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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66화 (167/260)

166화

경악한 얼굴에 다급한 감정이 스쳐 간다. 가까웠기에 지호의 감지 파장에 이주원 각성자의 에너지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때 속절없이 붙들려 갔던 지호지만, 이제 이동 능력자의 힘을 어떻게 막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주원은 그를 짓누르는 힘 때문에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뭉치려던 에너지가 중심을 잃고 흩어진다.

재차 모이려는 힘을 다른 이형 에너지를 끌어모아 후려친 지호는 서슬 퍼렇게 빛나는 에너지를 뾰족하게 날 세워 주원의 목 부근에 가져다 댔다.

“어딜 감히 튀려고 해요?”

“튀다니, 그럴 리가…….”

감지 파장을 넓게 펼 수 없는 대신 눈에 힘을 집중한 덕에 타인의 에너지 흐름이 선명히 보였다. 지호는 또 중심으로 모여드는 이주원 각성자의 에너지를 보며 그의 목덜미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거침없는 솜씨와 함께 이주원 각성자 목 뒤편 벽이 찰흙처럼 떨어져 나갔다. 집중력을 잃은 힘이 구심점을 잃고 애매하게 맴돌다 떨어진다. 주원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하. 화 많이 났어요?”

“또 도망가려고 하면 다음으로 떨어지는 건 벽이 아니라 이주원 각성자님의 신체 어딘가일 거예요. 제가 치유 능력 보유자인 건 아시죠? 붙였다 뗐다 잘할 수 있어요. 의심 가면 한번 시도해 보시든가.”

주원은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옆에서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김 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임보현 헌터처럼 자라지 않기를 바랐는데.”

“무슨 말이래요, 그게. 김 반장님도 이 새끼랑 한패예요? 이거 아주 상습 납치범이에요. 심지어 이번엔 약물까지 썼다고요.”

김 반장의 시선이 빠르게 지호의 뒤쪽 수상한 연구실을 훑는다. 병실 같기도 하고 실험실 같기도 한 장소. 침대 옆에 걸린 주사액은 푸르스름한 빛깔이다. 어떤 병원에서도 저런 걸 본 일이 없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금유빈 박사가 이 작전에 찬성했나?”

“만든 사람의 의도와 사용자의 의도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다이너마이트 이전에도 이후에도 꾸준히 있었던 일이지 않나요?”

“찬성하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군. 대원, 몸은 어떤가?”

“각성할 때보다 더 이상해요. 사랑니 뽑을 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것보다 여기 건물에 가득 찬 정신계 트랩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어요.”

김 반장의 얼굴에 뜻밖이란 감정이 빠르게 스친다. 그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반가움이었다.

“정신계 능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게 됐군. 잘된 일이야.”

“저항이고 뭐고 좀 봐 줘요. 특수반 사람들 작품이라면서요. 반장님이 말 한번 해 주면 끝나는 거죠? 빨리 이 새끼 잡아다 어디 처박든가 해요. 이동 능력이라곤 납치밖에 쓸 줄 모르는 범죄자예요. 미성년자 납치범에 불법 약물 투여에 감금에 골고루 했다고요.”

“아냐, 들어 봐요.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쿠르릉. 다시 바닥이 흔들린다. 대형종이 가까워졌나? 갑자기 싸르르 등을 타고 오르는 불길한 감각이 있다. 지호는 자기 감각을 등한시하지 않는 헌터였다. 사방을 살피기에 앞서 직관적으로 손부터 뻗는다.

멱살 잡힌 김 반장은 반항할 새도 없이 지호 뒤편으로 던져졌다. 당장 잡을 것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마자 뒤쪽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뭐야? 하는 욕설 섞인 질문 뒤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와자작, 와작. 건물 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지호는 일전에도 이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금속 먹는 놈이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이 상태로 혼자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이 벅찬 놈이었다.

“이봐요, 이 건물 전체가 무슨 특수 처리된 곳이에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동 능력을 막는 정도의 일반 센터용 처리 정도나…….”

“그게 특수 처리잖아요!”

