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16. 환상들
도로를 따라 꽤 올라오자 외딴곳에 떨어진 주유소가 있었다. 부근을 한바탕 쓸고 간 괴물이 있는 모양인지 편의점 있는 건물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발자국도 영역 표시하듯 찍혀 있었다.
주의해서 봐야 한다. 이놈이 다른 괴물과 싸우며 영역이 바뀌는 게 아니라면, 녀석은 자기 구역을 돌아다니느라 이쪽을 몇 번이고 지날 것이다. 찍힌 자국이 이 미터는 훌쩍 넘었다.
고가도로가 무너져 길 한쪽이 완전히 막혔다. 돌아다닐 차도 없었지만, 그 덕분에 시야 한쪽이 완전히 막힌 느낌. 반대로 말하면 그들도 좀 더 속 편히 움직일 수 있단 뜻이다.
준영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피곤할 법도 하다.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에너지 소모는 더 극심했겠지. 정신적 피로도 무시할 게 못 된다.
[최소민 : 지호 씨 어디 갔어요? 교회 다 무너졌던데.]
[이지호 : 애기 각성자 들고 튀었어요. 대형종 둘이 거기서 싸우더라고요.]
[최소민 : 지원 갈까요? 은신처 찾았어요?]
[이지호 : 잠깐 정도는 눈 붙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보다 동행이 지쳤는데, 신체 계열이 아니라서 체력 분배가 어렵네. 그래도 치유계 병행이라 어찌어찌 버티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최소민 : 도움 필요하면 말해요. 다른 헌터들 팀에서 지호 씨랑 있던 헌터를 만나서 놀랐다고요.]
[이지호 : 갈라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혹시 다른 미등록 각성자 찾으면 저한테 보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단체로 보호하다 같이 데리고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지호는 소민에게 좌표를 전송했다. 하나와 지윤은 응답이 없다. 균열 밖이 바쁘기는 한 모양이었다.
[최소민 : 이번에 파견된 본부 사냥 팀이 베테랑이라, 괴물들끼리 싸움 유도해서 손쉽게 개체 수를 줄이고 있다고 했어요. 좋은 소식 있으면 또 알리러 올게요.]
대화가 끝나자 태양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다. 어디까지 튀는 거냐는 투덜거림과 현황 알림이다. 소민이 말했던 베테랑 사냥 팀이 태양이 합류한 팀인 모양. 대형종끼리 싸움을 붙이면서 중형종 여럿을 사냥했고, 그 와중에 군집 이룬 곳 하나를 박살 냈다는 이야기가 띄어쓰기도 없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조태양 : 헌터들 위치 수시로 확인하면서 이동해라. 만약의 경우에 다른 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 내가 다시 돌아갈까?]
[이지호 :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제 일이 괴물 사냥도 아닌데요.]
[조태양 : 정 숨을 곳이 없으면 사냥 팀 쪽으로 들어와라. 이쪽은 보이는 놈들 대부분을 사냥하니까 차라리 안전할 수도 있어.]
[이지호 : 가뜩이나 미성년자에 심약한 학생인데 그런 거 보면 잘도 버티겠어요. 여기 사람도 얼마 없는 곳이라 괜찮을 것 같아요.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죠.]
또래 심정이라 잘 아는 거냐고 비꼬면서도 무사하라는 인사를 남기며 태양이 메시지를 끝냈다. 사냥 팀으로부터 사냥 보고가 줄기차게 올라온다. 굳이 태양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순조롭게 사냥하는 와중인데도 사방이 소란스럽다. 이 밤 내내 괴물들이 싸워 대겠지. 안정기가 왔을 때의 조용하던 균열 분위기가 꿈만 같다. 지금은 경계 저편이 그러하듯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단층 건물인 주유소 안쪽엔 스프링 꺼진 침대도 있고 다 낡아 너덜너덜한 의자도 있다. 아무리 허름해도 맨바닥에 눕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준영을 거기 눕혀 둔 채 편의점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챙긴 지호는 구석에 그것들을 쌓아 놓았다. 준영이 일어나면 금방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연락이 오지만 모든 연락에 일일이 답하기엔 피곤하다. 충전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헌터 보급용으로 새로 준비하고 있는 기종은 콘센트만 있으면 바로 충전할 수 있게 무슨 기능을 끼운다고 하는데, 지호 건 여전히 구형이다. 한때는 신형이었는데 새 기기가 줄기차게 나오는 시대를 살다 보면 아무리 새것이어도 눈 깜짝할 사이 낡아 버린다.
준영의 숨소리만 들리는 실내가 바깥보다 고요하다. 도로를 내달리는 괴물의 긴 울음소리. 지호가 염려했던 대로 부근을 돌아다니는 놈이 있었다. 다행히 이쪽을 들여다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주유소에 꽤 근접했다.
폭발하거나 하면 큰일인데.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니 주유소 옆쪽 밭으로 들어가 그 부근을 헤집으며 식물들을 뜯어 먹는 것 같았다. 녀석이 채식주의자라면 차라리 좋을 텐데. 아마 보이는 걸 다 입에 집어넣고 있는 것일 터.
“안 주무세요?”
준영의 작은 목소리에 지호의 시선이 그제야 옆으로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 반짝인다.
“전 괜찮아요. 튼튼해서 며칠 밤새울 수도 있고요. 준영 씨야말로 안 자요? 내일은 제발 쉬자고 해도 안 쉴 거예요.”
“피곤한데 잠이 잘 안 오네요.”
