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지호는 준우가 즐거워 보인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여왕을 방해하려고 할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었던 그를 직접적인 죽음으로 몰아간 퀸 패러사이트를 말할 때는 주인이니 뭐니 하는 친밀한 느낌을 풍기면서, 저 먼 곳에서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미지의 공포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표한다니.
“전에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었지.”
이상하게 뒷골이 조여 왔다. 아까 달려왔던 놈 때문에 생겼던 두통이 아니었나. 놈이 죽었는데도 통증은 아릿하게 남아 점점 심해지기까지 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단순히 퀸 패러사이트를 위해서만 움직인다면 앞뒤가 안 맞아. 이렇게까지 일할 필요도 없고, 장기적으로 여왕의 호위대를 줄일 필요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했지. 그리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 단순히 언니를 위해서인가? 그렇게만 생각하긴 어려워.”
“내가 네 생각보다 훨씬 녀석을 아끼는 모양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선을 그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나중에 여왕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한 뭐 그런 핑계?”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거야 네 자유지. 준비해라. 간섭이 심해지는 걸 보니 진짜가 오고 있어.”
두통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호가 비틀거리자 승환이 얼른 일어나 팔을 잡아 주었다. 오른손이 없어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행동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오고 있다고?”
대답은 준우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구름이 갈라진다.
지호는 그들이 왜 실내에서 나와야 했는지 깨달았다. 저런 현상이 나타날 정도의 무엇이 도래했다는 것을 밖에 있다면 금세 알아챘겠지만, 실내였다면 늦었을 것이다.
구름이 갈라지고 있었다.
하늘이 쪼개지며 주변 풍경이 일그러진다. 지호는 기겁했다. 아까 호위병의 몸을 통해 나타난 건 손톱만큼도 안 되는 부분이었다. 뭔가가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그쪽으로 공간이 기울어지며 일그러진다. 균열 속에서 균열이 발생하는 것 같은 착각.
“저걸 상대하라고?”
승환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잠겼다. 준우 역시 말이 없다. 턱이 덜덜 떨려 이가 닥닥 부딪쳤다. 괴물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쪽 세계로 침입해 온 모든 괴물의 최상위 포식자.
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무릎 꿇었다.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는 압도적인 힘.
뱀의 몸을 덮어쓰고 튀어나온 것과 마주했을 때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뱀들이 약해졌다고 했던 준우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정과 망치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통증. 그는 머리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신체의 어느 부분도 지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괴물들도 있다. 그러나 공격의 의도가 아니라 도주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인 놈들이다. 지호는 마구 달려가던 어느 놈과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경직이 풀렸다. 주변 색이 본래대로 돌아왔으나 다시 앞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게 여왕이야?”
음, 하고 짧게 신음하는 소리가 난다. 예측하건대 준우 역시 제대로 여왕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황할 리가 없으니. 아까 본 듯했던 기묘한 일렁임이 준우의 목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덕분인지 준우는 짓눌림에 덤덤히 대항하며 서 있었으나 지호는 그러지 못했다. 바들거리며 바닥을 밀어 내려 애썼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승환은 급히 달려와 지호를 번쩍 일으켰다. 그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모양새가 다소 어색해 보인다. 아마 인간이었을 적에, 누군가 승환이 넘어지면 이렇게 챙겨 주었을 것이다.
“넘어졌을 때 울면 안 돼. 툭툭 털고 일어나기.”
지호는 웃어 버렸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승환이 그를 얌전히 내려 주자 지호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호보다 키가 큰 괴물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고마워. 안 울게.”
몸을 오싹오싹 떨리게 하는 존재감은 여전하다. 지호는 임시 포켓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물건 분실을 대비해 새 헌터 전투복 주머니는 전부 잠글 수 있는 형태다. 이리저리 구르고 눌려 금이 가고 깨진 모양새지만 얼굴에 얹을 수는 있다.
감지 파장을 펼치지 않고도 놈에게서 일렁이는 에너지를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이다. 예전 도훈이 보여 주었던 환상 속에선 그저 몸을 강제로 조종당하는 기분만 느꼈었는데.
“내 탈주병, 뒤늦게 돌아온 아이야.”
놈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잘 보니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 망가진 신체. 심지어 현재 진행형으로 부서져 가는 몸이 보였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가서 내가 갈 길을 준비해라.”
또 무릎을 꿇을 것만 같다. 전신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으나 지호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여전히 머리가 금방이라도 쪼개질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온몸의 감각이 소리쳤으나 머릿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작게 속삭였다.
지지 마. 사람으로서 대항해. 이지호, 일어나!
고통 속에서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자 턱이 덜덜 떨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지호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시, 싫어.”
준우와 승환이 둘 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답하자 몸을 짓누르는 기운이 더 강해졌다. 동시에 여왕이 몸으로 쓰고 있는 괴물의 팔이 우득 꺾여 나가는 것이 보인다.
지호는 확신했다. 도훈이 말하기를, 여왕은 이곳으로 넘어오기엔 지나치게 강하고 거대한 존재라고 했었다. 지금 자기 호위대에 현신해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 놈의 부하는 손쓸 수 없이 망가져 가고 있다.
“나는 네 탈주병이 아니야.”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몸의 떨림이 진정된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여왕의 호위대에서 비롯된 몸이라면 여왕의 힘에 관해 알고 있겠지. 몸의 반응과 공포는 거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 진짜 여왕이 이곳에 있나?
“무릎 꿇어라.”