기술력이 집약된 벽 한쪽이 빠르게 사라진다. 지호는 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주원의 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저놈은 사람보다 금속을 좀 더 선호하긴 하지만, 헌터들이 가진 복잡한 기기라면 선호하지 않는 사람 살 같은 게 같이 씹혀도 상관하지 않는 미식가예요. 균열 내부에서 마주쳤다 죽을 뻔했어요. 도망가야 해요.”

“뭐? 여기를 나가? 지금은 안 돼요.”

“먹히든가 튀든가 골라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조태양 헌터가 있을 때는 그를 받쳐 줄 사람이 있어 차라리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 김 반장은 전투에 적합한 인원이 아니고, 이주원 각성자는 헌터조차 아니다. 전투 교육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괴물이 무아지경으로 씹어 대던 특수 벽에서 입을 떼고 이쪽으로 아가리를 돌렸다. 사방에 돌기처럼 튀어나온 이빨들. 무슨 단단한 금속인지 온갖 것들을 전부 씹어 대는데도 멀쩡하다. 몸이라도 정상이었다면 어떻게 상대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지호가 친 방벽을 향해 총알처럼 뛰어든 놈의 힘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지호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고, 괴물은 한 번 더 튀어 오르려고 몸을 바짝 당겼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새끼들하고 싸우는 건 내 전문이 아니야.”

괴물이 움찔거리며 사방 좌우를 살피기 시작한다. 머리를 망치로 치는 것처럼 아프던 감각이 사라졌다. 김 반장이 놈을 향해 팔을 뻗은 채 소리쳤다.

“여기 깔린 트랩을 놈한테 뿌린 거다. 근래에 비슷한 걸 겪지만 않았으면 금방은 못 벗어날 거야.”

“저게 다른 놈이면 모르겠는데, 저하고 만났던 놈이면 저런 상황을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정신계 공격으로 한 번 정신을 빼놓은 적이 있어서.”

“뭐? 젠장, 태양이놈 짓인가? 이주원! 안 움직이고 뭐 해!”

도플갱어가 한 일이었으나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다. 연구원들이나 김 반장 앞에서, 심지어 지호 앞에서조차 능글맞은 태도를 숨기지 않던 주원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을 기었다. 또 트라우마 반응이다. 괴물 앞에선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균열에서 뭘 하겠다고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지호는 힘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팔로 벽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비전투 계열 헌터와 일반인에 가까운 각성자가 하나.

지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데서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삶은 정말 이상해. 그렇죠?”

금세 트랩을 떨쳐 낸 괴물이 다시 뛰어든다. 지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놈을 피했다. 벽에 구멍이 난다. 충격 때문에 몇 바퀴쯤 앞으로 굴렀다. 건물을 빠져나간 놈이 다시 금속을 마구잡이로 삼키며 방향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계 파장이 사라지자 망설임 없이 감지 파장을 뻗는다. 놈이 지호의 기운을 곧장 잡아채는 걸 알 수 있었다.

“반장님, 저놈이 노리는 게 아마 제 슈트 같아요. 당장 이걸 벗을 순 없고, 이게 없다고 해도 우릴 안 노릴 거란 보장도 없어서 우선 유인할게요.”

“뭐? 너 지금 약물에 찌들었다고 했잖아. 제정신이냐?”

“여기서 건물 다 부수며 저놈 상대하는 것보단 밖에서 아무것도 없이 만나는 게 훨씬 편하겠어요.”

빠르게 가까워지는 놈의 기척이 읽혔다. 지호는 바닥을 벌벌 기는 주원을 노려보았다.

“고작 한 놈 앞에서도 저런 반응이라 균열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이런 특수 처리된 건물 안에 숨어서 음모나 꾸며 댔을 거고요. 돌아와서 책임을 물을 거예요. 그때도 도망가면 전양련이란 이름의 집단이 멀쩡히 발붙이고 있지 못할 거라고 전해 줘요.”

“전하긴 뭘 전해. 네가 직접 말해.”

“반장님을 조금은 의심했었어요. 완전 악의 무리가 아니셔서 기뻐요.”

