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문이 열렸다. 지호는 뽑아 던졌던 바늘을 팔에 가져다 댄 채 눈을 감았다. 액체가 방울방울 팔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져 호스 중간을 압박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지호 헌터 정도 되는 신체 계열 능력자를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면 실전에서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걸 기절시켰다고 해도 되나 몰라요. 전투로 인한 피로가 쌓였고 탈진한 상태였으니 제대로 통한다고 볼 순 없을 거예요. 멀쩡한 상태에서 제압에 성공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이거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이번 균열에서 최대한 구해지면 좋은데, 사냥꾼들이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에게 많이 당했더군요. 헌터들이야 구조 작업이 먼저니까 각성자 연합에 기대하긴 해야겠는데, 여러 가지로 어려워요.”
“흠, 아쉽군요. 코드 레드 개체들한테 쓸 수 있나 했는데.”
“그쪽은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그나마 이지호 헌터가 우리 쪽에 호의적일 경우에는 도플갱어까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텐데, 이번에 일을 벌이시는 바람에 접근하면 경계나 잔뜩 하겠죠…….”
주원의 짧은 웃음소리. 그는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애쓰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을 얼버무렸다.
혹시 침상 부근에서 그를 보고 있을까 봐 눈도 뜨지 못한 지호는 최대한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금 박사의 이름도 나오고 정부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니 협회 쪽 사람, 그것도 인천 아닌 지역 사람일 것 같았다.
전양련과 연합해 정체불명의 실험에 협조하고 있던 게 정부 쪽 사람이라니. 이러니 아무도 지호의 수색에 동참하지 않고, 정보를 올려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실종자들을 구해 낸다 해도 각성자들이 보이는 만큼의 인간미를 보이진 않을 수도 있어서, 최소한의 제압 도구는 마련해야 했어요. 금 박사님도 이지호 헌터급 각성자에게 통했다는 걸 알면 꽤 뿌듯해하실 겁니다. 그보다 약한 괴물들에겐 더 잘 통할 테니까요.”
“그 비공개 연구 계속하신답니까? 발명 쪽으로 집중해 주시는 쪽이 훨씬 도움될 텐데…….”
“글쎄요. 사실, 각성자들이 괴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각성자 본인들에게 제일 충격일 거 아닙니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떳떳이 밝히고 그럼에도 당신들이 사람인 이유는 이런 거라고 말해 주고 싶으시다는데, 각성한 본인들조차 모르는 걸 일반인인 우리가 어떻게 말해 줍니까. 답이 없는 문제예요.”
“그러게요. 각성한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네요. 한 가지는 기억합니다. 저를 죽인 괴물의 기억 같은 걸 가끔 꿈으로 꿔요.”
“다른 헌터들도 종종 그런 이야길 합니다. 자기 것이 아닌 기억 같은 것들……. 균열의 풍경이나 본 적 없는 괴물의 모양새 같은 것들. 사실 무의식중에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편이 덜 괴로우니까. 헌터들이 모습 변한 실종자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 자기들을 사람으로 여겨 달라는 시위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약이 많이 떨어져서 곧 갈아야겠다는 말과 함께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 그는 지호 팔을 자세히 보지 않고 주사액만 교체한 뒤 커튼을 휙 쳤다. 주원과 하던 대화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사실 저도 어느 정도는 거기에 동의하거든요. 사람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자체가 헌터들의 비정상적인 이타심과 헌신에 대한 설명이 되는 거 아닌가 싶고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돕는다는 이야길 하고 싶을 거라고도 생각해요.”
“영 틀린 이야긴 아닐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모든 각성자들이 헌터가 되어 사람을 구하지 않는 게 설명되질 않는데요?”
“강한 능력을 갖추는 각성자일수록 헌터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임보현 헌터나 이지호 헌터처럼 특출나면 더더욱 그렇죠. 까딱 잘못하면 인간이 아니었을 능력으로 인간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에요. 적어도 이런 식으로 함정에 빠트리는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진짜 내가 양 솔 박사를 썩 좋아하는 건 아닌데, 사실을 알고 나니 그 말을 똑같이 하게 되더라니까요. 그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보라고요.”
