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거 천천히 다시 볼 수 있어요?”
천천히? 왜?
“그게……. 몇 번 더 보다 보면 어딘가 비칠 만한 데가 있지 않나 싶어서요. 눈을 확인하고 싶어서…….”
도훈은 짧게 웃었다. 그러나 환상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손이 눈가에서 떨어져 지호는 다시 문명 한복판에 열린 거대 균열 속으로 되돌아왔다. 헛헛한 기분이었다.
“왜 마저 안 보여 줘요?”
“내가 무슨 편리한 영사기라도 되나 착각한 모양인데, 이건 그냥 내가 경험했던 걸 비슷하게 체험시켜 준 거야. 실제 기억이 아닐 수도 있지. 모든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붉은 눈 같은 걸 인지하고 살아오지 않았다면 더더욱 환상 속에 존재할 리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억으로 재구축된 세계이기에 당연히 눈이 붉을 턱이 없어, 지호는 조금 맥 빠진 기분을 느꼈다.
“그냥 여왕이 이런 식으로 괴물들을 조종한다는 느낌을 느껴 보라고 보여 준 거예요?”
“그것보다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어?”
“뭔지 모를 것한테 조종당하니까 당연히…….”
“맞아. 그 당연함. 여왕의 자식들이라고 느끼지 않을까?”
“그렇겠죠?”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전에 내가 퀸 패러사이트를 만난 적이 있거든.”
두 코드 레드 개체가 접촉했으나 싸우지 않고 갈 길을 갔던 건 다른 헌터들에게도 보고된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도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지호 곁으로 바싹 붙어 속삭였다. 지호는 그를 밀어 내며 거리를 유지했다.
“달라붙지 말고 말해요.”
“이런 비밀 이야기할 때는 귀에 속삭여야 하는 거잖아?”
“전에 코드 레드 개체끼리 만난 적 있다는 보고를 읽은 적 있어요. 별로 비밀 아녜요.”
도훈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서늘한 인상이라 웃을 때의 표정 변화가 극적이다. 지호는 저 얼굴에 넘어가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하며 질문했다.
“퀸 패러사이트도 당신이 먹은 괴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할 셈이에요?”
“주장할 셈이라니. 사실이라고.”
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명백한 의심을 본 도훈은 오히려 콧방귀 끼며 팔짱을 꼈다.
“내기라도 할까?”
“성립되는 거로 하자고 해야죠. 퀸 패러사이트가 저랑 대화하려고 할 리 없잖아요.”
“너랑은 안 해도 나랑은 하겠지.”
“제가 퀸 앞에 있었을 때의 유일한 기억은 놈의 숙주가 될 뻔했던 것뿐인데요.”
“내가 지켜 주면 되잖아?”
“전투는 체질 아니라면서요.”
“맞아. 그러니까 대화해야지.”
“말이 안 통하네.”
어둠 저편에서 괴물들끼리 다투는 여파로 사방이 흔들렸다. 기찻길 옆 도로가 늘 이러할까. 덜덜덜 떨리는 몸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결판이 났는지 한두 놈이 쓰러지고 나머지 괴물이 포효했다. 전투가 끝났으니 식사 시간이었다.
괴물이 괴물을 뜯어 먹는 모양새는 그로테스크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헌터로서는 아쉬움이 앞선다.
“놈들이 어떤 건 사냥하고 먹고, 어떤 건 죽이기만 하고 지나가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도훈 역시 사냥한 것을 먹어 흡수하는 종류의 괴물이었지. 지호는 흠, 하고 짧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까 그 환상도 보고 지금 이런 이야기까지 들으면 제 안에서의 당신 인식이 진짜 괴물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고요. 그럼 저는 또 당신이 사람들 사는 곳으로 나가도 되는 존재인지부터 고민해야 하는데…….”
“좋은 생각이 아니네.”
“그렇죠?”
