 안정되었으니 다른 놈들도 넘어 다닐 수 있어서 거기 있는 거겠지?”
도훈이 앞서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자 더욱 찜찜해졌다. 지호는 설마 하며 있을 수 없는 추측을 입 밖에 내놓았다.
“아까 말한 소문이나 괴물들 행동 같은 것들이 혹시…….”
“진짜 가능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어떤 놈은 성공하고 어떤 놈들은 실패하더라. 보통은 거의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진짜 드물게 저쪽으로 넘어가는 놈들이 있었어. 아주 틀린 소문은 아니란 뜻이겠지. 딴 놈에게 잡아먹히는 걸 감수하면서 자신을 쪼개는 것들이 늘었으니 오히려 너희 쪽에선 안전해진 거 아닌가?”
“한 놈이라도 넘어가면 재앙이잖아요.”
“그렇겠지. 전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균열을 넘어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단 것에 분노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도훈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분하게 괴물들 사이에 도는 소문들 몇 가지를 더 알려 주었다.
“먹이들, 그러니까 너희 인간들이 무리 짓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는 이야기도 돌아. 원래는 각자 찾기 어려운 곳에 하나씩 둘씩 숨어들 있어서 먹이를 먹기 까다로웠는데 갑자기 변했다나?”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놈의 헌터웹에 도는 소문 때문일 것이다. 몰살당하기 딱 좋은 그딴 소문들, 나가기만 하면 유해 페이지 지정해서 다 신고 먹이자고 의견 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잘못 알려진 정보가 있어서 그래요.”
“안 죽고 숨은 것들에겐 차라리 운 좋은 일일지도 몰라. 덕분에 다른 놈들도 넓은 곳, 큰 공간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거든. 원래 같으면 좀 더 꼼꼼히 주변을 찾아볼 텐데 말이야.”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지호는 그냥 그 소식을 전해 들을 수신기 건너편의 동료들이 적당한 해결책을 찾아내길 바라며 고개만 끄덕였다. 지호가 처리할 선의 이야기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