“명심하죠. 두 번 그러겠어요? 그 방법만 알아내면 다시 그럴 일이 있으려고.”
“좋아요. 특수반 사람들 말인데…….”
소리가 멀어진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누워 있던 지호는 다시 눈을 떴다.
지호가 깨달은 사실을 다른 이들이라고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그보다 똑똑한 사람이 많았을 테고, 정보 얻을 루트야 차고도 넘쳤을 테니.
머릿속을 휘몰아치던 온갖 생각이 한곳으로 수렴된다. 정부 차원에서 뒤로 일을 꾸미고 있었다면 지호 한 사람이 발버둥 쳐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을 터. 혹은 그에 준하는 거대 집단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버겁기는 매한가지다.
주원이 건넸던 마정석으로 회복한 힘은 여전히 지호 안에 휘몰아쳤다. 힘이 감정을 따라 움직이려는 걸 억지로 누른다. 몸이 제대로 움직일 때까지는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통신 장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보다 핸드폰에 친숙한 세대라 뭘 어떻게 만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 누가 달려올까 걱정되기도 하고.
정신 방벽을 유지한 채로 감지 파장을 퍼트리려는 노력 끝에 평소 사용 범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협소한, 일 미터도 되지 않는 감지 파장이 느린 속도로 복도를 훑었다. 밖을 살피려고 문에 바짝 달라붙어야 했다.
주변을 다니는 생물 없음. CCTV 여부까지 확인하긴 어려웠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과 몰려오는 두통이 정신계 능력이 퍼져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괜찮은 건지, 아니면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정신 계통 능력자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까 대화로 추론하자면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특수반 사람들이 대부분 정신계 능력자란 사실은 좀 의외다. 김 반장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부 지시를 따르고 있다면 예전에 김 반장이 외부에 보고하는 것 같던 수상쩍은 모습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시간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균열이 안정되어 외부로 나갈 수 있다면 지호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 것이다. 경계 상관없이 도주할 수도 있을 거고, 허공에서 균열 경계가 분간되지 않아 폭주를 불러일으키는 참사 역시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안정기가 오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지상 근처에서 돌아다녀야 한다. 타인의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그편이 나았다.
몸을 짓누르는 건 단순히 약물로 인한 감각 이상 증세뿐만이 아니다. 지호는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쉴 수 있을 때 쉬었어야 했는데. 근신 받고 나서도 뻔질나게 돌아다녔던 때를 생각하면…….
쿵. 쿵.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울린다. 대형종의 발소리로 추측되는 소리였다. 지호가 잡았던 다섯 마리 키클롭스와 비슷한 놈들일까? 여왕의 호위대가 거느린 것들 외에도 대형종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상태를 보겠다는데 왜 안 보여 주는 건가? 딴짓한 거 아니라고 어떻게 믿고?”
익숙한 목소리에 지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김 반장 목소리다. 그가 균열에 들어온 것이 확실하다면 균열은 이제 안정기에 돌입했을 것이다. 꽤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급한 발소리도 함께다.
“반장님.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
“우리 팀 놈들 굴려 먹는 거야 그렇다 치겠다. 대체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해해. 하지만 이제 막 괴물이랑 싸우고 돌아온 헌터를 습격해? 넌 인간 새끼도 아니야.”
“그렇죠. 김 반장님이나 저나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지요. 금 박사님 연구 자료 보셨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장님은 보셨을 것 같은데.”
서두르던 걸음이 느려졌다. 이번에는 이주원 각성자와 김 반장인가 보다. 대화를 들으니 진짜로 전양련 측에서 벌인 일에 나머지가 협조하는 모양새 같아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의심할 사람들만 사방에 가득하다면 정말 슬펐을 터였다.
“그런 개소리를 사람들 앞에서 늘어놓을 참은 아니겠지?”
