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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63화 (164/260)

163화

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주원 각성자에게 정신 계통 능력이 있었던가? 이동 능력자란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쪽은 생각도 안 했다. 닿았을 때 기억을 읽혔나. 두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사방이 아파 오는 탓에 알아채지 못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본인 상태를 살핀 지호는 두통은 없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불안해졌다. 정신계 능력으로 정보를 빼 간 것이 아니라면 더 나빴다. 헌터 측 정보나 지호가 개인적으로 나누었던 정보 같은 것들을 완전히 상관없는 제삼자가 알고 있는 것이니.

지호는 욕설과 함께 몸을 띄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균열 안정기가 머지않았다. 외부에 캠프 차려진 쪽으로 움직이면 조태양 헌터도 필요한 조치를 금방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도플갱어에게 저쪽으로 넘어가는 법을 공유하기로 하고 얻은 정보겠죠? 그쪽에 주는데 이쪽에도 줄 수 있잖아요. 괴물이 사람 사는 곳으로 넘어오는 방법, 임보현 헌터한테 배웠죠?”

“아뇨.”

“안 배웠어요? 아니 왜요!”

주원이 펄쩍 뛰자 지호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제가 그걸 꼭 알고 있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전에 그 사고에 휘말려서 균열 너머로 갔다 왔잖아요. 당연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무사히 돌아올 방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어야죠!”

모두가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며, 지호 역시도 보현에게 그 방법을 물을까 생각했었다. 한때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묻지 않았고, 사고를 겪은 뒤 돌아와서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보현과 달리 지호는 정신계 방어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균열 경계 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다시 균열로 들어올 일 같은 건 없었겠지. 그 방법을 아는 어떤 이가 괴물의 먹이가 되건 그 숙주가 되건 어떤 사고로 저쪽 편에 그 지식을 넘겨주게 되면 이후의 재앙은 누가 책임질 수 있나.

따라서 지호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만약 이전 같은 사고가 또 발생하거나 균열 소멸기에 빠져나오지 못해 거기 휘말려 저쪽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대로 죽을 테지.

그러나 그것이 인류에게는 제일 나은 선택일 것이다.

“제가 알 필요는 없죠. 우리의 영웅 임보현 헌터님이 숙지하고 있으시니까.”

“임보현 헌터는 몸이 다 망가졌잖아요. 더는 균열에 들어오면 위험하다고.”

“알아요. 그래서 그 중요한 비밀은 괴물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지켜지겠죠. 어떤 것보다 안전하게요.”

보현이 균열 코앞에서 대기 중이란 말은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반응으로 보아하니 경계 쪽으로는 접근도 하지 않았던 모양. 청라 방면 외부 캠프를 목격하거나 임보현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뜻밖의 사실을 들은 주원의 얼굴이 꽤 볼만했다. 지호는 일부러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생각보다 다양한 정보를 알고 계시네요. 헌경에서 빨리 이주원 각성자님을 붙잡아서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모두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제보는 안 할게요. 저는 이만.”

주원은 시뻘게진 얼굴로 지호를 노려보았으나 그 이상의 반응 없이 몸을 휙 돌렸다. 곧 그의 기척이 사라졌다. 지호는 태양을 추슬러 청라 캠프 부근으로 이동했다.

부서진 도심. 대형종이 날뛴 덕분에 반파가 아니라 완파된 건물이 많았다. 검암 캠프까지 들어가진 못했으나, 그쪽 역시 사정이 더하면 더했지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주원 각성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쪽이야말로 아비규환일 텐데 헌터들이 지원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청라 캠프는 이동 가능한 임시 캠프니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머리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저쪽에 여왕의 호위대가 남아 있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일이 커진다.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많지 않을 테고, 있다 하더라도 피해가 어마어마해질 테니.

도중에 눈알 닮은 괴물을 만났으나 가볍게 요격한다. 한때 지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쉬운 전투였다. 태양을 부축한 상태로도 에너지 화살을 다루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손이나 팔로 방향을 가늠하지 않으면 아직 뜻대로 공격이 나가질 않아 제멋대로지만, 화살을 잔뜩 날리면 그중 한 발 정도는 맞는다. 눈알은 풍선처럼 터졌다. 아래로 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붉은 액체들. 더는 감회가 새롭지 않다.

