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조태양은 실체화된 환상을 완전히 걷어 내고도 들러붙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언짢아하며 어깨를 털었다. 지호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는 현상들이다. 이형 에너지라고 부르기는 결이 다른 힘들. 그는 트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지호를 재촉했다.
“놈이 진짜 인간에게 우호적이라고? 믿을 수가 없군. 민도훈은 원래 사람 싫어했어. 동물 애호가였다고.”
“조 헌터님이 알던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 기억만 갖고 있을 뿐이지.”
“당연히 그렇겠지. 아니지. 모두가 그럴까?”
“모두가요?”
“괴물이 된 실종자들 말이야.”
태양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지호는 그제야 태양이 말을 꺼낸 이후로 내내 서둘렀고, 동요하고 있으며, 긴장하다 못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뇨. 다를 거예요. 다른 괴물들은 그 도플갱어의 특징을 갖지 못했대요. 그래서 괴물들이 도훈 씨를 먹으려고 노리고 있다고 했어요.”
“보통은 어떤데?”
“저한테 물으시는 것보다는…….”
“젠장. 맞아. 놈을 보러 온 거였지.”
건물은 다 망가져 문을 힘차게 잡아당기자 경첩째로 떨어져 나올 만큼 엉망이었다. 괴물들이 한바탕하고 간 지역이라 그렇다. 이것도 골조라도 유지하는 것이 다행인 상황이었다. 유독성 물질이라도 내뿜는 놈이 있었는지 사방이 부식되어 바스락거렸다. 그러나 밤이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망가진 건물. 채 망가지지 않은 전기 설비가 파지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망가졌다.
그 어둠 속에 도훈이 서 있었다.
태양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체격 큰 사람인데도 웅크린 어깨가 안쓰럽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일 뻔했다. 왜 이렇게 겁을 먹었지?
“도훈아.”
지호에게 그러하듯 다짜고짜 시비부터 걸 줄 알았던 태양의 입에서 나온 건 맥없는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지호는 숨을 죽였다. 목소리에서 배어 나온 그리움이 뭣도 모르는 사람마저 눈치를 살피게 했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훈은 달빛에 드러난 태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 웃은 것 같다.
“태양이 형.”
이렇게까지 친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지호는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천장이 높지 않은 건물이었다. 덩치 큰 태양이 갑자기 작아졌다고 느낀 순간, 도훈이 손을 들었다.
“이렇게 불러 주기를 바랐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린 것 같다. 태양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을 떨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를 참는 모양새다. 지호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어, 이쪽은 조태양 헌터라고 해요. 아마 신체 계열에 정신계? 여기 이쪽은 도플갱어 민도훈 씨고요. 편의상 이 얼굴과 이름을 쓰고 있는데, 본인의 인격이 다수 있다고 해요.”
“인격이 다수?”
“많이 먹었거든. 민도훈을 포함해서.”
태양의 기세가 더더욱 험악해졌다. 지호는 이제 둘 사이 중재하기를 포기했다. 생각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상대를 도발할 턱이 없으니.
지호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도훈과 태양 사이에서는 정신계 능력을 이용한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태양 쪽이 훨씬 강하지만 도훈은 능력 다루는 것이 능숙하다. 무작정 밀어붙여 봐야 그 힘을 이용해 오히려 밀려나 버리고, 옆에서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고 있는 지호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튕겨 내는 방향도 조절할 줄 알았다. 태양과 도훈의 싸움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 환상이 보이기 시작하자 태양이 한 걸음 물러난 탓이다.
“빨리 포기하시네.”
“지는 싸움은 취향이 아니라서.”
“뭐야, 뭐 했어요?”
“인사 좀 했어. 민도훈과 자주 그랬던 모양인데. 옛 생각이라도 나셨나 보지? 아쉽게도 그렇게 자세하게까진 기억이 안 나서. 그래도 댁이 기억은 나. 민도훈의…….”