“협회가 며칠 동안 답보하고 있어요. 누가 결론 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숨이 중하고, 어떤 목숨이 가벼운지를 결론 지어야 할 텐데요. 아무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하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진실을 밝히자고요. 괴물로 변한 실종자들을 배척하려는 당신들이야말로 사실 괴물에 제일 가까운 놈들이라고!”
“입 다물어. 그 말이 협회로 새어 나가는 순간 전양련 새끼들 다 족쳐 버릴 테니까.”
김 반장 특유의 으르렁거림. 지호는 고민하다가 문고리를 쥐었다. 침대로 돌아가 다시 누운 채 잠든 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그 누군지 모를 연구원과 달리 김 반장은 지호 편이 되어 줄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러리라 믿고 싶다. 이쪽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남선일 사령관 묵인하에 잡아 온 겁니다. 좀 소란이 있긴 했어도 결국 목적은 달성할 거예요. 임보현 헌터가 추적대를 꾸렸다죠?”
“그래. 본인은 안 들어왔고.”
“엥? 들어온 거 아니었어요? 이거 또 다른 데랑 소식이 다르네. 이해할 수가 없어요. 눈앞에서 이지호 헌터가 납치됐는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친하지 않은가? 두 사람이 자매처럼 친밀하다고 다들 그랬었는데. 역시 자기 목숨 걸 만큼은 아닌가 보죠? 의견 좀 내 보지 그랬어요. 이지호 헌터 구할 사람 당신밖에 없다고.”
이주원 각성자의 비아냥거림도 이 순간만큼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의 대화와 다르다. 지호는 이주원 각성자가 왜 이쪽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알았다. 도로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들어오기는 했었어. 임보현은 본인이 직접 들어오는 무모한 선택 대신 현명한 답을 골랐지. 이지호 헌터도 그걸 더 원할 거라던데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아무튼, 헌경이 너희를 추적 중이다. 곧 특수반에도 협조 요청이 들어오겠지. 전양련 소속인 구조대원들이나 당시 같이 들어왔던 신체 계열 헌터 방은수도 바로 체포됐어. 여기 금방 들킬 거다. 덜미 잡히면 특수반은 이지호 수색 중이었던 걸로 말을 맞출 거야. 필요한 연구 팀 추려서 바로 빠져라.”
“그럴 순 없어요. 어떻게 잡은 기횐데.”
“입 다물어. 너만 급한 게 아니야. 너만 절박한 게 아니라고. 나라고 멀쩡한 심정으로 다른 새끼들 아가리 터는 거 놔두는 줄 아냐? 박찬민 눈깔 뒤집혔어. 너보다 훨씬 뛰어난 이동 능력자고. 사방 다 뒤집으면서 이지호 헌터 찾고 있으니 멀쩡한 모양새 확인 안 하면 우리도 곤란해져. 협조 요청에 별도 팀 꾸려 수색하겠다고 말해야 했단 말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최후의 한 수를 준비해 두긴 했어요. 저도 이걸 쓰게 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최대한 임보현 헌터를 끌어들일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요.”
“우선 이지호 헌터 확인이 먼저야. 어디 있지?”
지호가 누워 있던 침대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느리지만 천천히, 지호 팔에 주사되고 있던 수액에 연결된 장치가 풀리는 것이 보였다. 한두 방울씩 느리게 떨어지던 액체가 빠르게 떨어진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바늘을 타고 정체불명의 액체가 흥건하게 흘렀다.
“좋아요. 보여 드리죠.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을 테니 헛걸음하신 겁니다. 금 박사 발명품이 효과가 나쁘지 않아서 깨어나려면 시간깨나…….”
지호는 문고리에서 손을 뗀 채 팔짱을 꼈다. 이대로 들어와서 그가 정신 못 차린 채 약물에 취해 있는 꼴을 보여 주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다. 조금이라도 다친 모습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김 반장의 으름장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입꼬리 한쪽이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지호는 불쾌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의 보현처럼 웃었다.
“문 여는 데 한세월이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