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퍼석. 비닐 밟는 작은 소리.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직원 휴게실에서 언제 나온 건지, 준영의 떨리는 시선과 지호의 눈이 마주친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그를 안심시키려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도훈은 헌터 차림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멀쩡한 헌터로 보일 것이다.
“깼어요? 우리 얘기하는 게 좀 시끄러웠나?”
“아녜요. 괴물 소리 때문에 좀 전에 나왔어요. 두 분이 친밀해 보여서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표정은 떨떠름한 것이 말과 좀 달랐다. 준영의 시선은 자꾸만 지호가 아니라 옆에 앉은 도훈을 향했다. 남자가 보기에도 잘생기긴 한 모양이다. 지호는 이 인간성 부족한 도플갱어가 말을 맞춰 줄 수 있을까 염려하며 준영을 소개했다.
“어. 이쪽은 강준영이라고 해요. 아까 낮에 각성한 신참 각성자고요. 안정기 후에 데리고 나가려고 제가 보호 중이에요. 알다시피 방금 각성한 각성자는 좀…….”
“맛있는 냄새가 나니까.”
도훈이 싱긋 웃었다. 별것 아닌 농담 같은 표현이지만, 사정 아는 지호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은 안 먹는다고 했으니 여기서 갑자기 준영을 습격하는 일은 없겠지? 주유소 건물 전체를 방벽으로 감싸고 있어, 그 안에 들어온 도훈이 준영의 존재를 눈치채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가요? 며칠 있어야 나갈 수 있단 것밖에 몰라서……. 괴물이 각성자를 맛있게 생각해요? 그럼 일반인보다 헌터한테 더 관심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다행히 준영은 도훈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가기도, 그렇다고 둘 사이에 끼기도 어정쩡했던 준영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안쪽을 가리켰다.
“저, 여긴 좀 춥지 않으세요? 바람도 불고 천장도 다 뚫려 있고…….”
오래 앉아 있으면 밤이슬이 내려앉아 몸이 차가워지긴 할 것이다. 도훈은 신체 계열 능력자라고 봐야 하나? 모습이 이리저리 변형되는 개체라 그렇게 튼튼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르면 물러 보였지.
그래도 처음 나타날 때 다리를 뛰어넘어 온 걸 보면 아주 연약한 몸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그러니 괴물들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도 준영의 제안이 썩 반가웠다. 도훈을 경계하지 않고 헌터로 여기니 함께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지호는 활짝 웃으며 그의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들어오라고 말하려고 나와 준 거예요? 고마워요.”
준영은 머뭇거리다 대답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휴게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수줍음 타나? 도훈은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속삭였다.
“내가 맘에 안 드나 봐.”
“그럴 리가요? 계속 보던데. 반대 아닌가?”
도훈은 키득키득 웃으며 지호의 곁에서 슬쩍 떨어졌다.
“네가 눈치가 없어서 좋아.”
“욕을 칭찬처럼 하지 마요.”
“튼튼한 진짜 헌터님이야 괜찮겠지만, 연약한 가짜 헌터는 안에 들어가는 게 좋겠어. 때마침 초대도 받았겠다.”
도훈은 휴게실 문을 휙 열고 들어갔다. 썩 넓은 곳이 아닌 방이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거기 의자 하나 놓으면 끝인 곳. 들어가자 침대에는 준영이 앉아 있고 의자엔 도훈이 앉아 있었다. 셋이 들어오자 어째 좀 비좁은 느낌이다. 도훈은 자기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여기 앉아.”
지호의 어처구니없단 얼굴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준영은 얼른 다리를 접으며 침대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아니,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요.”
“나한텐 왜 고맙다고 안 해?”
“그딴 게 고맙겠어요?”
지호는 도훈이 만족할 만큼 으르렁거렸다. 둘이 투닥거리는 걸 듣고만 있던 준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두 분 사이 좋네요. 어쩌다 알게 된 사이예요?”
“내 생명의 은인이야.”
