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들었죠? 제가 제일 아끼고 의지하는 사람이 지금 도훈 씨를 버리고 밖에 나오라고 외친 거.”
“임보현 헌터 말이냐?”
“어떻게 알-고 있는 게 아니고 헌터였던 당신이 많다면 알 수밖에 없겠군요.”
“그 정도의 사람조차 강경파라면 힘들겠어. 나중에 넘어가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야 할까 봐.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얼굴의 나를 도플갱어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맘대로 못 변한다면서요.”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 주면 될 것 같은데.”
“닥쳐요.”
쿠구구구. 땅이 미세하게 울린다. 지호와 도훈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괴물들은 훨씬 거대하고 존재감이 강했다.
“어제 있던 데선 저런 놈들은 못 본 것 같은데요.”
“아직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할 때라 사람들한테까지 관심 두진 않겠지.”
“아직이군요.”
“그래도 급성 균열보다는 정리되는 데 오래 걸릴 거야. 모인 놈들도 여기 어떤 놈들이 모여 있는지 몸으로 부딪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시야 좁은 놈들이 많거든.”
말은 가벼웠으나 도훈의 시선은 내내 밖을 향해 있었다. 주의 깊은 시선. 하기야 저놈들과 함께 균열 밖 환경에서 생존해 온 괴물일 테니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다.
“여왕의 호위대 놈들도 어둠 속에서 움직일까요?”
“오늘은 아닐 거다. 균열 열린 첫날이잖아. 뭐가 넘어왔는지 파악부터 하겠지.”
“제가 여기 올 거란 걸 어떻게 알고 그놈들이 들어왔을까요?”
“요사이 여기저기서 계속 보이지 않았어? 저쪽도 너를 추적했겠지.”
“그러니까 왜일까요? 처음부터 저를 찾았으면 몰라. 이제 와서…….”
“네 존재를 모르다가 최근에 알게 된 거라면?”
만난 괴물 중에 목숨 멀쩡히 부지하고 돌아간 놈이 뭐가 있더라. 지호가 아는 바로는 경계 저편으로 넘어갔을 때를 제외하고 균열 안에서 만난 것들은 대부분 사냥했었다. 지호는 곰곰이 생각하다 질문했다.
“놈들을 떠올리게 할 만한 건 붉은 눈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요.”
“붉은 눈?”
“가끔 그런 괴물들이 있어요. 그것들 자체가 눈이 빨간 건 아닌 것 같은데, 특정한 놈들이 눈이 빨갈 때가 있어요. 나중에 다른 데서 다시 발견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경계 너머에서 만났던 어린 친구가 호위대를 붉은 눈의 뱀이라고 불렀었어요. 다른 호위대를 본 적은 없는데, 그놈들 눈이 빨간가요?”
“눈알을 관심 있게 쳐다본 적은 없는데, 그렇게 인상 깊은 색이었던 것 같지는 않군.”
“그럼 붉은 눈 가진 괴물들의 정체는 뭘까요? 그 뱀 같은 것뿐 아니라 다른 놈들도 일부가 그랬었어요. 괴물들 사이에 유행하는 컬러 렌즈는 아닐 거 아녜요.”
도훈은 밖에서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대형종에게서 눈을 떼며 답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이 건물의 불이란 불은 다 끄는 게 좋겠어. 저건 빛을 감지하는 종류야. 밝은 곳으로 무작정 뛰어들어 갈 거다.”
지호는 도훈이 쳐다보던 것을 응시하며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빛으로 움직임을 감지하는 대형종? 분명 본 적 없는 놈인데 익숙한 느낌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놈을 쳐다보던 지호는 뒤늦게 떠올렸다.
“처음 각성하고 나서 저놈을 본 적 있어요. 그때는 움직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시야가 꽤 넓은 놈이야. 시선이 느껴져서 피하는 게 어렵진 않은데 발견되면 귀찮아지지. 그러느니 어둠 속에 있는 게 나으니까.”
“저놈은 눈이 안 빨간데.”
“사실 대부분 안 빨갈 거다. 눈알이 붉은색이면 아마 시력 장애가 있을걸. 나 중에는 의학 지식 있는 내가 있어. 이 정도는 믿어 둬라.”