대형종끼리의 전투는 유독 거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형종이 작은 괴물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지 않아 대부분 그것끼리의 싸움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헌터들이 대형종만 사냥하게 되는 사태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크기가 클수록 위장도 큰 걸까. 그래서 구미에 맞는 놈들만 사냥하는지도 모르겠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이야.”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훈이 운을 떼자 지호 역시 바깥에서 눈을 돌렸다. 오래 보고 있을 장면은 아니다. 눈이 좋아 어렴풋한 장면들이 얼추 보였으니까. 식욕이 달아나기 딱 좋은 식사였다.
“퀸 패러사이트 이야기요?”
“그 녀석도 나랑 똑같은 걸 원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무슨 개소리예요. 다짜고짜 폭탄 던지지 말고 차근차근 설명해요.”
“이쪽으로 넘어오고 싶어 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여기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하고 생각하게 됐고. 그놈이랑 자세한 이야길 해 본 건 아니야. 지나가면서 이야기 좀 나눈 게 다니까.”
도훈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가 왜 인간 세상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제공을 한 것이 퀸 패러사이트라고.
지호는 그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보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지호가 도훈을 사람이라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헌터들을 비롯해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거부할 것이다. 괴물이 된 다른 실종자들 역시도.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그러고 보니 도훈 씨가 우리 사는 곳으로 넘어오고 싶은 이유는 뭐였어요? 진짜 퀸 패러사이트가 그런 이야길 했다고 호기심이 생겨서?”
도훈은 늘 그쪽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한 적이 있었던가. 지호의 질문에 어둠 속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도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드디어 나에 대해 알고 싶어진 거야? 긍정적인 신호로군. 원래 서로를 알아 가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헛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요.”
“당연히 살려고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를 쫓아다니던 포식자들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물론 타당한 이유이기는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뭔가가 부족했다. 도훈 또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여왕이 사는 세계와 균열 경계 저편, 그리고 지호네 쪽 외에도 다른 세계가 무수히 많다고. 왜 하필 이쪽으로 건너오고 싶어 할까. 정말 손쉬운 먹이가 많아서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 보현이 말하는 악몽이 실현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도훈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 생각이 툭 끊겼다. 지호는 놀라 물러났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민도훈 씨가 생각이 없는 거죠.”
“생각이 없다니, 섭섭한데.”
“그럼 이유가 뭔데요. 이것저것 재주도 많고 능력도 꽤 있는 모양인데. 여왕의 호위대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만큼 실력 있는 축에 속하는 거 아녜요?”
“들으면 후회할걸.”
“뭐 얼마나 대단한 이유라고 후회까지나.”
대형종이 몸을 일으켜 창으로 들어오던 달빛마저 가려졌다. 놈은 처음보다 느릿한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암흑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도훈이 속삭였다.
“내가 아는 세계 중에 너희가 사는 곳만이 포식자 없이 안전해. 너희는 나를 봐도 복수하거나 죽이려고는 하지만 산 채로 움직이지 못하게 망가트려 가둬 놓고 신체 일부를 뜯어 먹으며 능력을 훔치려고 들지는 않을 거라고. 그 와중에 죽지 못하게 아가리를 열어 먹이를 쑤셔 박지도 않을 거고.”
대형종의 머리 위로 달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어렴풋이 스며드는 차가운 빛. 입만 벙긋거리던 지호는 결국 사과했다.
“미안해요.”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내게 필요한 건 안전하다는 감각이지. 그리고 실질적인 안전이 따라오면 더 좋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희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해. 그래서 널 재촉하지 않고 있잖아.”
“재촉한다고 방법이 나오진 않아요.”
“알아. 하지만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는 있겠지.”
대형종의 싸움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밤. 크고 작은 소란은 있었으나 대체로 밖은 조용한 편이다. 정체 모를 괴물도 더 보이지 않았다. 혹은 직접적인 위험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쳐서 그렇거나.
보이는 것이 없어도 어두운 균열 내부는 여전히 위험하다. 감지 파장에 잡히는 것만 해도 낯선 것이 수두룩했다. 도훈이 주변을 둘러 깔아 놓은 환상 트랩에 걸려 어기적거리는 놈들 뒤를 친다. 깔끔한 마무리. 사냥에 익숙해지는 것과 별개로 실력이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층 아파트 단지가 통째로 무너졌다. 저기 숨어 있던 사람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공장 지대와 붙어 있던 주거지라 새 건물보다는 낡은 건물들이 많았다. 약한 충격에도 쉽게 망가지다 보니 한쪽은 아예 폐허였다.