도훈이 툭 던진 말은 준영을 움츠러들게 했다. 지호 입장에서야 뭐가 생명의 은인 수준까지 가겠나 생각할 정도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외엔 할 말이 없다.
“이지호 헌터님이 걱정돼서 균열에서까지 달려오신 건가요? 다른 분이랑 팀이셨는데…….”
“우리 지호가 겉으로 보기엔 좀 보호받을 상이잖아. 알고 보면 강한 헌터님이라 든든하지만, 그래도 혼자 둘 수는 없지.”
준영의 입으로 지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텐데도 도훈은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넘겼다. 좀 전에 인간성이 부족하네 마네 생각했던 건 다 헛된 걱정이었다. 도훈은 과할 정도로 잘 적응하고 있었다. 많은 인격의 도움 덕분일까? 지호에게 친밀한 척 구는 이유를 제대로 짐작하는 건 좀 어려웠다.
“우리 지호요.”
“헛소리 말고 해 뜰 때까지 쉬고나 있어요. 준영 씨도 마찬가지예요. 여길 지나다니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균열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요.”
“헌터님부터 쉬셔야 하는데…….”
“저는 안 자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어요.”
지호는 단호히 말하면서도 벽에 등을 기댔다. 기댈 곳이 있으면 기대고 싶고, 누울 곳이 있으면 눕는 게 사람 심리인 법이었다.
휴식이 필요한 건 도훈도 마찬가지였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조용해졌다. 앉은 채 잠든 걸까? 불편할 텐데.
꾸벅꾸벅 졸던 준영의 머리가 지호 어깨로 툭 떨어진다. 이대로 상황판을 켜면 불빛이 눈꺼풀 위로 아른거리겠지. 지호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 괴상한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속으로 한숨부터 내쉬었다.
준영에겐 도훈이 헌터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지. 고작 이틀 정도만 같이 있는 것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도훈 역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정말 균열로 넘어가는 힘을 쓰지 말라고 말해 주기 위해 균열을 가로질러 지호를 찾아낸 걸까? 지호를 만날 거라곤 어떻게 생각했지? 핸드폰을 주워 지호 정보를 인식시키는 건 여기 와서야 파악한 수단일 터였다. 그 외에도 지호를 찾아낼 방법 같은 게 있나? 그럴 수가 있을까?
수상쩍은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묻지 않는다. 무작정 불안해하는 준영만 데리고 은신처를 찾는 것보다는 뭔가 아는 거라도 많은 도훈의 도움이라도 있는 게 나을 테니.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울 때에 도훈이 나타났기에 세 사람이 함께 쉴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해가 뜬다. 긴 포효와 함께였다.
닭 소리 비슷하게 아침마다 우는 놈들도 있나. 지호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해가 떠오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둡지만, 주변은 분간할 정도의 빛이 세상을 밝히기 시작한다.
“헉, 죄송합니다.”
“일어났으면 간단히 씻고 와요. 먹을 것 좀 챙겨 둘게요.”
준영은 자기가 지호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었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지호는 그를 고민만 하게 두지 않았다. 생각할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었으니까.
준영이 씻으러 나간 뒤 도훈을 깨우려던 지호는 이미 눈 뜨고 있는 얼굴과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말했다.
“뭐 따로 준비할 필요 없죠? 와서 손이나 좀 거들어요.”
“아침 인사는 없고?”
“뭐 필요한데요. 죽빵?”
“차가워라.”
부서진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챙겼다. 물 같은 것들은 많을수록 좋았다. 어차피 지호가 물건이 무거워 들고 갈 수 없는 사람도 아닌지라 부피가 문제지 무게가 문제는 아니다. 손으로 들 수 없어도 상관없다. 염동력이 있었으니까.
박스 하나를 접어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지호의 편리한 수납 방식을 본 도훈은 지시하는 것들을 챙겨 오며 물었다.
“저 꼬마가 나를 질투하는데.”