그의 대답을 들을 새가 없었다. 지호는 금속 먹는 괴물이 부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날아갔다. 바닥 뚫고 나온 놈이 괴이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지호를 따라 방향을 꺾는다. 날 줄은 모르는 놈이라 다행이었다. 지호는 고도를 유지하며 그를 감금했던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얀 칠 되어 있는 건물. 멀쩡해 보이는 도심지 한가운데였다.

몸이 물 잔뜩 먹은 솜처럼 묵직하다. 지호는 전신에 방벽을 두껍게 친 채 괴물의 습격을 기다렸다. 무기 하나 없다. 가진 것은 오로지 몸뚱이 하나뿐.

그러나 괴물들 역시 그러하기에 불공평한 싸움은 아니다.

고도를 높여도 고층 건물에 파고들어 튀어나오는 방식의 충격을 버틸 수 없어 몇 번을 떨어졌다. 하필 도심지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일전 공장 근처에선 거길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했었는데.

방벽 두께가 갈수록 얇아진다. 힘이 충분치 않았다. 기절해 있던 시간 동안 몸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균열 내부라 자연 치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해 와서 기절시킨 채로 두어야 하는 헌터를 치료기에 넣어 주는 정성 또한 없었을 것이니 그대로 방치되었겠지.

지호의 몸 상태는 키클롭스들과 맞닥뜨렸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감각이 마비되어 훨씬 불리한 상태다. 뒷받침해 주는 파트너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아무도 그를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는 법을 알아 가고 있었기에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괴물이 바닥이며 건물 사방을 파고들었다가 뛰어드는 타이밍에 점점 익숙해진다. 거칠게 떠밀리면서도 방벽 두께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갑기까지 하다.

한 번 치솟아 지호의 방벽을 갉작거린 놈이 다시 바닥을 파고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놈 역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곧 일격을 가해 오겠지.

지호는 눈을 감은 채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아래쪽에서 맹렬한 속도로 치솟아 오르는 놈의 움직임이 잡힌다. 피하지 않은 채, 지호는 방벽 모양을 성형했다. 둥근 형태에서 차츰 날카롭고 뾰족하게 바뀌어 가는 하단부.

잠시간의 고요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괴물이 빠르게 치솟는다. 지호 역시 번쩍 눈을 떴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놈의 아가리와 흉측하게 돌아가는 돌기 같은 이빨들.

응축된 이형 에너지가 지호의 손끝에 맺혀 손톱처럼 빛난다. 지호는 쐐기 형태의 방벽을 전신에 두른 채 그대로 놈의 아가리에 모든 에너지가 담긴 일격을 내리찍었다.

놈은 그대로 지호를 삼킨다. 닿은 모든 곳이 뜯겨 나갔다. 그러나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목이 터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특수 제작된 슈트와 함께 먹잇감이 되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은 통증이었다. 온몸이 곤죽이 되어 그대로 죽어도 이상치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약물로 인해 멀어졌던 감각이 또렷해진다. 지호는 온 힘을 손끝에 집중하며 놈의 이빨 돌기 없는 부분에 손날을 박아 넣었다. 지호가 먹히느냐 놈이 뚫리느냐의 싸움이다. 눈앞이 몇 번은 하얗게 변했다. 빌어먹을 약물이 차라리 도움되었다. 진작 기절했을 통증이었을 텐데.

지호의 손끝이 결국 놈의 살을 파고든다. 마찬가지로 놈의 이빨도 지호의 살을 파고들었다. 내일부터는 말하지 못하게 되어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대면서도 지호는 기어코 놈의 살을 찢어 냈다. 그 단단한 이빨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다음은 차라리 쉬웠다.

본디 고깔처럼 뒤로 갈수록 줄어들어야 할 놈의 몸 끝이 아가리와 같은 크기로 벌어졌다. 지호는 놈을 그대로 뚫고 나오며 바닥에 추락했다. 형편없는 착지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추위가 엄습한다. 각성하고는 처음 느끼는 고통.

이대로 죽는 걸까?

가뜩이나 약물로 유리된 감각이 점점 더 멀어진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고요한 균열. 회색빛 풍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각성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처럼 또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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