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승환은 지호에게도 괴물의 다리 중 하나를 뜯어 건네려 했으나 준우에게 제지당했다. 어차피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배척하니 어이가 없었다. 준우는 멀쩡히 피 떨어지는 다리를 우물거리며 말을 얹었다.
“네가 인간인지 괴물인지 헷갈린다면 절대 괴물을 먹지 마라. 호기심에라도 먹지 마. 누가 맛있다고 권해 줘도 먹지 마라. 네 존재에 더 혼란을 얹어 줄 뿐이니.”
“퍽이나 도움되겠네.”
지호는 이제 준우를 존중하길 포기했다. 그가 욕설을 퍼붓건 극존칭을 쓰건 아마 준우는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보현뿐일 테니.
준우와 승환이 꽤 큰 괴물 하나를 날것으로 뜯어 먹는 모양새를 보는 지호의 머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구슬 비가 그친 뒤 균열은 평소처럼 고요해졌다. 그러나 준우의 말대로라면 특정 기생 개체에 잠식되어 멋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놈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뜻 아닌가.
위험을 무릅쓰고 감지 파장을 퍼트리자 주변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몇 놈이 잡혔다. 두어 번 확인했는데도 그 자리 그대로다. 정신 방벽 없는 놈들이 구슬 비에 노출된 모양이었다.
“저 하얀 연기에 먹히면 뭐가 되지?”
“다른 뭔가가 되지. 정신력이 약해져서 먹은 것들 중에 다른 게 튀어나오기 쉬워.”
“저 연기에 당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엄청난 것이었으면 자연 현상보다는 포식자에 가깝겠지? 지금으로선 여왕의 호위대 놈들을 약화시킬 유일한 방법이야.”
“그런 거면 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확실한 미끼 없이 이 비구름 아래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여왕이 너를 찾고 있어. 주인에게도 네 신병을 확보할 시 목숨은 붙여 놓으라고 요구하더군.”
망할 여왕 같으니. 다른 놈들을 통해 드러날 때 눈깔이 새빨갛게 변한다는 걸 제외하면 여전히 오리무중인 존재라 어떻게 피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지호가 아는 모든 괴물이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최상위 포식자.
식사를 마친 둘은 적당히 배를 채우곤 근처에 괴물 시신을 뿌렸다. 이유를 묻는 지호의 시선에 이번에는 승환이 입을 열었다.
“약한 괴물들이 근처에 돌아다녀야 해. 그래야 네가 약해진 거라고 생각하고 다가올 거야.”
“힘의 세기도 가늠 못하는 약한 놈들? 그런 거로 속을 만큼 여왕의 호위대가 멍청한가 보지?”
“붉은 눈이 아닐 때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식사 자리에는 동석했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는지, 승환은 지호의 빈 왼손에 어디인지 모를 부위를 하나 쥐여 주었다. 물컹하고 끈적이는 감각이 최악이었으나 지호는 억지로 웃었다. 어린애가 뭣 모르고 하는 짓에 화내는 건 어른이 할 짓이 아니었다.
“걱정 마. 준우 형은 맨날 말만 저렇게 해.”
“진짜로 이용하는 거야.”
“큰일 없게 내가 지킨다. 환이 믿어.”
준우가 무신경하게 한마디 툭 끼워 넣긴 했지만, 아무튼 어린아이가 분명한 이 괴물이 하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다정해 지호는 눈시울을 붉혔다.
준우는 이 애가 괴물에게 먹혔다가 그걸 뚫고 나오는 방식의, 자기 같은 괴물은 아니라고 했었다.
“균열에 오래 있었니?”
“백 밤 넘게.”
“어떻게 이렇게…….”
“키 많이 커서? 잘 먹고 잘 자면 돼. 엄마 아빠가 그런 것도 안 알려 줘?”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백 가지도 넘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는 말을 아꼈다. 아이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죽지 않은 것만도 천운이다. 어쩌면 아직 인간일 적부터 준우가 아이를 거두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따르려고.
“준비해. 우리가 너를 데리고 있음을 알아채라고 일부러 느리게 움직였어. 정찰대가 돌아갔으니 놈들이 곧 들이닥칠 거다.”
“뭐? 아직 싸울 수가…….”
“싸우는 건 네가 아니야. 다리는 멀쩡하니 도망갈 준비나 해.”
