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어떻게 그게 가능해?”
“괴물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을 태어난 때로 친다. 그때 자기 스스로 이름을 지어. 내가 더 이상 도준우가 아닌 이유는 그 까닭이지.”
“그럼 이름을 알면 뭐 상대를 조종할 수 있기라도 해?”
“안 가르쳐 줄 거다.”
갈라졌던 하늘이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오며 구름이 느릿하게 뭉쳐졌다. 지호는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손을 오므렸다 폈다 몇 번 반복하고는 고갤 끄덕였다. 아까부터 내내 따라다니던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에는 생채기가 남았다.
“대답해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어.”
이제 진짜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여왕의 호위대니 뭐니로 불렸을 때부터 짐작했다. 괴물들에게서 추출한 마정석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회복할 때에도 그랬고.
그러나 심정적으로 그럴 거라고 생각할 때와 이렇게 눈으로 증거를 보는 데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자신과 도준우의 차이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냐 정도인데, 그게 얼마나 유의미한 정보인지 모르겠다. 가끔 사람과 오래 산 개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개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사람이 아니란 사실로 우울증에 걸린다고 하니까.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가 사람일 수는 없었다.
“형, 헌터들 오고 있어.”
아까 여왕이 일으키며 온 자연현상 자체에 시선이 안 몰릴 수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른 자들이 온다는 말에 준우는 우선 지호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질적인 힘이 몸을 훑었는데 기운이 났다. 그러고 보니 준우는 치유계 능력 소지자였다. 고통 때문에 정신없이 괴로울 때도 도움을 받았었지. 지호는 괜히 바닥을 내려다보다 시비를 걸었다.
“적성에 잘 맞는 능력도 아닌 걸로 언니를 살렸었지?”
“글쎄.”
“퀸 패러사이트에게 당하기 전에 언니를 구한 거야, 아니면 당하고 나서 언니라도 빼돌렸던 거야?”
“순서가 중요한가?”
“인간인 도준우 헌터가 한 일인지 지금 당신이 한 일인지 궁금해서.”
“감각에 이상은 없나? 모체였던 호위대가 평범한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다섯 손가락 가진 놈이었던 것에 감사해라. 놈의 손을 그대로 재현하다니, 위험한 짓이었어.”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준우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신체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여왕의 힘을 버틸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은 그도 알고 지호도 알고 있었으니.
승환이 재차 둘을 재촉했다. 헌터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둘에겐 다른 의미의 신호처럼 들린다. 지호는 손을 감출까 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호위대 사냥이 지금 당신이 하고자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인 거지?”
“우선은 그렇지.”
“아니라고 하겠지만, 언니를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할래.”
준우는 묵묵히 자기 장비만 확인했다. 구형 전투복이라 헌터들이 쓰는 도구들도 당연히 가지고 있는데, 균열로 넘어와 쓸모 다한 전자 제품이나 닳은 칼날 같은 것들을 죽은 이들의 것으로 교체하는 것 같았다. 제조 시기가 중구난방인 도구들을 쓰임새 맞게 정리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이후로도 협조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런 것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내가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그리고 되돌아온 것도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서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지. 나는 너희 인간들 모두를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니야. 너희가 다 죽어도 그 한 명 살릴 수 있으면 내 목적은 달성한 것과 같으니.”
“언니는 좋아하지 않을걸.”
“늘 그랬으니 괜찮아. 자길 지키려고 뛰어드는 동료들에겐 질색하며 차라리 본인이 다치겠다고 하는 녀석이니.”
“어차피 퀸 패러사이트와 합류하면 언니를 노릴 수밖에 없잖아.”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일 뿐이야. 녀석이 균열에 들어와야만 사용할 수 있기도 하지. 하지만 이곳으로 여왕이 넘어오지 못하게 된다면 적어도 내 주인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극단적 시도를 하게 될 확률은 낮지.”
호위대의 하반신에서 뱀 껍질을 쭉 벗겨 낸 그는 지호에게 그걸 휙 던지며 아직 칼날이 날카로운지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다시 못 쓸 정도로 날이 무뎌진 헌터용 나이프다. 다시 구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한 바퀴 돌려 검집에 꽂아 넣은 준우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승환에게 지시했다.
“헌터들과 부딪칠 필요는 없겠지. 이동하자. 너는 그걸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해 봐라. 아까 싸워 보니 강도가 상당하면서 유연한 재질이더군. 아마 괜찮게 개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다.”
“이럴 거면 그냥 헌터들한테 솔직히 말하고 도와달라고 해. 다들 목적도 비슷한데.”
“내가 여기에 퀸 패러사이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왔단 사실을 잊었나 본데. 괴물들에게 헌터는 질 좋은 먹이로밖에 안 보여. 협조를 요청한다고? 너는 네가 저녁으로 먹을 사과에게 양분 관리를 고루 하라고 요청할 생각이나 들겠나?”
누군가의 감지 파장이 주변을 훑었다. 승환이 움찔하며 준우의 등을 두드렸다. 진짜 떠날 시간이다. 지호는 뱀 껍질만 손에 든 채 거기 남겨졌다. ‘또 보자, 작은 헌터.’하는 승환의 속삭임이 균열의 무거운 공기 중에 흩어진다.
괴물 부산물을 들고 있는 손이 오른손이라 지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괴물의 손으로 괴물의 시신 일부를 들고서 헌터들을 기다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괴물이지만, 스스로 인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괴물로 변한 실종자들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 아닐까? 어쩌면 모두가 같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실종자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여 줄지도 모르는데.
몇 분 후, 이지호 헌터를 발견한 헌터 팀에서 소란이 일었다. 검암 캠프를 휩쓸었던 괴물들이 바로 그 뱀 닮은 놈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놈들의 시신이 즐비하고 지호의 손에는 거기서 벗겨 낸 뱀 허물까지 있었다.