다리가 휘청였다. 진짜로 명령에 따를 뻔했다. 온몸의 이형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온전하지 않은 몸이라 오른쪽 손목이 뜨거워진다.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그쪽으로 질주했다. 통증에 이를 악물며 지호는 본디 존재했던 자기 오른손을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살기 위해선 해야 한다는 감각이 충돌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연신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지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힘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선택하고 결정하자, 재생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손목으로 솟구친 에너지는 흩어지거나 빠져나가지 않고 형태를 유지했다. 준우가 낮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호는 반쯤 꺾인 무릎을 짚고 일어나 똑바로 섰다.
뱀 닮은 괴물의 것이었을 오른손 끝에 새파랗게 손톱 형태의 무기가 맺힌다.
“너는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난 네 탈주병이 아니니까.”
몸을 누르는 압력이 거세진다. 폭풍 속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다. 바늘 비가 내리는 듯 사방이 아프고 조였다. 선글라스 너머의 에너지 일렁임이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화가 났군. 몸에 각인된 옛 기억 때문이 아니어도 추측할 수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지호는 여전히 무릎 꿇지 않은 채 단단히 버티고 서서 놈을 노려보았다.
“감히 네가?”
“그래. 내가.”
놈은 웃었다. 웃음의 대가로 어깨 한쪽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나갔다. 자기가 쓰는 몸이 망가지건 말건 아랑곳없이 여왕이 물었다.
“그래. 탈주병 아닌 자야. 이름이 뭐냐?”
질문 또한 명령이었다. 그것에 따르기를 거부하며 힘겹게 사투를 벌이는 지호를 대신해, 준우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 이름이 없다. 모든 이의 근원이여.”
여왕의 시선이 준우를 향하자 그는 걷어챈 것처럼 뒤로 날아가 벽에 꽂혔다. 고통에 찬 신음. 그러나 준우는 기어코 덧붙였다.
“갓 태어난 것이 자신에게 이름을 붙이려면 자기 존재를 깨닫는 순간이 필요하지. 하지만 이 녀석은 아직 먹은 것과 자신을 분간하지 못해 이름이 없다.”
말을 마친 준우의 귀에서 피가 흘렀다. 지호는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지금 놈을 공격해도 되나? 그것보다 공격한 후에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건가?
절망적일 정도의 차이였다.
한때 균열에서 많은 괴물을 도망치게 하며 상위 포식자로 군림해 봤던 지호다. 자신의 비루함과 보잘것없음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낀 적이 더 없었다. 달아난 괴물들처럼 등 돌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심정으로 내달리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놈과 대화할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기까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여왕의 힘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승환은 지호를 일으켜 주고는 준우의 뒤에 숨어 있었다. 사실 숨는다고 숨겨질 체격은 아니었으나, 앞에서 누군가가 버텨 준다는 것만으로 저항하기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 그가 붕 날아가 버린 뒤에 그 힘에 고스란히 노출된 아이는 당황하다가 지호 뒤로 달려왔다. 용케 뛰어다니는구나. 지호는 어이도 없고 재미있기도 하여 피식 웃었다. 그러자 조금 힘이 돌아왔다. 여왕에게 물을 수 있었다.
“너는 이름이 뭔데?”
여왕의 몸이 우득우득 꺾이더니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놈의 몸이 마지막으로 꺾였는데, 웃음소리 같은 걸 들은 기분이었다. 호위대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 회복되기 어려운 상태로 전락한 뒤 풀썩 쓰러졌다. 몸을 짓누르던 힘도, 사방의 이형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듯한 기형적인 공간도, 깨질 듯한 두통도 사라졌다.
지호는 그제야 풀썩 주저앉았다. 승환은 황급히 달려가 벽에 처박힌 준우를 끌어냈다. 도준우는 맥없이 늘어져 있다가 힘겹게 기침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침식되지 않았군. 놀라운 일이야.”
“이름이 중요해?”
준우는 여왕의 표적이 되면서까지 지호가 입 여는 것을 막았다. 사전에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준우는 자기 상태를 점검하며 치유 능력으로 고장 난 곳들을 복구해 나가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지호는 공포의 여운으로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호위대에게 다가갔다. 쓰러져 정신을 놓았으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모양이 되었는데도 살아 있었다.
여왕은 호위대라 불리는 것들을 이용해 이쪽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호위대가 그 존재와 힘을 버티지 못해 망가지자, 놈이 완전히 죽기 전에 여왕은 이곳을 떠났다.
그러면 그럴 놈들이 없어지게 되면, 여기에 손을 뻗지 못하지 않을까?
사람의 것이 아닌 지호의 오른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괴물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을 구른다. 지호는 낯설고 시퍼런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준우는 지호가 호위대의 목을 친 것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손을 재생한 것에 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여기서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몸 한쪽이 불균형하니까 힘을 쓸 수가 없었어. 그대로 여왕에게 넘어가기라도 했어야 했단 말은 아니겠지?”
불가항력이다. 준우 역시 여기서 여왕의 힘을 이렇게까지 마주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더니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본래 의도와는 좀 다르지만, 호위대 놈들이 나타나긴 나타났고, 네 위치를 파악한 여왕도 나타났군. 살아 있는 게 천운이다. 그래도 한 놈 더 잡았으니 마무리가 머지않았어.”
“호위대를 다 잡아 족치면 여왕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해?”
“그럴 거라고 추측하곤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저쪽 상황을 아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이름은 왜 안 되는지 안 알려 줄 거야?”
준우는 타격받은 부분을 재생한 듯 어깨 쪽 옷소매로 귀를 대충 쓸었다. 흘러내린 피가 아무렇게나 묻어나지만 별로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에 널 만났을 때도 알려 줬던 것 같은데. 이름에는 힘이 있다. 내가 그 녀석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왕이 내 이름을 알면 날 조종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건가?”
“최악의 경우에는 방금 나타난 것 같은 방식으로 네 몸을 이용할 수도 있어. 여기가 아닌 너희 사는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