“껍데기 잘난 거 알겠어요. 그만 좀 해요.”
“아니 그 이야긴 아니었는데……. 역시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어?”
지호는 대답 없이 행동을 빨리했다. 이틀만 버티면 되니 음식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약을 좀 더 챙기고 물을 잔뜩 담는다. 마시는 것뿐 아니라 씻는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었다.
“나한텐 까칠한데 애한텐 잘해 주길래.”
“애잖아요.”
“너도 나들 보기엔 엄청 애야.”
도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지호는 그에겐 썩 필요치 않은 진통제 종류도 챙겼다. 나중에 다른 팀을 만났을 때 임시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어느 쪽으로 갈 거야?”
“몰라요. 일단 외곽으로 빠질까 하는데요.”
“경계 쪽? 며칠 있다가 가면 안 돼?”
“상황 봐야죠. 왜요?”
“그쪽엔 파수꾼이 있어서.”
도훈의 말투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방금 그 대답만큼은 그렇지 않다. 지호는 아직 준영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파수꾼? 뭘 지키는 놈인데요?”
“이 정도 규모의 균열이면 나뿐 아니라 다른 것도 섞여서 넘어올 수 있어. 짐작 못 한 건 아니겠지만.”
“뭐가 넘어왔죠?”
“날 구해 줬으니, 나도 너를 구해 주지.”
도훈은 구체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대신 애매한 말로 얼버무리며 웃었다. 준영이 물기 덜 마른 머리로 걸어 나온 탓이다. 아무에게나 모든 이야길 해 대는 놈은 아니라는 점에서 꽤 점수를 줄 만했다. 준영에게 허름한 수건을 던져 준 지호는 물건으로 가득 찬 상자를 띄운 채 손짓했다.
“뭐 엄청난 괴물이라도?”
“어. 그것들이 왔거든. 호위대 말이야.”
준영이 올 때면 말조심하는 지호를 보며 도훈 역시 단어 몇 개를 말 속에 숨겼다. 간과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당신을 쫓아왔나요?”
“나였으면 그걸 꼬리에 달고 당신을 찾아왔겠어? 우리 지호 씨 위험하게.”
물건 담은 상자 위를 포개어 닫던 지호의 손이 약간 멈칫했다. 여왕의 호위대가 지호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마주친 일이 없지는 않았다.
경계 저편, 흰 구슬비 내리는 어두침침한 세계에서 홀로 실종자들을 지키고 있는 환을 생각한다. 어린아이 같은 말투 역시도.
그 앞에서 여왕의 호위대를 봤었다. 정확히 지호를 찢어 죽인 것과 같은 모양의 뱀 괴물을.
그것들은 거기에 자주 나타났던 걸까. 아니면 지호를 쫓아온 걸까? 후자라면 곤란해진다. 지호는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조차 상대하지 못했다. 진짜 여왕의 호위대는 얼마나 어마어마할까. 존재를 상기하는 것만으로 다리가 떨려 오는 것들이다.
“정신 차려. 나 두고 딴생각하는 거야? 섭섭한데.”
지호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엉뚱한 사람이 대신 입을 열었다. 준영은 조금 상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두 분이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됐고, 출발하죠. 민도훈 씨는……. 신체 계열인가?”
“따라갈게. 알아서 갈 수 있어.”
지호는 도플갱어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나 파악하고 싶었지만, 도훈은 쉽게 자기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전에 상원의 진술을 들었을 때는 신체 계열은 아니었던 것 같았고, 이형 에너지 계열은 확실했던 것 같다. 그사이에 먹은 개체가 많을 테니 다른 능력이 생겼을 확률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나머지 능력이 어떨지 가늠하려는 때였다. 바닥이 쿵쿵쿵 울리기 시작한다. 울림이 점점 거칠어졌다. 대놓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양. 세 사람 모두 당황했다. 지축의 울림이 지척에 오기 전, 지호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버리고 준영에게 외쳤다.
“이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