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일반 균열이기에 급성 균열과 비교하면 괴물의 강한 정도가 들쑥날쑥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번 균열은 유독 심했다. 인천 북부 균열로 명명된 대형 균열에서 괴물을 상대하느라 사상자가 꽤 나왔다.
물론 새 각성자도 몇몇 나오긴 했지만, 노련한 헌터들의 자리를 대체할 인력이 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유튜버들이 가짜 뉴스를 양산해 대는 꼴을 보며 sns를 쭉 확인한 성 팀장은 타이머가 울린 뒤에도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호가 알아서 몸 여기저기에 붙은 기기를 떼어 내고 닦아 내는 사이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그는 사과부터 하며 지호 이마에 붙은 나머지 측정기를 떼어 주었다.
“어, 미안. 요새 새 일도 겸해서 맡고 나니까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균열 연구 팀 아니셨어요?”
“말도 마요. 나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인력이 달린다나 뭐라나. 각성하기 전에도 관련된 일은 해 본 적도 없는데.”
성 팀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호의 손을 스쳐 갔다. 그러나 남들처럼 걱정하거나 호들갑 떨고, 혹은 두려워하거나 찜찜해하며 물러나지는 않는다. 성여진 팀장은 아무렇지 않게 하품했다.
“각성 초기 훈련할 때처럼 한참 감각 잡는 연습부터 다시 해야겠네. 하필 오른손이라 오래 걸리겠어요.”
“해야죠, 뭐.”
맞는 말이다. 손을 다시 절단하고 사람 손을 복구시키는 등의 기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튼 적응해야 하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지루한 검사가 끝나자 지호 앞으로 돌아온 건 균열 내부에서 나머지 업무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거의 명령에 가깝다. 협회 사령관으로부터 직통으로 내려온 지시였다.
“각성자 연합 오덕팔 장인이 서포트할 거예요. 메두사 부산물로 제작한 장비 강도가 어마어마한데, 대신 제작하는 기기 하나를 다 마모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재료를 여럿 구해 오더라도 양산에 차질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장비 제작 마무리 단계일 거고요. 그리고…….”
“다른 자잘한 건 됐어요. 제가 해야 할 게 뭐죠?”
“사실 선배로서 할 말은 일단 쉬라는 건데요. 며칠 쉰 거로 충분할 리가 없으니까.”
지호는 싱긋 웃었다. 그런 여유가 허락되는 곳이 아니었으니 못 들은 셈 친다는 얼굴이었다. 성 팀장은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어린 헌터에게서 눈을 떼며 한숨 쉬었다.
“코드 레드 원이 발견된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멀지 않은 위치에 코드 레드 투가 나타났고요. 메두사는 보이지 않는데, 불규칙적으로 내리는 구슬 비 때문에 수색도 전투도 다 엉망이에요. 균열 전체가 비구름에 덮여 있는데 모든 곳에 동시에 비가 오는 것도 아녜요. 거기 무슨 법칙이 있는지 알아내라니, 연구 팀에 그 정도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 다 처리해 버리고 균열 닫았죠. 안 그래요?”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균열이 열린 후 며칠을 꼬박 새워 가며 현상 파악에 매달린 모양인데, 저런 기이한 기상 현상이 모든 일반 균열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원인을 알아내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아마 상부에서도 정확한 원인 규명을 바라는 것은 아닐 터였다. 성 팀장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헛기침했다. 민망함을 숨기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다른 구역 괴물들을 정리하는 데도 제동이 걸렸어요. 아직 구조 못 한 민간인들이 있으니까. 혹시 너무 많은 괴물을 잡아서 균열이 닫히기라도 하면 곤란하고요.”
“균열 초기에 제가 여기 들어와 있어서 괴물들이 너무 강해졌던 건가요?”
