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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71화 (172/260)

171화

그럴 힘이 없는 사람도 있다.

마음만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호는 각성자가 되고 싶다고 하던 승찬과의 옛 기억을 떠올렸다. 각성자였다면 동생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르니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 그때는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이해되며, 어떤 표정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점점 더 어렵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먼 곳에서 끼에엑 하는 긴 비명이 들린다. 뱀 닮은 괴물의 울음과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죽기 직전 내뱉는 소리 같이 느껴진다는 점일까.

둘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짐 덩이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지만, 승환이 힘겹게 상대한 놈을 한 번에 여럿 마주친 도준우가 과연 무사할까.

일부러 내는 듯한 발소리가 복도를 느릿하게 울렸다. 배로 바닥 미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만으로 승환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당연히 이겼을 거야. 준우 형은 항상 이겨. 나한테 싸우는 법도 알려 줬어.”

“도준우가 좋니? 너희 형만큼?”

“우리 형처럼 좋아. 아주아주 멋있고 세잖아.”

붕붕 흔들리는 꼬리로 이제 날아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다 부서진 철문을 발로 밀치며 도준우가 나타났다. 구형 전투복에 상한 부분 하나 없다. 장님이라면서 뭘 어떻게 싸우는 건가?

옛날 보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가 당연히 신체 계열 퓨어 헌터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퀸 패러사이트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는 변했을 것이고, 지호에게 뿌린 치유 능력도 있으니 싸우며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언짢은 상대로 거듭났을 것이다.

“도중에 놈들의 눈이 한 번씩 돌아갔어. 그중 하나가 아래로 내려갔는데, 추측하기론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을 것 같군. 별일 없었나? 특히 너는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준우의 팔이 피투성이였으나 상처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의 피는 아니다. 준우는 지호의 시선이 자기를 훑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둘에게 걸어왔다. 밖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빛마저 등지자 준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기묘하게 일렁이는 무언가가 언뜻 비추었는데, 마찬가지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쪽은 여왕한테 저항할 수 있나 보지?”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미 존재하니까. 심지어 이쪽으로는 여왕보다 뛰어날지도 모르지.”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느낌으로 준우가 답을 내놓자 승환은 꼬리를 맹렬히 흔들며 말을 얹었다.

“형이 뱀 많이 잡으라고 했었거든. 옛날엔 수가 되게 많았는데 지금은 줄었어. 평소보다 좀 빠르긴 했어도, 이 정도야 가뿐하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놈들의 머릿수가 더는 채워지지 않아. 약한 놈들은 도태되어 죽었고 강한 놈들은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어 죽었지. 지금 있는 건 어정쩡한 놈들뿐이야. 그만큼 겁도 많고. 아마 여왕이 나타났다 해도 현신을 오래 버틸 놈은 얼마 없을 거다.”

“그쪽이 놈들을 사냥할 만큼 강한 줄은 몰랐는데.”

“그간은 내가 잡은 게 아니야. 이 꼬맹이의 식량으로 적절한 것이 뱀들이었을 뿐.”

승환의 꼬리가 살랑인다. 준우는 벽을 대충 더듬다가 한곳을 두부처럼 으깼다. 무너져 내린 벽에 설치된 수도관이 보인다. 그걸 약간 비틀자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물이 치솟았다.

승환이 물이 싫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 물러나자 몇 방울의 물이 지호에게 튄다. 습관처럼 오른손을 내밀었던 지호의 뭉툭한 손목 끝에 물이 맺혔다.

“놈들이 나를 쫓아온 이유가 뭐야?”

“너는 여왕이 잃은 것 중 하나에서 태어났으니까. 아마 다시 접촉하면 연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놈만의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퀸 패러사이트 같은 방식?”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배가 좀 부르긴 하지만…….”

핏물을 어느 정도 닦아 낸 준우는 폭삭 젖은 꼴로 손짓했다. 승환은 정말 질색하는 얼굴로 반대편 벽에 바짝 들러붙더니 최대한 그쪽에 밀착해 부서진 쪽으로 도망쳐 나갔다. 지호는 그냥 물줄기를 맞으며 걸었다. 나중에 공사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좀 들었다.

“놈이 나를 탈주병이라고 불렀어.”

“여전히 자기 권속이라고 생각할 거야. 여왕은 그의 호위대를 수족처럼 부리지. 너는 말 안 듣는 팔이 아닐까 싶은데, 지금은 확실한 단서가 없어 짐작뿐이군.”