“치유계 능력도 있나 봐요?”
“몇몇 있었지. 민도훈도 그렇고.”
도훈은 자신을 남처럼 지칭하더니 싱긋 웃었다. 붉은 눈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다는 건 일부 이해했다. 그러나 그런 놈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지호는 죽음의 순간부터 그 눈을 보았었다. 당연히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혹시 다른 뱀 호위대 보면 놈들 눈이 붉은지 확인해 줄 수 있어요?”
“내 주변으론 접근을 안 한다니까? 대신 자기들이 데리고 다니는 놈들을 보내. 가까이 가면 귀찮아진다고. 그러다 진짜 위험한 놈들이라도 오면 네가 아는 나는 더 없을 테니까.”
처음 도훈을 만났을 때 그는 엄청난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여왕의 자식들이 강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있잖아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무슨 포식자들한테 쫓기고 있었던 거 기억나요? 그것들이 여왕의 자식인가요?”
“아냐. 여왕의 자식들은 똑똑해. 포식자처럼 삶의 이유 자체가 먹는 행위인 놈들을 거기 비유할 수는 없지.”
“똑똑하다고요? 가끔 나타나는 지능 높은 괴물들처럼?”
“이미 하나 알잖아. 퀸 패러사이트.”
“뭐라고요?”
“여왕의 자식들이 갖는 목표는 다른 놈들처럼 먹고 먹어서 강해지고 똑똑해지는 게 아니야. 그놈들은 태생부터 강하지. 여왕에게서 분화되어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야. 의식의 한구석을 여왕에게 내어 주는 대가로 받은 힘이니 삶의 목표 자체도 놈에게 영향받을 수밖에. 그래서 산 괴물 중 강하고 똑똑하면서 길을 뚫으려는 것들을 여왕의 자식으로 분류하지. 붉은 눈이라. 아마 여왕의 의식이 발현할 때 그렇게 될 것 같은데?”
땅이 울린다. 빛을 쫓아 움직이는 대형종이 두 사람이 숨은 건물을 지나치고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걸 시험해 보자고 소리를 낼 만큼 멍청한 사람은 거기에 없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다 괴물이 충분히 멀어진 뒤에 지호가 벼락을 맞은 듯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에 대해 알고 있었잖아요?”
“아니지. 여왕의 자식들이 여왕에게서 종속되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뿐이지 그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고 있던 건 아니잖아. 방금 말하면서 대충 추측해 본 거고, 아닐 수도 있어.”
“엄청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요. 제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일단 드러난 여왕의 자식이란 놈이 둘이에요. 하나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들의 불안을 부추긴 인질범, 또 하나는 지금 당신이 말한 퀸 패러사이트죠.”
“흠, 그렇게 되나?”
“하지만 눈이 붉은 괴물은 한둘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여왕의 의식이 드러나요?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너랑 비슷해. 내가 먹은 것 중에 여왕의 수족이 있었거든.”
지호는 멈칫했다. 도훈의 눈이 붉게 변하는 일은 없으나 자꾸 눈을 응시하게 됐다. 그는 픽 웃으며 손을 뻗어 지호의 눈 앞을 가렸다.
“아까 보여 준 김에 편히 써야겠다. 저항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 봐. 이런 식이니까.”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이더니 몸이 앞으로 휙 기우는 느낌이 나며 순식간에 주변이 바뀌었다. 빨려 들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지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훈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환상이니까 감지 파장 쓰지 마. 금방 깨지거든.”
“제가 환상인 걸 인지하면 사라지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허접하면 어떻게 쓰냐. 감지 계열 능력이 있어야 쉽게 풀리는 거야. 앞을 봐.”
분명 어둠뿐인 실내였는데 어느새 모르는 균열에 와 있다. 희미한 빛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달이 떠 있다. 부근을 돌아다니는 위험해 보이는 괴물이 많지만, 지호는 괜찮다. 그림자에 납작 엎드려 있는 괴물이니까. 긴장 때문에 몸의 비늘이 차르륵 누웠다. 기괴한 감각. 지호는 그의 것이 아닌 다리가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윽, 기분 이상하네요. 내 팔다리가 아닌데 내가 움직이는 것 같아.”