성 팀장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걱정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다양한 계측기에 잡힌 이형 에너지의 세기로 볼 때 지호 때문에 강한 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출연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번 균열에서 가장 강한 놈들이 메두사였을 거예요. 이게 급성 균열이랑은 좀 다른 것 같더라고요. 전체적으로 평균치를 이루는 편이라 삐죽 튀어나온 강한 괴물이 없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이상하게도 유독 괴물들끼리 많이들 싸워서요.”
일반 균열은 괴물들이 연 것이라고 했었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가물가물하다. 준우였나 도훈이었나.
“두 코드 레드 개체가 싸우진 않고요?”
“네, 적당히 거리 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예전에 지호 씨가 촬영해서 보고 올렸던 코드 레드 투의 변이 영상 기억해요?”
지호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었던가? 성 팀장이 재생한 영상이 기억을 일깨웠다. 도훈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사체의 몸을 입고 균열 경계를 걸어 나왔던 바로 그때 촬영한 영상이었다. 뒤늦게 생각이 난다.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어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여력이 없었다.
“어, 이게 왜요?”
“헌터 웹에 이 영상이 올라갔어요.”
성 팀장은 건조하게 몇 가지 영상들을 읊었다. 하나같이 헌터들이 현장에서 촬영한 것들이며, 그중에서도 기밀을 요하는 수준의 보안 자료들이었다. 공통점이 있다. 영상에 찍힌 괴물이 촬영자를 공격하지 않는 것들이란 사실이다.
“헌터 웹에 왜 이런 것들이?”
“아마 괴물을 무조건 배척하는 이들에게 증거를 내밀려는 것 같아요. 실종자 가족들이나 평화주의자 모임 사람들 짓일 수도 있고요. 누가 벌인 일이건, 사태의 영향력이 작지는 않아요. 가뜩이나 각성 방법이랍시고 이상한 자료들이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판국이니…….”
성 팀장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살아남을 기회를 제 손으로 저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호는 푸른솔 중학교 강당의 참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들이 지호 씨 보고 때문에 퍼지는 건 아니었을 거예요. 아마 오랫동안 물밑에서 암암리에 퍼져 왔겠죠. 거기에 저런 종류의 영상들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각성하는 가짜 방법에 이상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괴물을 만나도 대화만 어떻게 잘 시도해 보면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동의를 얻기 시작했죠. 이제 지호 씨의 보고 때문에 또 하나의 유형이 생겨날 거예요. 괴물을 사람으로 본다는 건 이런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지호 씨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사람이었던 괴물인지 그냥 사람인 척하는 괴물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냥 그를 먹으려고 다가온 괴물인지 대화하자고 나온 괴물인지 파악할 능력이 없다고요.”
“알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괴물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들어요?”
지호는 어설프게 웃었다. 성 팀장에게 준우와 승환의 이야기를 해 봐야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괴물 된 사람들은 괴물일 뿐이라고 결정한 것 같으니.
“성 팀장님. 손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 저는 괴물인가요?”
“치유 능력과 균열의 이형 에너지 과포화 상태 때문에 벌어진 괴변이에 불과해요.”
“그런 변이가 전신에 일어나게 되면요?”
“무슨 말 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제가 지호 씨가 괴물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호 씨의 많은 부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성 팀장님을 설득하자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제 눈에는 괴물이 된 실종자분들이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느껴지고요. 전부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기 남은 사람 중에 누군가는 분명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회색뿐인 세상에서 나를 구하러 와 주는 헌터가 얼마나 반가운데요. 성 팀장님은 비각성자 시절에 다른 헌터한테 구조되어 본 적 있으세요?”
성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둘은 평행선만 달릴 의견 교환을 그만두고 다시 상황에 집중했다.
다른 지역이야 어떻건 검단 캠프에 구슬 비가 내리는 시간은 약 서너 시간 간격으로 일정한 편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정신 방벽 자체를 다른 정신계 능력자들처럼 견고히 세우지는 못하지만, 예전처럼 저항도 못 하고 맥없이 당하지 않게 된 지호 역시 현장 투입 가능 멤버로 분류됐다.