“됐어. 닥쳐. 네놈이 도훈이가 아니면 입을 놀리지 마라.”
태양은 괴로워 보였다. 정신 공격이라도 받았나. 지호는 이형 에너지를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이나 비감지계 능력자들의 기분이 이러할까 생각하며 인상 썼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네요. 사냥이 급하신 줄 알았는데.”
“확인해야 할 게 있었어.”
“도플갱어에게 관심이 그렇게 많으실 줄이야.”
바닥이 또 울렸다. 순간 부근 헌터로부터 지호와 손예린 팀이 부딪쳤던 금속 먹는 괴물 목격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태양과 동시에 해당 사항을 확인한 지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흠, 미등록 각성자를 다른 팀에게 넘겼으니 우리 다시 팀이에요? 사냥 가는 건가요? 근데 저놈은 어떻게 잡아요?”
“구조 작업이 덜 끝났어. 그 전에는 섣불리 위험한 전투에 나서지 마라.”
“흠, 이 근처엔 구조 신호 잡히는 게 없었는데요.”
“도심지 중심으로 한 차례 돌았지만, 아직도 발신된 신호의 절반도 다 접선을 못 했다. 뭘 우선해야 할지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던 거냐?”
“여기로 들어오기 전까지 열심히 사냥 중이었다고요. 이제 겨우 숨 돌리게 됐는데.”
“손예린 헌터에게 그 꼬마를 넘겼다고 했던가.”
“넘긴 것인지 뺏긴 것인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랑 도훈 씨를 미끼로 남겨 놓고 튀신 분이라 다음에 보게 되면 멱살 잡아도 되겠죠?”
“손예린이 올린 보고 안 읽었나 보군. 이지호 헌터가 새로 나타난 괴물에 대한 지식 있는 도플갱어와 동행하고 있으므로 안전거리 유지를 위해 퇴각함. 다른 헌터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건 그 괴물뿐만이 아니야. 도플갱어 역시 마찬가지지. 정신 방벽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네가 이렇게 위험한 자리에서 얼쩡거리다니, 동주 형이 왜 너를 부탁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김 반장의 이름에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 느낌이 비슷하더니 아는 사이일 줄은.
“반장님이 왜요?”
“손예린뿐 아니라 꽤 많은 헌터들이 도플갱어에게 적대적이고, 놈에게 협조하는 너에게도 적대적이야. 아무리 헌터여도 괴물에게 갖는 복수심과 증오심을 완전히 억누르긴 어렵지. 손쉽게 복수할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면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까?”
“도훈 씨가 그들의 원수는 아니잖아요.”
“뭐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겠나?”
총성이 울렸다.
너무 뜻밖의 소리라 거기 모인 셋 모두 영문 모르는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태양마저 어리둥절한 얼굴이자 지호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여기도 군부대가 들어와요?”
“웬 군부대?”
“특수탄을 개발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거든요. 여기가 생각 이상으로 큰 균열이라 헌터들 진입까지 기다리기 어려워서 생존자 구조를 위해 군인들이 들어온다면……. 저 소리가 설명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 마정석 가공탄 말인가?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다곤 들었는데 계획 진행 단계까지 파악해 가며 사냥하는 건 아니라서.”
태양은 투덜거리며 관련 사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호는 두 사람에게서 물러나 있는 도훈에게 손짓했다.
“왜 그렇게 떨어져 있어요?”
“가까이 가면 네 친구가 싫어해서.”
문틀을 사이에 두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둘 사이에 여러모로 끼어 있던 지호는 한숨과 함께 팔짱 꼈다.
“둘 사이에 무슨 깊은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으면 빨리 말해 주고 말 안 할 거면 험한 분위기 만들 생각 마요.”
“민도훈 헌터의 옛 동료였어.”
“그 정돈 나도 알아요.”
“그 이상의 것을 말해 주려면 당신 동료의 허락이 필요해서. 그냥 적당히 협조하는 걸로 하자. 그래야 미움받는 일 없을 테니.”