부근을 훑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감지 파장.
온몸의 세포가 바짝 일어났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하며,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왔다. 짐승이 된 기분이다. 애석하게도 사냥꾼보다는 사냥감의 기분을 절절히 실감하며, 지호는 초식동물처럼 부근을 훑었다. 감지 파장은 한 종류가 아니었다. 발산 위치가 어림잡아 짐작된다. 다가오는 놈이 셋 이상.
감지 파장의 강도가 빠르게 올라간다. 이런 것도 컨트롤할 수 있었다니. 지호는 욕설과 함께 벽에 바짝 붙었다. 아직은 전기까지 들어올 정도로 멀쩡한 건물이다. 곧 망가지겠지만.
쿵. 묵직한 뭔가가 옥상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세입자들이 층간 소음으로 고통깨나 받았을 건물 구조가 이번만큼은 도움이 됐다. 발소리가 들릴 턱이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놈들은 발이 아니라 배로 움직일 테니.
퉁. 투둥. 철판 눌리는 소리가 한쪽에서만 들렸다. 지호는 금세 상황을 추측했다. 환기구 같은 것을 지나고 있는 모양이다. 소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으나 방향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건물을 부수고 들어올 생각은 없나 보군.”
“실내로 들어오는 쪽이 남은 구슬 피하기도 쉬울 테니까. 환아. 맡아라.”
이형 에너지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힘을 줘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팔이 뒤틀리는 것 같았으니. 지호가 쓸 수 있는 건 치유 능력과 감지계 능력이 전부였다. 그마저 후자는 놈들에게 역추적되니 사용해선 안 됐다.
승환이 지호를 어깨에 짊어졌다. 조금만 거칠게 움직여도 통증이 밀려왔다.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놈들이 나를 노리는 이유가 뭐야?”
“우리랑 똑같지. 너희 세계로 넘어가려고.”
챙강. 어디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난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예리하게 방향을 잡아챈 지호와 준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승환은 뒤늦게 둘을 따라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준우 형, 뱀이랑 싸울 수 있어?”
“어느 정도는.”
“그런데 왜 여태 안 싸웠어?”
“주인이 원하지 않아서.”
고작 삼 층 높이밖에 되지 않는 아파트 상가 건물이다. 숨을 곳도 없고, 싸울 곳은 더더욱 없다. 좁은 곳에서 마주치면 곤란하지 않나? 준우의 손짓에도 승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싸워도 되는 거야?”
“선택지가 없어. 신체 계열 특질을 타고나지 않은 자들은 균열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지. 내 주인을 비롯해 여왕이 사냥하지 않고 임의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들은 다 그래. 이제 가라. 제발.”
승환은 훌쩍 몸을 날렸다. 발 한 번 디딜 때마다 통증이 동시에 밀려와 토악질이 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 번에 뛰어내려 반 층을 순식간에 내려온 승환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지호의 몸이 경직되는 걸 느낀 승환은 거기 오래 서 있지 않았다. 감지 파장이 몇 차례 건물을 훑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신지. 준우가 몇 놈과 싸우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이쪽으로 오는 놈은 하나였다.
“작은 헌터야. 나한테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뭐? 아니, 어떻게?”
“목 잡아도 돼.”
승환은 지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며 자세를 잡았다. 엉겁결에 왼쪽 팔과 다리로 그에게 업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 버린 지호는 샤아악, 날카로운 울음이 상가 복도에 울리는 것을 듣고 굳었다.
다행히 붉은 눈은 아니었다. 그것마저 똑같았다면 멀쩡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뱀은 아니지만, 신화 속 메두사와 닮은 괴물이었다. 쉭쉭거리는 소리와 날름대는 혓바닥을 보니 꼬리만 뱀 과는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 하얀 거 할머니라고 했지만, 데려가려고 하면 때려야 해. 환이 나쁜 애 된다. 그러니까 오지 마.”
그런 말을 들어 줄 리가 없다. 놈은 빠르게 도약했다. 배를 웅크렸다 튕겨 오르는 속도가 일전에 만났던 금속 먹는 놈과 비슷한 정도였다.
놀랍게도 승환은 몸을 비틀어 피함과 돌진을 동시에 해 놈의 꼬리를 쾅 내리찍어 밟았다. 밀착해 있던 탓에 승환의 근육이 변형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삽시간에 날카로워진 손이 놈의 꼬리를 단박에 끊어 냈다. 퍼런 피가 튀며 격렬한 비명. 또 달려드는 놈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한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윽, 잘 싸워?”