그 틈바구니를 뒤적이는 괴물들을 보니 무너진 건물들 틈에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하러 가기엔 늦었다. 구한다 해도 살아 있을지 알 수 없고.
지호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부근에 잡히는 신호 중 헌터는 없다. 제일 가까웠던 손예린 헌터 팀은 어느새 꽤 멀어지고 없었다. 어두운 사이에 이동하는 걸 보니 그쪽 감지계 헌터가 힘깨나 쓰고 있는 모양이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사이 메시지가 몇 개 뜬다. 지호의 임시 파트너 조태양 헌터의 것도 있었다.
[조태양 : 손예린이 보고 올린 거 진짜냐? 도플갱어?]
[이지호 : 알던 괴물이에요.]
[조태양 : 니미. 내가 알던 괴물은 다 시체인데 그놈은 좀비라도 되나?]
[이지호 : 인간 측에 우호적이면서 정보 제공을 꺼리지 않는 지능 높은 괴물이에요. 무작정 죽여 없애는 것보다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야죠.]
[조태양 : 이쪽 팀 사냥 끝났어. 거기서 멀지 않아. 그쪽으로 가겠다.]
[이지호 : 여기로요? 왜요?]
[조태양 : 인간의 기억을 가진 괴물이라며. 궁금한 게 좀 많거든.]
뭐가 궁금한 건지 어디쯤 있는 건지 그쪽 상황이 어떤지 아무리 물어도 그 이상의 답변이 돌아오질 않았다.
“헌터 하나가 이쪽으로 온다는데요.”
“누군데? 친구?”
“아뇨, 이번에 균열 진입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같은 정신 계열이겠네요. 저도 안 친해서 잘은 몰라요. 적당히 경험 있고, 적당히 험악해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신호가 울렸다. 지호의 이름은 지도를 확대해 보면 여전히 두 사람으로 잡히겠지만 멀리서는 한 명분으로 보일 것이다.
“무슨 조잡한 걸 쳐 놨냐?”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지호는 황급히 일어났다. 벌써 왔나? 시간을 들여다보려는데 으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문이 아니라 깨진 창문을 밟고 밖으로 뛰어내린 지호는 희뿌연 환상 막에 휘감겨 손을 휘적거리는 태양을 발견하곤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같은 정신 계통은 쉽게 파훼할 수 있다고 했는데.”
“뭐? 당연하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태양은 끙끙거리며 허물 같은 환상을 걷어 냈다. 무슨 거미줄 헤치듯 휘적거리는 게 웃기기도 했다. 하루 만에 재회한 임시 파트너는 멀쩡했지만, 지호는 그렇지 않았다. 태양은 그의 동료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웃음 쳤다.
“너 혼자 괴물 잡으면서 영화라도 찍었냐?”
“그만큼 험난했어요. 지원 하나 없더라고요. 제 멘탈 걱정돼서 공지만 슬쩍 보고 커뮤니티는 안 둘러봤어요. 손예린 헌터가 뭐라고 보고 올렸던가요?”
“별말 없었다. 시답잖은 뒷담화 같은 거지. 그런 건 신경 쓸 거 없다. 어차피 실력 없어서 다섯 이하로는 팀 꾸리지 않는 졸보 새끼들이 입 터는 거야. 안 봤으면 나중에도 보지 마라. 도플갱어는?”
“안에 있어요. 진짜 도훈 씨 보러 온 거예요?”
“어. 죽은 민도훈이랑 안면이 있어서.”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사람투성이다. 어이없었으나 그 정도 반반한 얼굴이면 몰라보는 쪽이 더 이상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처 지호는 불평하기를 그만두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네. 얼굴 바꾸라고 해야겠어요.”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더냐?”
“아뇨. 그게 어떻게 바뀌는지 자기도 잘 모른대요. 우리가 어떻게 되살아나 각성하고 능력을 갖추게 된 건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거랑 비슷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