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정신을 차렸으나 눈앞이 캄캄하다. 습관적으로 감지 파장을 펼치기 무섭게 찡하고 두통이 시작됐다. 지호는 흠칫하며 힘을 거두어들였다.
두 힘을 동시에 쓰는 것이 여전히 미숙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내내 임시 파트너랍시고 옆을 지키던 사람들이 정신 계열이라 딱히 정신 방벽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도 해서 더 그랬다.
김 반장과 떨어진 이후, 훈련할 기회는커녕 이쪽 방면에서는 어린애처럼 도움만 받아 왔다. 특히 태양과 도훈은 과하다고 할 정도로 그를 감싸 왔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아픈 걸 떠나서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타인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때가 언제건 오긴 했을 것이고, 그것이 지금이란 사실이 지호의 불행이었다. 지호는 김 반장과 훈련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집중했다. 이질적인 느낌이 머리 한쪽을 채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주원 각성자는 전양련 측에서 핵심 인사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김 반장님이랑 친해 보였었는데, 혹시 이쪽에 관여하고 있을까? 특수반 사람들이 만약 저쪽과 엮여 있는 거라면 이 상황이 좀 이해되긴 하겠는데. 머리 아파 죽겠네…….’
지호는 최대한 자기 자신에 관해 생각했다. 그에게 일어날 리 없는 일들, 환상들, 비현실적인 것들에 생각을 잠식당하지 않는 것이 정신 방벽을 견고히 하는 첫 번째 단계였으니.
김 반장의 능력 속에서 무수히 무너졌던 현실은 이제 지호 안에서 홀로 견고해졌다. 지호는 천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들을 되새겼다.
‘나는 이지호. 며칠 후에 스무 살이 되고, 가족들을 모두 균열에서 잃은 헌터야. 헌터들 중에는 유일하게 모든 계열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약하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을 조심해야 할 거라곤 생각한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지호는 촛불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코앞에서 사고가 터졌으니 보현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어쩌면 균열 안정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뛰어들었을까.
반대의 상황이었으면 지호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보현은 아주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헌터라 그러지는 않았겠지. 대신 지호를 구할 방법을 모색하느라 싸늘한 표정으로 정체불명의 패거리를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구조대원들이 그랬다는 걸 알면 승찬 역시 당황하고 미안해할 것이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그러겠지. 그러나 구조대원 중에서도 실종자 가족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 모든 것을 승찬이 파악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만나면 괜찮다고 먼저 이야기해 줘야지.
그의 병아리 친구들은 소식을 들을까 모르겠다. 임시 헌터 자격증 뗀 지는 좀 되었어도 그에게 세 친구는 여전히 병아리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텐데, 지호 소식을 들을 수는 있을까.
어쩌면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는 거기서 함구되고, 지호는 괴물들에게 당한 것으로 처리될지도 모르지. 손예린 헌터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면 의심 못 할 바도 아니다.
박 팀장은 어디까지 단서를 모았을까. 임무로 정신없이 바빠서 그와 따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김 반장과 박 팀장 중에 어느 쪽이 더 수상한지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했는데. 특수반 일이니 조태양 헌터 말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김 반장 쪽이 조금 더 수상해졌다. 양 박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을까. 그 사람 외에 심층적인 정보들을 관리하고 있을 사람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다. 너무 오래도록 바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만히 누워 딴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등에 닿는 바닥의 느낌이 살아난 순간 지호의 눈이 딱 뜨였다.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민감한 신체 능력자의 청각이 실내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잡아낸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순 없었지만 신체 말단까지 저릿한 감각이 퍼지는 게 느껴지는 걸 보니 곧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자 보이는 건 실험실 같은 풍경이었다.
팔에 꽂힌 주사로 똑, 똑, 정체불명의 액체가 들어가고 있다. 신체 계열 능력자를 기절시킬 정도의 마취제라니, 괴물에게도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을 발명품일 것이다.
문득 닿은 생각이 지호를 괴롭혔다.
사실 진작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도준우 헌터를 만났을 때부터였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알게 모르게 진실들이 가까운 곳에서 자기를 봐 달라고 팔을 벌리고 있었겠지. 그걸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 온 건, 그러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울 거란 사실을 직감한 탓이었다.
각성한 모든 이들이 사실은 괴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자기 자신 또한 괴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어쩌면 그걸 알고 있었기에 괴물 된 실종자들을 사람으로 보자고 그토록 외쳤던 것은 아닐까. 지호 역시 사람으로 남고 싶고, 그를 사람으로 여겨 주었으면 해서.
몸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능력까지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지호는 염동력으로 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약품 냄새가 난다. 입고 있던 옷에는 손대지 않고 팔만 걷어 주삿바늘을 꽂은 탓에 한쪽 팔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다.
의지만으로 바늘을 뽑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형의 능력으로 지혈까지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플 정도의 압박감이 팔을 짓누르자 피가 멈추긴 했다. 통증을 견디느라 생각마저 멈춰서 문제였지.