땅이 울리고 괴물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린다. 이런 환경에서 맘 놓고 자려면 쇠심줄처럼 신경 줄이 두꺼워야 할 터. 자려고 해도 불안해서 눈이 뜨일 것이다. 몸이 반응하는 것도 있겠지. 온종일 바쁘게 들려 다니느라 정신없었겠지만, 준영은 죽었다 살아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럼 졸릴 때까지 이야기나 좀 할까요.”
땅 흔들림이 조금씩 줄어든다. 근처를 지나는 괴물이 멀어지는 모양이었다. 준영은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꽤 큰 담요인데도 발이 삐죽 나오는 키라 몸을 웅크려야 좀 따뜻할 것이다.
“목숨을 던져야 각성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에요?”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하지만,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누구나 한 번쯤 가져 보는 의문이다. 지호 역시 그랬다. 남을 위한 희생은 어디까지 쳐주는가? 그게 타인을 위한 진심일 거라고 판단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의식도 없는 이형 에너지라는 건 이상하지 않나?
각성자는 오로지 균열에서만 생겨난다. 밖에선 누가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지건 말건 다시 살아날 순 없었다.
괴물들의 세계에서 넘어온 법칙.
지호는 그것이 언젠가 사람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보는 아무리 틀어막아도 새어 나간다. 그걸 유출하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은 이 흐름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지구대에 남은 어르신들을 위해 움직였다고 들었어요.”
준영은 짧게 헛기침했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만 그런 건 아녜요. 아까 다른 애들도 다 같이 있었잖아요.”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었죠?”
괴물들이 주시한 건 그들 중에 준영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다 같이 달리는 와중에 유일하게 표적이 되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어둠 속에서도 준영의 시무룩한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좀 이상했어요. 그것들이 다른 애들은 안 보이는 것처럼 굴었거든요. 막, 그, 아세요? 게임에서 몹들 인식 범위에 들어가면 느낌표 딱 뜨면서 이쪽 휙 돌아보는 그런 거요. 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근데 어그로가 저한테만 끌린 거죠. 그래서 머리 뒤로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 옆에 애들은 밀어 버렸어요. 저만 노리는 것 같은데 다칠까 봐.”
지호는 그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좀 헤맸다. 얼추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 나자 상황이 좀 더 분명해졌다.
어르신들뿐 아니라 친구들을 구하려고 움직인 것까지 포함해서 능력이 산정되었을 것이다. 지호의 부드러운 시선을 알 수 없는 그는 어둠 저편에서 지호의 실루엣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밀었다고 화내고 그러진 않겠죠? 균열에서 다친 상처는 잘 안 아문다는데…….”
“화내면 뭐 어쩌게요. 대신 죽어 준 사람 앞에 두고 좀 밀었다고 화내는 사람이면 친구 하지 마요.”
“인상이랑 다르게 좀 단호한 면이 있으시네요, 헌터님.”
멀리서 괴물들의 포효가 재차 울린다. 또 다른 놈들이 구역을 두고 싸우는 거겠지. 준영이 또 몸을 움츠린다. 지호는 의자를 약간 당겨 침대에 가까이 앉았다.
“괜찮아요. 제가 지켜 줄 테니 안심하고 누워요.”
“헌터님 뉴스에 나오고 했던 그 사람 맞죠? 한솔이가 헌터님 뉴스 맨날 찾아보고 그랬었어요. 상황이 나빠서 그렇지, 나중에 보게 되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요. 사인 좀 해 주세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이름자만 써 줘도 좋아할걸요? 이지호 헌터님이잖아요.”
묘한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얼굴만 보고도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지호를 신뢰한다. 기사가 나가고 뉴스에 도배될 때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미디어를 끊어 버려서 정확한 사항은 알지도 못했기에 좀 낯설었다.
“저는 그냥 제 일을 한 거예요. 다른 분들도 똑같고요. 어쩌다 기자들이 그 순간을 잘 찍어서 뉴스에 좀 나오고 그렇게 되었을 뿐이에요. 모든 헌터들이 사람들을 구하러 뛰어다닌다고요. 지금도요.”
“아는 거랑 보는 거랑 다르잖아요. 그리고 한솔이뿐 아니라 저도 팬이에요. 어떻게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를 내던지는 결정을 할 수 있죠?”
준영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지호는 짧게 웃으며 그 말을 돌려주었다.
“준영 씨도 똑같아요. 똑같은 일을 한 거라고요. 할머니들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저랑 똑같은 일을 했잖아요. 심지어 저는 이미 각성자라 그런 능력이 있는 상태였는데 준영 씨는 아니었지요. 누가 더 대단한 것 같아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준영은 머뭇거리며 몇 번쯤 입을 열려다 포기하고 자리에 누웠다.
“아까 그 학교에 아는 애들 많았어요. 작년에 푸른솔중학교 졸업했거든요.”
체육관에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던 바로 그 학교 이름이다. 지호는 그 중얼거림엔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며 하는 말 같지 않아서였다.
준영은 재차 웅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이 동네에 균열이 조금만 더 빨리 열렸으면 저도 그중 한 명이 되었겠죠? 지금은 각성했지만, 사람 일 정말 몰라요. 애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으니 다들 난리가 나겠네요.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다 같이 제사를 드리고 그러겠죠. 비슷한 이야길 들은 적 있어요. 대균열 때 그랬다면서요.”
“모두의 기일이죠.”
“그런 날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슬픈 일이네요.”
준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진다. 괴물 소리도 옅어지고 땅울림도 줄었다. 곧 그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옅은 숨소리. 깊이 잠들기 전에 괴물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는 법이니까.
멀리서 괴물들끼리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에 지호는 방벽 두께를 두껍게 하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렷한 보름달이어야 할 달은 하늘에 뚫린 희끄무레한 구멍인 것처럼 흐릿하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들리는 다양한 소음들.
고요하고도 소란스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