“지호 씨?”
헌터들 대부분이 다가오던 그대로 멈추었다. 지호는 들고 있던 뱀 허물을 내려놓으며 양손을 들어 머리 뒤로 올렸다. 무장 상태 아님. 방벽까지 해제된 상태. 그런데도 다가오기를 꺼리는 이들뿐이다. 풍경이 워낙 피투성이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구조 팀인지 사냥 팀인지 모를 이들 사이에 아는 얼굴이 몇 보였다. 지호는 웃으려고 애썼다.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사였으나 헌터들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온 알파 팀 박순자 헌터는 이를 악물었다.
웅성거리던 이들의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유일하게 이성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수거 팀에 연락을 넣어 괴물 부산물을 회수해 달라는 요청을 넣은 알파 팀 리더는 지호와 삼 미터가량 거리를 둔 곳에서 멈추었다.
“이쪽에서 상당수의 괴물이 도망쳐 오더군요. 이지호 헌터 때문이었습니까?”
“제가 범인은 아닌데요. 거기 휘말리긴 했어요. 괜찮으시다면 보고를 좀 올리게 아무 기기나 좀 빌려주실래요? 잃어버려서요.”
상대가 핸드폰을 휙 던졌다. 지호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움직여 기기를 받았고, 몇몇이 헉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날카로운 손끝으로 기기를 어떻게 만져 보려던 지호는 포기하고 왼손을 썼다. 다행히 오른손 지문으로 열리는 등의 구식 생체 인증 방식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모두에게 해도 되는지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지호는 그의 앞에 선, 심지어 긴장하고 있는 헌터들을 보며 씁쓸해졌다. 이럴 줄 알고 있기는 했다.
“우선 상황 보고부터 올릴게요. 퀸 패러사이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너무 많은 분이 여기 계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코드 레드 뜬 지역은 다른 팀이 파견되어 있습니다. 우린 사실 이지호 헌터 백업을 하러 온 건 아니에요. 방금 생겼던 엄청난 에너지원을 추적하려고 온 거고요. 본 게 있으시겠죠?”
“제가 헌터님께 이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건 아닐 텐데요.”
말이 신경질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호는 인증을 마치고 자기 정보를 받는 기기를 초조하게 노려보았다. 지호라고 공격적이 되고 싶어 공격적으로 구는 것이 아니다. 일부 헌터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 지호를 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보 갱신이 되며 못 받던 소식들이 주르륵 업데이트됐다. 날짜도 확인했다. 안정기 이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다. 약 기운으로 기절해 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왼손으로 화면을 조작하려니 낯선 느낌이다. 타자 칠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지호는 본인이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상급자인 센터장 박 팀장에게 직통으로 연락을 넣었다. 신호는 몇 번 가지 않고 금방 연결됐다.
-이지호 헌터? 본인 맞아요?
“네, 팀장님 저 여기 지금 균열 내부인데.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좌표를 보내자 그는 금방 가겠다며 빠르게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쪽에 거리 둔 헌터들의 기묘한 시선은 여전했고, 지호는 들고 있던 뱀 허물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물러났다.
“다 가져가요. 가공하는 건 좀 힘들 테지만.”
“이것들을 혼자 다 잡은 겁니까?”
“제가 그 정도로 엄청난 헌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고작 며칠 전에 제가 대형종 하나에 쩔쩔매는 걸 보셨잖아요.”
이형 에너지가 물결처럼 퍼지는 감각이 피부에 잡힌다. 금방 온 걸 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박 팀장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대치 상태인 헌터들 사이에 나타났다. 양쪽을 번갈아 본 그는 한숨과 함께 우선 이지호 헌터의 상태를 확인했다.
“멀쩡, 하지 않군요. 다른 다친 곳은?”
“크게 다친 덴 없어요.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그런 것 같아 보이는군요. 지금 균열 내부 캠프는 청라 외부캠프를 안으로 옮겨 둔 게 답니다.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이동형이라 설비가 좀 부족할 수 있어요. 우선 그쪽으로 갑니다. 다른 분들은 원래의 일에 집중하세요. 여기서 눈싸움이나 하고 있지 말고.”
그의 지시에 따라 헌터들이 흩어졌다. 전투가 있던 부근을 조사하는 자도 있고,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며 남은 이형 에너지 흔적을 훑는 자도 있다. 나머지가 무얼 하는지 알아볼 새는 없었다. 익숙한 박 팀장의 에너지가 지호를 감쌌으니.
슬쩍 돌아본 박 팀장은 아프도록 이를 악문 채였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청라 캠프에 도착하여 지호가 마주한 것은 그를 향해 겨누고 있는 군부대의 총기와 전투계 헌터들의 무기였다.
“미안합니다. 임시 조치예요. 다른 사람들 안심시키기 위한 일이니 조용히 따라 주면 고맙겠어요.”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상 범위 안이었고, 박 팀장 본인이 공격 범위 안에 함께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실제로 여기 모인 자들과 싸워 봐야 위험한 건 지호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 지호는 순순히 양손을 들며 웃었다.
“제가 손에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로도 위협적인 거 아시죠?”
“조사만 마치면 괜찮을 겁니다. 헌터가 신체 괴변이 현상을 겪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는데, 안전했던 적이 별로 없어서요.”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니네요.”
“그래도 이렇게 의식 멀쩡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곧 성 팀장이 올 겁니다. 양 박사도요.”
마지막 사람은 안 와도 괜찮은데. 지호는 툴툴거리며 그의 손목에 수갑 채우는 자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오른손에 가 있었다.
“그래요. 안 그래도 물어볼 게 많아요. 할 말도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