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58화 (159/260)

158화

그렇다면 경계 밖에 있는 것이 도준우와 일부 호위대뿐이구나.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됐다. 차라리 잘됐다. 보현이 복수심을 품고 있는 건 퀸 패러사이트 쪽이지, 그가 숙주 삼고 있는 옛 헌터들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위험성은 경고해야 한다. 설령 저 바깥의 헌터들이 의견 차이 때문에 지호를 배척한다 해도, 지호마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언니! 코드 레드 경보 뜬 거 들었죠!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절 해치려고 하는 놈들까지 포용하자고 말하진 않아요. 모든 괴물을 받아들이자는 게 아녜요. 적어도 대화를 시도할 수는 있잖아요. 그런 시도할 기회조차 박탈하지는 마세요. 모두가 그렇게 단호하게 유일한 희망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녜요. 대화하면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그러니까…….”

으극, 말하다 말고 급하게 이를 깨무느라 살 안쪽을 씹었다. 금속 먹는 놈이 다시 튀어 올라 방벽에 충돌한다. 마찰에 불꽃이 튀자 손 헌터가 올린 보고는 보았으나 실제로 놈을 처음 보는 자들이 화들짝 놀란다. 지호에게 달려든 게 아니다. 방벽에 입을 벌린 채 죽어 있는 괴물을 향해 뛰어든 것이지.

놈이 괴물의 단단한 갑각을 포식하기 시작하자 태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렁이 같은 놈들끼리 서로 처먹으려고 난리였군. 우릴 노린 게 아니라 그냥 싸움에 낀 것 같은데.”

“타이밍이 거지 같네요.”

경계 저편을 파장으로 훑자 퀸의 호위대는 자리를 뜬 다음이다.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놈들의 속셈을 알 수 없어 더더욱 불안했다. 태양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질문했다.

“경계 너머에 있는 놈들은?”

“사라졌어요.”

“아까 두 놈이 달려들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홀린 듯이 다른 데로 갔어. 그러면서 이쪽에 가해지던 압박도 점점 약해졌고.”

감지계 능력자가 아닌 태양은 지호와 도훈의 설명만으로 불충분한지 인상을 찡그리며 방벽 밖 괴물들을 훑었다. 언제라도 달려들지 모를 불안한 모양새다. 한 놈은 죽었으나 시체마저 흉흉해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마정석 추출하자고 덤볐을 텐데 지금은 안 되겠군. 하지 말라고 해도 퀸 패러사이트를 쫓아갈 거지?”

“퀸 패러사이트를 지키는 괴물 중에 헌터였던 괴물들이 있잖아요. 그것들을 바깥 캠프의 살아 있는 헌터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유를 물어보면 알려 주나?”

지호는 굳은 얼굴로 태양을 응시했다. 경계 바깥 헌터들은 자료 기록을 마친 다음이라 팀을 나누고 진입 계획을 짜느라 분주해 보였다. 보현 역시 이쪽을 계속 보고 있지 않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곧장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저들 중에 신체 계열 퓨어 헌터가 있었다면 괴물에게 습격당한 태양 팀을 도우러 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인 자는 없다. 여기 모인 헌터 대부분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 밖의 많은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라면 지호는 앞으로도 대단히 외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밖을 돌아보는 지호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태양은 헛기침하며 그의 임시 파트너를 안심시켰다.

“동주 형이 부탁해서만 온 건 아니야. 이 망할 괴물 새끼 면상 보러 온 건 맞지만, 헌터로서 네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단 건 같이 있던 내가 제일 잘 알지. 더욱이 나는 네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잖냐. 여기서 혼자만 아는 정보를 끌어안고 스스로 고립무원의 길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해. 아니면 나를 이용하든가.”

“이용이라니.”

“내가 했던 이야기는 유효해. 우린 도플갱어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고, 그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네게도 마찬가지야.”

퀸 패러사이트의 음성 비슷한 것이 머리를 울렸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호는 그것의 숙주가 될 뻔했던 상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것을 떠올렸다. 도훈이나 태양의 도움 없이는 퀸 패러사이트에게 접근할 수 없다. 대놓고 자살행위니까.