“뱀 많이 먹었어. 준우 형한테도 배우고.”
구슬 비 내리는 지대에 살며 여왕의 호위대를 많이 만나 본 모양이었다. 두어 번 달려들어 꼬리가 점점 짧아진 놈은 괴로움에 하반신을 뒤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처음과 다르다. 다른 놈들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
승환은 지호를 목에 달고 있어 거칠게 움직이진 않았다. 운신 범위가 좁은 것을 눈치챘는지 호위대는 달려들자마자 곧바로 급소를 내리찍고, 부딪쳐 피하기 무섭게 벽을 박찼다. 벽과 천장을 이용해 쇄도하는 움직임은 예전에 지호가 허공을 발판 삼아 도약하는 공격은 어떠냐며 주리 앞에 선보였던 것과 비슷했다. 허점이 많지만, 속도로 보완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내가 생각해 낸 게 아니라, 원래 이놈들이 할 수 있는 공격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놈의 공격이 지호를 향하자 승환이 무리해서 몸을 틀다 팔뚝을 쭉 찢겼다. 놀란 아이는 비명과 함께 놈을 공격했다. 엉겁결에 지호 역시 위험에 노출된다.
그 틈을 노리고 짧은 꼬리로 뒤를 쳐 오는 걸 발로 걷어찬 지호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승환은 뒤늦게 지호의 존재를 상기하곤 놈과 다시 거리를 뒀다.
“깜빡할 뻔.”
“잊지 말아 주라…….”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은 상태라 통증이 두 배였다. 이걸 놓으면 튕겨 나가고 잡고 있으면 내내 아프다니. 지호는 욕이란 욕은 다 삼켜 대며 도로 승환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찰싹 달라붙었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덜 힘들었다.
크아악, 하며 달려든 놈을 고개 숙여 피하느라 지호의 다리가 꽉 눌렸다. 승환은 아차 하며 다시 일어나려다 놈의 긴 송곳니에 팔을 물릴 뻔했다.
“작은 헌터, 걸리적댄다.”
“도준우가, 어! 잘 보랬어!”
“나도 알아!”
바닥에서 위로 솟구치는 공격을 피하려다 지호가 벽에 걸렸다. 켁,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멈추어 도리어 운이 좋았다. 예기치 못하게 옆에서 치솟아 오른 꼬리. 어느새 복구된 모양이었다.
“망할 뱀 새끼들, 빨리 안 잡으면 다시 자라.”
뱀의 손톱을 감싸며 시퍼런 이형 에너지가 칼날처럼 튀어나왔다. 지호가 쓰던 방식이다. 온갖 것이 비슷하다 못해 똑같았다.
놈에게서 다시 자란 꼬리는 처음 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뒤에 돌이 달린 것처럼 울퉁불퉁하다. 그걸 휘두르니 흉기가 따로 없었다.
승환이 채 피하지 못한 일격을 지호가 등판으로 대신 얻어맞았다. 손톱이 아니라 꼬리라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숨도 못 쉬게 아파 눈물이 핑 돌았지만, 뚫리지 않은 게 어딘가.
“원래는 금방 잡는데!”
구슬 비 속에서만 상대해 오던 놈이 빨라져서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처음 건물로 들어왔을 때는 속도가 느리고 판단이 둔한 것 같았는데 싸우면 싸울수록 기세가 날카롭다 못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베일 것 같았다. 재차 벽을 수차례 튕기며 해 오는 돌진.
지호를 보호하며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아이는 눈을 굴렸다. 도주 경로 천장, 아니 그보다는 아래쪽. 하지만 양쪽 꼬리 싸움은 뱀 쪽이 좀 더 유리한데.
오래 머리 쓸 시간이 없다. 승환은 에라이, 하며 바로 옆 철문 경첩을 박살 냈다. 아니 보통은 손잡이를 부수지 않나? 의문을 제기할 새가 없다. 앞으로 몸을 굴린 탓에 지호까지 덩달아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며 창밖에서 한 놈이 실내로 뛰어들었다. 창틀에 남아 있던 흰 연기 담은 구슬 몇 개가 툭툭 바닥을 구른다.
앞뒤로 뱀이 두 마리.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