밖에는 찢긴 괴물 시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방이 붉으니 속이 다 울렁거린다. 승환은 아깝다는 듯이 주변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먹을 것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일까? 지호는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정체 모를 누런 액체에 담긴 눈알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결국, 지호는 헛구역질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꼭 이렇게 더럽게 펼쳐 놔야 해?”

“용건이 끝났잖아. 이건 일종의 영역 표시야. 이제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여기로 기어들어 오려고 하진 않겠지.”

“뭐가 기어들어 오는 걸 막는 건데?”

“여긴 일반 균열이잖아. 크기도 상당하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진화한 놈들이 기어들어 올 텐데, 지금 너희 기준으로 분류해 놓은 것보다 훨씬 세밀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들이 많거든. 가끔은 나도 까다롭지. 그래서 여기 이런 짓을 벌일 만큼 무지막지한 놈이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거야. 피차 귀찮아지기 전에.”

여전히 친절한 설명이다. 물론 저런 쓸데없는 곳에서만 친절하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지호를 비롯한 각성자들의 능력은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된다. 그러나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로 능력 활용법이 나뉘고, 가끔은 그 분류로 줄 세우기 어려운 능력도 있을 법했다. 그러나 함께 싸우기 위해 대부분은 다른 이들에게 맞추어 능력을 개발한다. 지호가 방벽을 만들고 에너지 화살을 쏘아 올리는 전투 방식을 배운 것처럼.

“정체 불분명한 것들을 막고, 여왕의 호위대를 잡아 족치고,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야?”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

지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준우는 여태 본 것 중 제일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덧붙였다.

“여왕놈의 침략 계획에 어깃장을 확실히 놓았다는 그 또렷한 감각이겠지?”

“퀸 패러사이트를 위해서?”

“내 행동의 근거에 주인의 안위도 분명 포함되어 있겠지. 기본적으로 거기에 기생해서 살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어떤, 인간이었던 시절에서 기인한 행동의 원인은 단순해. 뭔지도 모르는 새끼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삶을 뒤흔들고 생을 좀먹었는데, 내가 그 새끼 계획 하나 망가트리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준우가 즐거워 보이자 승환 역시 덩달아 즐거워했다. 말하는 뜻은 제대로 이해하고 웃는 건지 모르겠다. 역겨운 시신들 틈에서 물에 푹 젖은 채 환하게 웃는 미남이라.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었는데.

문득 두통이 밀려왔다. 속이 도로 안 좋아지기까지 했다. 지호는 현기증을 이기려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플 이유가 있을 리가.

“둘 다 정신계 능력에 저항할 수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승환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준우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 내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주인이니 그보다 약한 능력은 내게 피해를 주지 못해. 뭔가가 다가오고 있나?”

“몰라. 나는 그냥 뭐가 있다는 것 정도밖에 느낄 줄 몰라서. 근데 당신 본인이 정신계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

파다닥. 무언가가 발소리를 숨기지도 않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기 뿌려진 것들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멀쩡한 놈이 아니라는 증거일 텐데. 지호는 눈치를 살피다 감지 파장을 뻗었다. 잡히는 게 없었다. 이제 짐작하기 어렵지도 않았다. 신체 계열 능력만 있는 놈이든가, 아니면 지호가 모르는 종류의 능력이 있는 괴물이겠지.

놈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팔짱을 낀 채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도준우마저 혀를 내둘렀다. 승환이 놈의 생김새를 묘사해 준 다음이었다.

“개중에 이형 에너지에 과격하게 반응하는 놈들이 있지. 그런 것들은 빨리 변해. 조건이 맞아 각성자가 되었다면 아마 힘깨나 쓸 줄 아는 인재가 되었을 텐데, 너희에겐 아쉬운 일이지.”

“뭐야. 저게 뭔데?”

지호가 ‘저거’라고 굳이 표현할 만큼 기괴한 모양새. 팔다리로 바닥을 짚으며 달려오는데 배가 위를 향해 있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줄줄 흘러 그것이 아래에 있는 코에 들어가는지 계속 기침을 해 대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입 안이 시뻘겋다. 흘려 대는 침에도 그것이 섞여 나왔다.

“각성자들처럼 특수한 방법으로 힘을 얻는 일도 있지만, 균열로 넘어와 다른 것들의 먹이가 되지 않는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저런 과정을 거치지. 인지 능력이 퇴화하고 특정 감정 하나에만 미친 듯이 집중해.”