조태양 헌터와 만난 지 이제 며칠 됐다. 그를 믿는 것은 현명한 일인가?

그러나 지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방벽 뒤로 구멍을 뚫어 금속 먹는 괴물에게 들키지 않게 빠져나온 셋은 경계에서 거리를 둔 다음에야 방벽을 없애 괴물의 시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털푸덕 쓰러진 시체를 포식하느라 이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괴물을 유심히 관찰하던 도훈은 지호가 불안해할 정도로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돌아왔다. 별반 반응이 없는 게 이상했다.

“뭔가에 홀려 있어. 아마 이쪽을 덮치도록 유도한 게 있었을 거야. 전이었으면 저 괴물이 아니라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을 텐데.”

“정신계 능력자들은 그런 것도 알아봐요?”

“눈이 탁하고 초점이 흐리거든. 그리고 이쪽 정신 간섭에 반응을 안 해.”

태양 역시 도훈과 비슷하게 괴물에게 다가갔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외피 뜯어 씹는 소리가 기괴할 정도로 크다.

“먹고 있는 것 외의 다른 환상에도 반응을 안 해. 적어도 나보단 센 놈이란 뜻인데.”

“퀸 패러사이트 아닐까요?”

“그럴 확률이 높지. 머릿속에 소리가 울린다고 했지? 정신계 능력자들이 쓰는 환각 작용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는 뇌에 거짓 정보를 흘리는 거랑 비슷한데, 거기에 원하는 정보를 보내는 방식으로 말을 전달할 수 있어.”

대충 이런 식으로.

도훈과 태양이 말과 메시지 전달을 동시에 해 온 까닭에 울렁임이 심해졌다. 예전에 김 반장이 기억을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 지호의 얼굴이 안 좋아지자 도훈은 얼른 지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옛날에 이주원 각성자도 이런 식으로 말을 전달했던 것 같아요. 그땐 머리 아프고 그러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반항 못 하고 당한 거고 지금은 약간이라도 대처할 수 있게 된 거야. 있으나 마나 한 얄팍한 방벽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반항도 못 하고 당하지는 않겠어. 지금 같은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어디로든 최대한 멀리 달아나. 뭔가가 너를 노리는 거니까.”

“퀸 패러사이트의 본체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고 놈의 호위대들도 자리를 떠났어요. 헌터들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까 그 자리 뒤에 헌터들이 있는 걸 놈들이 알 리가 없지. 균열 안쪽에 꾸린 캠프를 노리지 않을까? 여기처럼 경계 밖에 뭐가 잔뜩 있는 곳이 아니라. 내 눈엔 그냥 텅 빈 거리처럼 보이거든.”

주변 지역 정보들을 확인하던 태양이 황급히 둘을 불렀다. 그가 내민 화면에 흔들리는 영상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과할 정도로 무장한 차림새에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중화기. 고글이며 방탄조끼며 뭔지 모를 첨단 장비로 몸을 두르고 있는 이들이 배를 꿰뚫린 채 피 흘리며 끌려간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사냥꾼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전에 경계 부근에서 마주쳤던 전 헌터이자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인 괴물.

알파사의 온갖 물건들이 헨젤과 그레텔 동화 속 빵 조각처럼 점점이 떨어져 있다. 핏줄기 사이사이마다 장비 하나, 부품 하나. 균열에 접근하자 흔적은 다리 한쪽, 손 하나가 된다.

퀸의 호위대 중 하나는 사냥꾼의 머리를 밟아 으깨 버린다. 생존을 기대할 수 없어진 시신이 축 늘어지자 그걸 끌고 경계 저편으로 넘어가 버리는 모습까지.

촬영자가 너무 심하게 떨어 영상의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 보였다. 태양은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가 분노의 시선을 지호에게 돌렸다.

“이런 납치가 이게 처음이 아니야. 놈들은 균열에 대한 것들을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익혀 가고 있다. 산 사람을 끌고 넘어가려고 하면 사라지던 것이 죽이고 끌고 가니 가져갈 수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건 최근이야. 우린 균열에 남는 자들이 모두 사냥당하고 마는 불행한 결과를 원치 않는다. 네가 함께한다고만 해 주면 숨기는 것 없이 다 알려 주마. 진짜야.”