원래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질적인 인원 부족이 예외를 만들었다. 성 팀장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지도 위에 기상 정보를 띄웠다.
“지금 검단 캠프에 내리고 있는 비는 삼십 분 전부터 오고 있던 거니까 앞으로 십여 분 후에 그칠 거예요. 관측했던 대로 움직인다면 두어 시간 정도는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고요. 괴물과 전투 없이 코드 레드 투와 접촉하기만 해요. 그 괴물이 지호 씨에게 호의적이잖아요.”
지호의 접근을 느끼고 저쪽에서 다가온다면 절대로 퇴각할 것을 조건으로 투입된다. 덕팔이 재료 마감을 마치고 신형 전투복에 방호구를 부착해 주며 이것저것 설명하는 데에만 삼십 분가량이 소요됐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 판이라 성 팀장은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 뒤를 서성였다.
프로틴 바를 몇 개 까먹으며 설명을 경청했다. 작전이라 부르기엔 초라한 이번 투입의 골자는 간단하다. 도훈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좀 물어보고 올 것.
“데리고 오는 건 안 되는 거죠?”
“절대 안 되죠.”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어쩐지 묻고 싶었다. 도훈은 아마 이 캠프에 들어오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헌터들과 함께 여기를 나가고 싶어 할 테고.
가슴이 무겁다. 이지호 이름 석 자로 표기되는 도훈의 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서 관찰해 보니 얼마 안 되는 태양빛이라도 받아 보려고 휴대용 태양열 집광판을 들고 있다고 했다.
우습지도 않다. 조태양 헌터가 주었던 물건이다. 자기 이름 같은 걸 주고 그러나 생각했었는데, 사실 대부분 흐리고 햇빛이 약한 균열 내부에선 태양열 충전기보다는 흔들어서 사용하는 물리적 방식 충전기가 훨씬 효율적이다.
아마 알고도 효율 좋지 않은 것을 주었을 것이다. 생전의 민도훈 헌터를 알고 지내던 사람이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머리가 복잡할 거란 생각은 했다.
지호가 접근하자 약한 종류의 괴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근방에 메두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퀸 패러사이트나 그의 수족들 앞에서는 이런 반응 보이는 괴물이 없었다. 도훈에게도 마찬가지고.
지호나 여왕의 호위대인 뱀들 정도가 이 균열 생태계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괴물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보다 더한 전투를 치러 낼 자신이 없었으니.
“우리 지호!”
멀리서 지호를 발견한 도훈이 손을 크게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도훈에게도 비슷한 기기가 있으니 같은 이름의 신호를 발견했을 것이다. 멀쩡한 걸 보니 어디 다치거나 위험한 일을 겪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주치자마자 그를 와락 끌어안는 것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 진짜로 기뻐 보였으니까.
“다행이다. 다치지 않아서. 여왕의 호위대가 너희 쪽으로 가는 걸 봤어.”
지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연신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던 도훈은 질겁하며 지호를 도로 밀쳐 냈다. 자기 등을 쓸어내리는 손의 감각 탓이었을 것이다. 지호는 어색하게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덕팔이 만들어 준 방호구들 덕분에 일부러 뒤집어 보여 주지 않는 이상 손이 드러나 보일 염려는 없다. 하지만 지호는 일부러 도훈에게 제 손을 보여 주었다. 그래야 했다.
“크게는 안 다쳤어요. 손 정도.”
“도대체 어쩌다…….”
“좀 그렇게 됐어요. 일단 살아 있으니 됐잖아요. 잘 지냈어요? 균열 안정기도 되고 여럿 드나들었는데, 사람들 만나진 않았고요?”
“아무 이야기 못 들었구나?”
“무슨 이야기요?”
“내게 접근하는 방법을 바꿨다고 생각했어. 너를 미끼로 삼으면 내가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너무 정확해서 기분이 별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