주원이 가져온 마정석에 응축된 에너지가 충분했는지 사방에 화살을 쏘아 대고도 에너지가 남았다. 복잡한 기분이다. 아는 것과 증명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

터질 것 같은 생각들을 떨쳐 내려 애쓰며 청라 캠프 앞에 도착했다. 아직 균열 안정기가 오지 않았기에 신체 계열 퓨어 헌터들과 구조대원들만 황급히 달려왔다. 응급조치하는 것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면서 긴장이 풀렸다. 안 아픈 곳이 없다. 여전히 경계 너머에 서 있던 보현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도플갱어는 어디로 갔죠?”

“언니가 싫어해서 쫓아냈어요.”

“거짓말 못 하잖아요. 티 나요.”

“아무튼, 지금 같이 없는 건 사실인데요. 무시무시한 것들이 돌아다녀서 경계 저쪽으로 도망갔어요. 제가 쫓아낸 건 아니지만, 그 괴물이 쫓아낸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

균열 크기가 워낙 크기에 경계 역시 다른 곳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나 보현과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지호는 일부러 여유 있는 척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몸이 뻐근해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숨길 정도는 됐다.

“언니가 균열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나갈게요. 그러니까 거기서 기다려 줘요.”

“왜요? 경계 너머에 저를 노리는 괴물들이라도 있어서? 그게 퀸 패러사이트라서?”

영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지호를 괴롭혔다. 바닥으로 떨어졌던 시선이 힘겹게 올라왔다.

“이 균열 안에서 이주원 각성자를 만났어요.”

“흠? 이주리 헌터가 알면 당장 뛰어올 소식이네요.”

“그쵸? 제가 위험할 때 도움을 줘서 신고는 안 했어요. 저한테 협조를 구하더라고요. 괴물이 균열을 빠져나올 방법을 물었어요. 언니한테 배우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보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보이는 퀸 패러사이트를 향한 적대감은 준우를 죽였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설령 지호의 의견에 동조하여 괴물 된 실종자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가 괴물을 향해 증오심을 내비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호는 진실 속에 거짓을 섞기로 했다. 그편이 자연스러우니까.

“괴물들이 언니를 노리고 있어요. 이주원 각성자는 괴물 측에 협조하고 있고요. 동생이 실종되었는데, 아직 살아 있대요. 제 생각엔 괴물로 변하거나 그쪽에 잡혀 있거나 뭐 그런 모양이에요. 그쪽으로 자세히 대화하진 않았어요. 자세히 알게 되면 동정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았거든요. 언니도 알다시피, 제가 쓴 방법은 괴물의 방식이라 균열 너머로 갈 수는 있어도 돌아올 수는 없잖아요. 언니만이 유일해요. 유일하게 이쪽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에요.”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응시하는 보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른 헌터들은 진입 준비로 바쁜지 이쪽으로 오는 이가 없다. 조태양 헌터가 정신을 차렸는지 응급 팀이 소란스럽다.

“조태양 헌터 다치고 저도 위험했을 때 이주원 각성자님이 나타나서 도와줬어요. 그러고서 하는 말이 협조해 달란 이야기였고요. 저랑 같이 있던 도훈, 아니 도플갱어는 퀸 패러사이트가 사라지고 나서 자리를 떠났는데 조태양 헌터님이 휴대용 충전기를 줘서 다시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이주원 각성자는 괴물이 된 동생이더라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나 보군요.”

“그리고 괴물과 합심해서 언니를 노려요. 언니가 균열로 들어오면 정말 위험해질 거예요. 퀸 패러사이트가 보고 피하는 괴물들도 있어요. 뱀 닮은 놈들인데, 저를 죽였던 놈들이었어요.”

냉정하게 이야기를 들으려던 보현은 결국 무너졌다. 치밀어 오른 걱정과 염려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마는 다정함에 지호는 간신히 안도했다. 결국, 언제나의 보현이었다.

“어떻게 그런……. 괜찮아요? 지호 씨도 그놈들이랑 마주친 거예요?”

“아녜요. 이주원 각성자가 봤대요. 저는 놈들이 데리고 다니는 다른 괴물하고 싸웠어요. 직접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만큼 위험한 놈들이에요. 언니 원래 몸 상태로도 어떨지 모르는데 지금 안 좋잖아요. 더 좋아질 일 없잖아요.”

간곡한 부탁에 보현의 눈썹이 슬쩍 내려갔다. 그는 한숨과 함께 안쪽을 턱짓했다.

“저기 조태양 헌터 일어났나 봐요. 임시 파트너한테 가 보는 게 좋겠어요.”

“그럴게요. 제 말 꼭 기억해 줘요.”

“제가 지호 씨한테 균열 넘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건 어때요? 만약 어쩔 수 없이 저쪽으로 넘어가거나 하게 되면…….”