태양이 둘 모두에게 손짓했다. 미심쩍은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태도. 그는 상황을 브리핑하며 지도를 띄웠다.
“네 말대로 마정석 가공탄이 보급된 모양이다. 현재 남쪽에 군부대 진입했고 균열 구조대와 함께 구조 작업 중. 파악되는 근방 생존자 구조하여 부대에 합류한다. 신체 계열 능력자들로 이루어진 호위 팀이 군대와 함께 들어왔고, 자정부터 생존자 수색 작업이 만 하루 동안 재개될 예정이다.”
“우린 어디로 가죠?”
“저걸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태양이 가리킨 손끝에는 당연하게도 도훈이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연스럽게 지호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난 우리 지호 씨랑 한 몸이라 안 되겠는데.”
“이 균열에 위험한 괴물들이 있는데 그놈들이 저를 노린다나 봐요. 주장하기로는 저를 지켜야 한다는데.”
“지켜? 틈 봐서 널 먹으려고 할 거다.”
“그럴 거면 벌써 서른두 번도 더 먹었을걸. 하나가 되는 것도 물론 매력적인 선택지지만, 타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스릴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앞으로도 쭉 우리 지호랑은 같이 갈 예정인데. 어차피 파트너도 없잖아.”
“누가 파트너 해 준대요?”
지호가 몸서리치자 도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슬쩍 물러났다. 또 저 얼굴이다. 넘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버린 지호는 태양이 펼친 지도 중에 붉은 신호가 제일 많이 발신되고 있는 동네를 가리켰다.
“구래역 쪽으로 넘어가서 검단으로 합류해야겠네요. 군부대 진입 지역이 이쪽이니까.”
“진짜 농담하는 게 아니라, 도플갱어와 함께하면 위험할 거다.”
“확인하러 오셨던 건 도플갱어의 위험성이었나요?”
태양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처음 그가 도훈을 보며 보였던 서글픔과 그리움의 실체를 알게 되면 지호가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지호는 속내를 모른 척하기로 했다. 밝히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총소리가 다시 들린다. 괴물들의 울음소리도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고, 이형 에너지가 불꽃과 함께 휘발됐다. 능력자들 간의 충돌이다.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교전 중이군. 지금 멀어져야 해.”
“도우러 가는 게 아니고요?”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돼. 저쪽에 놈들이 있어. 너희는 상대도 안 될 거다.”
“놈들?”
“이지호 헌터. 너는 이미 놈들의 귀염둥이를 봤잖아.”
지호의 얼굴이 굳었다. 여왕의 호위대. 균열에 들어와 있었다고 했고, 놈들이 데리고 다니던 대형종이 부근에 풀렸으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벌써? 이렇게 빨리? 혼란 때문에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귀염둥이?”
“어, 조태양 헌터 혹시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 정보 본 적 있나요? 코드 레드 원의…….”
“봤다. 죽은 헌터들을 숙주로 쓰고 있는 놈 말이지.”
“전투력 자체를 측정하긴 어려운데, 그놈이랑 비슷한 것들이에요. 우리가 이름 붙여 놓은 게 퀸이라서 우리가 그 정신계 괴물을 퀸 패러사이트라고 부르는 건데 여왕이 따로 있거든요.”
지호의 설명은 짧고 신속했다. 모든 헌터가 해당 정보를 아는 것은 아니기에 반드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경계 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하는 모종의 존재들 이야기를 들은 태양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노려보았다.
“이놈도 똑같은 거 아닌가?”
“아직 선을 넘진 않아서요. 아는 게 많아서 쓸 만해요. 일전에 만난 괴물도 아무것도 없이 마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첨단 장비를 제일 좋아하는 놈이라던데, 기계를 먹으려고 인간 먹기를 꺼리는 놈이기를 바라는 건 너무 긍정적인 바람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