“괴물에게 먹히지 않아도 괴물이 되는 세계란 말이야?”

“신체 계열로 각성하면 몸을 유지할 수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야.”

승환 역시 저런 과정을 거쳤을까? 아니면 모두의 변이가 가지각색으로 일어나기에 저런 괴물 또한 존재하게 되는 걸까.

일전에 다른 균열에서 보았던 자살한 괴물이나 처음 남동구 균열에서 마주쳤던 정체 모를 남자도 아마 저런 종류인 모양이다. 이형 에너지 관련 능력이 없으니 지호의 힘에 탐지되지 않지만, 동시에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 맹목적인 감정에 무작정 몸을 던지고 마는.

“괴물이구나. 괴물이 되어 버리는구나.”

팔다리로 달리는 모양새가 기괴하다. 무작정 기어 와 시체 중 덩어리 큰 것 하나에 머리를 파묻은 놈은 제대로 숨 쉬지 못해 요란히 기침하면서도 쩝쩝 소리 내며 살을 파먹었다. 준우는 간단히 정의했다.

“크게 다치는 곳이 없으면 꼬맹이처럼 의식을 가진 채로 천천히 변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멀쩡히 살아남는 건 힘들고, 일반적으로 저런 종류는 크게 다친 후에 가장 강한 감정을 쫓아 형질이 발현된 경우지. 아마 이 균열에서 죽은 놈은 아닐 거다. 다른 것들에 휩쓸려 넘어왔을 거야.”

“괴물이 되지 않을 수는 없어?”

“그러지 않으면 보통 먹이가 되니까. 변해서 살아남거나 변하지 못해 잡아먹히거나 둘 중 하나지.”

준우의 대답에 지호는 거꾸로 기어 다니는 괴물을 한참 바라보았다.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마 저런 것이 되어 돌아다니는 괴물을 본다면 그를 그리워하던 실종자 가족들조차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균열에서 가족을 잃고, 차라리 가족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어.”

지호의 시선이 승환을 스쳤다. 아이는 신체 계열이라 입 붉은 것들처럼 미친 상태가 아닐 터였다. 그나마 말이 통하고, 그나마 인지 능력이 있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런 앞뒤 가리지 않고 피아 식별도 되지 않는 괴물로 변한 자들의 가족들은 기분이 어떠할까. 그들 또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안도할까.

아니면 이런 소식을 가져온 지호를 원망할까.

“아니지. 괴물이 되지 않는 자들이 있기는 하군.”

지호와 승환이 둘 다 준우를 바라보았다. 특히 승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닥을 죽죽 그었다.

“하지만 그게 제일 나빠. 아무도 먹지 않으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그냥 사라져.”

“사라진다고?”

“균열에 오래 머물면 몸이 약해진다는 말을 들어 봤나?”

아는 이야기다. 몸이 약해지는 걸 막기 위해 각성자 연합에서 발명한 시제품이 한때는 지호 손목에 걸려 있었다. 손과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알지. 언니가 그 현상에 가까워져서 되도록 균열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벌써 그렇게 됐나.”

“사라진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다. 이형 에너지가 존재를 흩어 버리는지 에너지로 돌아가는 건지 정확히는 몰라. 뭔가 실질적인 연구가 가능한 환경도 아니니까.”

큰 덩어리를 집어삼킨 괴물이 다른 시체로 몸을 옮기려 했을 때 준우는 승환에게 손짓했다. 지호를 매달지 않은 가벼운 몸짓. 허공을 박찬 몸이 빠르게 쇄도해 놈의 몸을 내리찍었다. 질척거리는 믿기 힘든 소리가 나고, 괴물은 자기가 먹은 것 이상의 부피를 가진 살덩이로 전락했다. 끝이었다.

“이제 더는 안 올 거다. 저런 놈 하나 보내 놓고 괜찮나 살피려는 것들도 있었을 거야.”

“여왕의 호위대까지 잡았는데 뭐가 더 올 수 있는데?”

“호위대를 잡았으니 본인이 와야지.”

지호는 놀랐다. 여왕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넘어왔어야지.”

“그건 맞는 말이야. 내 말은, 남아 있는 뱀 중에 여왕의 현신을 버틸 수 있는 강한 놈이 없지 않다는 소리지. 그걸 기다리고 있어. 너희와 마주쳤을 때 이야기를 듣자니 마지막에 택할 패를 정한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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