“그러지 마세요. 제가 균열에서 다른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퀸 같은 정신계 괴물에게 당하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놈들이 제 기억에서 실마리를 갖게 되면요?”

두 사람 다 심각한 얼굴이라 다른 헌터들이 머뭇거리며 다가오기를 꺼렸다. 특히 보현 뒤에 있던 다른 헌터들은 신난 얼굴로 가까이 왔다가 몇 번쯤 되돌아갔다. 그 임보현 헌터와 함께 임무에 나서는 길이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지호와 함께 훈련받았던 4세대 출신들도 있다.

보현은 길게 한숨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좋아요.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어요. 지호 씨가 괴물들을 사람으로 보고 싶어 한다고 해서 솔직히 좀 걱정했거든요. 전양련 사람들 상태가 좀 심상찮아서……. 그치만 아무리 견해가 달라도 결국 지호 씨는 헌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단 걸 알았으니 됐어요. 지호 씨 말대로 할게요. 균열엔 들어가지 않겠어요.”

“진짜요!”

“대신,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곧바로 도망쳐요. 괴물한테 죽네 마네 하는 말 입에도 올리지 말고. 알겠어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죽는 대신 도망갈게요. 그럼 이번에 압수한 자료들 열심히 분석해서 문 열고 구하러 와 줘요. 다른 사람들 보내서요.”

“멀쩡히 돌아올 생각이나 해요. 그런 위험 상황 마주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위로 튀어요. 위가 차라리 안전해요. 공중형 괴물 중엔 그래도 그렇게까지 위험한 놈이 없었잖아요.”

“제 몸 우선하기. 꼭 그럴게요. 언니가 전에 말한 사람같이 나쁜 일 만들지 않고요.”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했던 거예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입 다물었어야 했는데, 얼마나 더 나일 먹어야 현명한 어른이 되나 모르겠어요. 잊어버려요.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언제나 허락되는 선의 정보까지만 제공해 주었던 보현이다. 지호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것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 변화가 반가웠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보현이지만, 그에게도 다시 새로운 의미들이 생겨날 수 있다. 만약 지호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보현도 퀸 패러사이트를 향한 증오와 분노만으로 삶을 살지는 않게 되겠지.

“안 가요? 임시 파트너 일어난 것 같은데.”

지호는 그제야 움직였다. 보현이 손짓하며 얼른 가 보라고 재차 권하기까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기도 했다. 지호는 구조대 있는 쪽으로 돌아가며 얼굴을 착착 두드렸다.

잠시 새 가족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구원자였고, 한때 파트너를 꿈꾸게 한 노련한 헌터. 이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한 사람.

지호는 보현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자각하며 씁쓸해졌다. 그에게 보현은 중요하지만, 보현에게 지호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태양 헌터 쪽으로 돌아와 몸을 숙여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멀쩡히 쉬고 있으나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 일어났다더니? 의문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다들 바빠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파악해 보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양새 때문에 태양이 일어났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오히려 깊은 상처가 발견되어 처치하느라 바빠진 모양이다. 지호는 자기 능력이 도움이 될까 싶어 다가갔다.

머리도 다친 걸까? 본디 튼튼해야 할 사람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며 그의 눈을 까뒤집어 확인하려는데 옆에 있던 다른 구조대원이 지호의 팔에 대뜸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신체 계열 능력자용 굵은 바늘이다. 질겁하며 팔을 휘두를 뻔한 지호는 가까스로 움직임을 참았다.

“아, 말하고 해요!”

“다음엔 그럴게요.”

방호복 입은 구조대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곁에 있는 신체 계열 헌터 역시 낯설었다. 이상하게 눈앞이 핑 돈다. 전신에 긴장이 풀렸다. 두통은 없다. 정신계 공격이 아니었다. 지호는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아 던졌으나 안의 내용물은 이미 비어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던 보현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앞이 흐려진다. 땅이 코앞으로 다가오며 순식간에 시야가 꺼졌다. 어두운 시야 너머, 처음 균열로 뛰어 들어온 구조대원보다 머릿수가 하나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어느새 그들 틈에 들어와 있던 주원이 속삭였다.

“임보현 헌터가 와 있는 줄 모르고 속을 뻔했네. 지호 씨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봤으니까 이제 구하러 직접 오시겠죠? 우리의 영웅, 임보현 헌터님께서.”

속에서 치밀어 오른 욕을 토해 낼 수 없었다. 감각이 완전히 죽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치유 능력을 쓰자마자 온몸에 약이 빨리 돌며 더더욱 운신이 어려워졌다. 지호는 이제 자기 자신에게도 욕을 퍼붓고 싶었으나, 결국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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