“많은 나들이 인간이라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된 거지, 처음에는 나도 엄청 헤맸어. 입 열지 말고 차분히 동조해 봐. 네가 이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도훈의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눈가에 느껴지면서 동시에 괴물이 되어 있으니 낯설다 못해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호는 차분히 집중했다. 괴물이 내딛는 앞발과 흔드는 꼬리, 돌리는 눈알에 신경을 쏟자 감각들은 곧 지호의 것이 되었다.
건물 벽에 달라붙은 채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찹찹 뜯어 먹는다. 균열에도 식물은 있었다. 먹이로 삼는 것이 동물이라서 문제지.
적당히 뜯어 먹으면 식물의 본체가 그를 먹잇감으로 인식해 함정을 파 온다. 그 전에 움직여야 했기에 괴물의 입은 바빴다.
식물의 이파리들이 위험한 각도로 서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괴물은 빠르게 움직였다. 짧은 다리로 벽을 박차고 아래로 떨어지는 틈에 몸을 둥글게 말아 바닥에 몇 번 튕기고 나면 끝. 그러고 나자 괴물이 있던 자리를 거의 다 감싼 식물이 위협적으로 뿌리를 내뻗는 것이 보인다. 잡히기 전에 줄행랑. 조금 더 늦었으면 먹는 쪽이 아니라 먹히는 쪽이 되었을 것이다.
지호는 괴물의 눈으로 보는 균열에 감탄했다. 사람들 사는 곳 부근을 지났던 지호의 이전 기억과 달리, 이쪽은 완전한 별도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건물을 비롯한 문명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야생. 아마존에 가까우나 주변을 채운 생태계의 규모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달리던 괴물은 우뚝 멈추었다.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에 지금 움직임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뒤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지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돌아본다는 생각을 했다.
그르륵.
괴물 목에서 뭔가 끓는 소리가 난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를 한 방에 삼켜 버릴 수 있는 포식자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주변에 뭔가 있다는 감각이 없는데도 그런 기분이 든다니.
괴물과 동화된 지호의 감각은 그 괴리를 민감하게 느꼈다. 정신 간섭이다. 정신계 괴물이었구나. 정신 계열 능력을 사용하는 이들의 감각조차 간접 체험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동화가 깨진다. 이유가 뭐지? 잠시 잊었던 도훈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머릿속에 울렸다.
이것이 이 지역을 살던 나야. 여왕이 나를 들여다보던 적이 많지는 않았지. 약한 정신계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여왕이 나를 통해 세상을 관찰할 때도 반쯤 거부할 수 있었어. 이렇게 위험한 곳에 나를 세워 두며 주변을 둘러보려 한 탓에 빈틈이 생겼지.
그건 도훈의 말이자 도플갱어의 말이었다. 정확히는 지호가 알고 있는 민도훈이 아닌, 괴물의 자아가 그에게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왕의 존재가 뒤에서 느껴진다.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주변에 훤히 노출된 언덕배기를 기어오른다. 몸을 숨길 수 없다는 불안감에 전신의 비늘이 차르륵차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곤두섰다.
거부하고 반항하는데도 뭔가가 그를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간다. 목줄이 없는데도 목줄에 끌려가는 기분. 위험하다. 사방에서 그를 발견해 입맛을 다시는 것 같다. 포식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머리를 밟고 등을 찢을 것만 같았다. 고지에 도착한 건 금방이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찾는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리들을 옥죄고 있던 감각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뒤에 뭔가 있었다는 느낌 역시도.
괴물은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위험한 곳에서 그림자로 모습을 숨기려고 황급히 언덕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모습 숨긴 그늘에서 뭔가에 먹혔다. 도플갱어였다.
나들과 하나가 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야. 그 전까지의 기억은 좀 흐릿하지. 모든 나의 모든 시절 기억을 가진 건 아니야. 그랬다면 좀 혼란스러웠겠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게 뭐예요?”
방금 그 감각. 여왕이 몸을 조종해 마음대로 움직이며 그가 원하던 것을 찾을 때의 감각을 느껴 보게 하고 싶었어. 만약 짐작한 게 맞다면 그 순간 내 눈은 붉은색이 되었겠지[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