“그렇게까지 우리 지호 협조를 얻어서 하고 싶은 게 뭔데? 괴물들을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는 일? 그 총대를 메라 뭐 그런 건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도훈이 빈정거렸다. 태양은 그의 옛 동료 얼굴을 한 도플갱어에게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이니 더 화가 나. 네놈 새낀 꼴 보기 싫지만, 네게 머리를 굽히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내를 만나러 갈 거다. 모습이 달라졌어도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가족이 틀림없는 자들을 맞이하러!”

고함 후의 침묵.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태양을 물끄러미 노려보던 도훈은 어깨만 으쓱이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삼켜 버린 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는 몇 사람의 원수가 될까.

잠시 소강상태였던 알림이 줄기차게 울린다. 괴물 관련 경보음이다. 이번에는 새로 보고된 것이 아닌 기존에 알려져 이름 붙은 것들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뜬다. 유니콘이라고 이름 붙었으나 이마에 난 뿔과 사족 보행 외에는 그 신비로운 말과 전혀 닮지 않은 괴물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태양은 답지 않게 흥분했던 태도를 가라앉히며 헌터답게 정보들을 정리했다.

“나타난 지역이 퀸의 등장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아. 괴물들끼리 싸움이 있는 것 같다. 안정기가 오기 전의 마지막 세력 다툼일 거야.”

“괴물들이 균열 안정기를 알고 있을까요?”

“일단 그렇게 생각 중이야. 일반 균열 내부에서 관찰했을 때는 그런 것처럼 보이더군.”

“이번엔 아닐걸. 너무 넓잖아.”

도훈이 한마디 거들자 두 헌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구조 신호를 보내는 생존자들이 있다. 그들을 구조한 다음에야 사냥 작업이 시작될 텐데.

외부 헌터들이 들어와 나머지 생존자들을 구조하긴 하겠지만, 그것도 방해하는 괴물들이 없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여기가 넓어서 괴물들 사이에 서열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거라면, 이번 균열은 사냥꾼들에겐 최악의 균열이겠어.”

태양의 목소리가 반쯤 잠겼다. 사냥꾼과 헌터는 협조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고, 돈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괴물들을 사냥하고 사람 구하는 일 정도는 돕는 이들이다. 태양은 초기 사냥꾼들은 각성하진 못해도 사람 돕는 일을 하려고 균열에 뛰어들었던 놈들이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사냥꾼들은 다 돈벌레들이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죽어도 되는 건 아니야.”

오랫동안 우울함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괴물 경보 울리는 곳이 많아질수록 혼란스러워진다. 어디로 가야 하지? 괴물끼리 맞부딪쳐 전투 일어나는 것이 곳곳에서 드론으로 촬영되어 올라온다. 새 발견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양 박사 같은 사람들뿐일 것이다. 대부분 침통하게 가라앉아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고, 구조 신호가 꺼진 곳에서 건물이 무너지거나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들도 올라왔다.

균열에 진입한 오디세이 팀이 헌터들만 열람할 수 있는 영상을 촬영해 올린다. 언어 같은 것을 마구잡이로 뱉는 괴물들이 발견된 모양이었다. 외국에서 발견되어 이름 붙은 놈들답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별로 없다. 드물게 사람을 먹은 놈들만이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말끝을 흐린 태양은 곧 주제를 돌렸다.

“검암 캠프로 의료 지원 요청이 빗발치는군. 연구 팀이 난리가 나겠다. 이렇게까지 큰 균열은 대균열 때도 없었을 거야.”

“구조는 다른 헌터들한테 맡겨요. 퀸 패러사이트의 본체가 직접 저를 노리려고 하면 막아 줄 수 있나요?”

“어려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호는 태양에게서 시선을 돌려 도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한숨 쉬며 지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우리 지호를 그 친구한테 넘길 수는 없지. 가뜩이나 헌터들을 많이 주워 갔더라고. 지금 자기 숙주들만으로 여왕의 호위대 상대할 법도 할걸. 거기에 너까지 얹어지면 상대하기 너무 어렵잖아.”

“실리적인 이유네요. 그런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게 도와줄 거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