바늘을 뽑자 몸의 감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돌아왔다. 경계 앞에서 지호에게 꽂아 넣었던 액체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치유 능력을 쓰자마자 더 빨리 돌았던 이유는 뭘까. 나중에 지윤을 만나거든 물어봐야겠다. 의학 공부 못 해 먹겠다고 소리치는 게 일상이기는 한 불량 학생이어도 지호보다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나쳤어요. 헌터들 협조를 구해야 할 판국에 납치라니요? 그것도 그 많은 사람 보는 앞에서! 우리 쪽 사람들 다 노출됐잖아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지호의 행동이 멈추었다. 내내 정신 방벽을 올려 둔 상태였던지라 감지 파장을 쓸 수는 없었다. 대신 지호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공중에 띄워 소리 나는 방향 쪽으로 몸을 가져갔다. 벽에 머리를 붙이자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애당초 초기 조건부터 첫 계획과 어그러졌어요. 이지호 헌터가 쓰는 힘으로는 균열을 빠져나올 수가 없잖아요. 그 사고 이후에 곧바로 이동 방법을 배웠을 줄 알았는데, 사방팔방에 불려 다니느라 임보현 헌터와 오붓한 시간 보낼 일이 없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걸 조사하는 게 당신네 일이었잖아요.”
“일 벌여 놓고 우리 핑계 대는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금 박사님도 지원 안 하셨을 거라고요.”
“인제 와서 네 탓이니 내 탓이니 논하지 맙시다. 아무튼, 임보현 헌터는 균열에 들어왔잖아요. 정신 방벽이 높은 사람이라 특수반 전원이 투입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엿듣고 있던 지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보현이 들어오면 안 된다. 퀸 패러사이트와 도준우가 그를 노리고 있는데!
“이번 일 어그러지면 정부에서 진짜 싫어할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보현 헌터를 도박에 투입하다니요. 그 사람의 상징성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퀸 패러사이트는 경계 저편으로 사라졌고 도플갱어 역시 마찬가지예요. 일을 그르칠 만한 요소라면 이번에 나타난 반인반수 모양의 괴물들일까요. 조태양 헌터 보고를 확인해 보니 이지호 헌터와 관련 있는 놈들이라던데.”
“양 솔 박사의 이론대로라면 각성 과정에 관여한 괴물들이겠죠. 좀 까다로울 것 같은데.”
“정신 계통 괴물에게 약해요. 이것도 조태양 헌터 보고에 올라와 있는 내용이고요. 퀸 패러사이트와 도플갱어 모두 정신계 능력이 있는데, 저놈들과 상성이 좋지 않다더군요.”
“그래서 특수반을 여기다 모아 놓으셨구나. 정신 계통 능력도 뿌려 놓으신 거고?”
“뭐, 겸사겸사. 임보현 헌터에게서 정보도 얻고, 우리 안전도 도모하는 거죠.”
짧은 웃음. 한쪽은 이주원 각성자 목소리였는데 한쪽은 영 낯설었다. 여왕의 호위대 접근을 막기 위해 정신계 트랩을 펴 놓은 곳이라니, 그래서 아까부터 속이 뒤집힐 것 같고 두통이 밀려오는 거였다. 도훈이 펴 놓았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번에는 지호를 보호하지 않는 자의 힘이라 이런 영향이 오는 거였다.
여전히 속이 좋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든다는 자체가 정신 방벽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지호는 욕지기를 참아 내고 주먹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신체 감각 되찾는 일에 집중했다.
보현이 위험하다. 그것도 지호 본인 때문에.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를 찾으러 와 주면 기쁠 거라는 생각이 충돌한다. 지호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바르작거리면서도 천천히 뜻대로 몸을 제어해 갔다. 땀이 뻘뻘 났다. 정체 모를 액체를 밀어 내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둔한 감각 끄트머리에 잡히는 약간의 느낌으로 몸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다. 약 기운은 천천히 빠질 것이다. 지금은 우선 여길 나가야 했다.
“정신 방벽 없다시피 한 이지호 헌터가 균열 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그것마저 없지도 않아요. 우리 김 반장님이 허튼짓을, 아니 물론 소중한 인재니까 중요한 훈련이긴 한데……. 처음 공인 각성 지원부에서 측정된 수치만큼만 능력이 있는 상태였으면 진짜 쉬웠을걸요.”
“그거 안 했으면 코드 레드 원에게 넘어갔을 것 같지 않아요? 그때 영상 보니까 잠깐은 버티던데. 그거 아니었으면 곧바로 지원 못 갔을 것 같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 중 전직 헌터들이 더러 있잖아요. 이번에 금 박사님 장비로 측정한 기록들 좀 받을 수 없을까요? 계속 얼쩡거리니까 우리도 영 불안해서.”
“이번 일만 잘 풀리면 그런 정보들은 얼마든지 공유하죠.”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지호의 상태를 살피러 오는지도 몰랐다. 이주원 각성자는 이동 능력자라 어디로 도망치건 금방 그를 따라올 수 있을 터.
어떻게 해야 하지? 지호는 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훔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체불명의 약품들과 뭔지 모를 기계로 가득한 방이다. 여길 부숴 버리는 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기척이 문 근처에서 느껴진다. 지호는 황급히 날아가 침대에 도로 누웠다.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침상이다.
이것저것 살펴보며 뒤적인 까닭에 처음과 달라진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원래대로 돌릴 시간이 없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심전도를 측정하는 기계 같은 건 연결되어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발 들여다보지 않기를.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감은 지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