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런 목적이면 구조대 쪽이…….”
“저희 삼촌이 구조대원인데 장비도 보급이 늦고 소방대 뒤치다꺼리를 더 많이 한대요. 어디 연줄이라도 없으면 특히 더 뒷전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승찬이나 그쪽 구조대가 예외적인 것이다. 지호 때문이었다. 즉각 장비가 보급되고 수리 요청이 받아들여지며 때에 따라 적절한 인원 배치가 이루어지는 이유들.
아마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어도 다른 지점과 그렇게까지 차이가 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었기에, 지호는 머뭇거리다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에나 각자의 고충이 있는 법일 터였다.
“그럼……. 헌터가 되고 싶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각성했는데 당연히 헌터 하지 뭘 하겠어요?”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을 만큼 인지도 차이가 있는 건 지호 역시 알고 있었다. 각성자 연합 사람들이 사람 뽑기 힘들다고 했던 것들이 생각나 지호는 어깨만 으쓱였다.
“각성했다고 꼭 헌터 해야 하는 건 아녜요. 각성자 연합이라고, 사람들 모이는 곳도 따로 있기도 하고요. 개중에는 그냥 혼자 예전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어요.”
수원 균열에서 보았던 사람이 생각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떤 각성자. 균열의 확장을 막으려다 끔찍한 꼴로 죽어 버린 가여운 범재.
지호가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알 턱이 없는 준영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괴물들하고 막 싸워서 사람들 구해 주는 헌터가 제일 멋있죠! 저는 헌터 할래요. 하게 해 주세요.”
“정하는 건 준영 씨니까요. 제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하겠어요?”
준영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호가 그를 부르는 준영 씨라는 별것 아닌 호칭 자체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학생 신분인 터라 누군가 이름 뒤에 씨를 붙여 가며 그를 부를 일이 없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갑자기 어른 대접 받는 기분도 들었다.
본부와 연락을 나누던 태양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는 대화를 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나빠져서 우리끼리 활로를 뚫어야 할 것 같군. 어떻게 하겠나? 초짜 데리고 구조 작업에 들어갈 순 없어.”
“어, 그럼 어쩌죠?”
“나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겠지만, 난 방벽을 칠 줄 모르잖아. 어쩔 수 없이 네가 데리고 있어야지. 내가 다른 팀에 합류 요청을 하면 될 거다.”
“여기 얘 데리고 있으라고요?”
“그럼? 데리고 괴물이랑 싸우러 갈 거냐? 혼자 뒈져 버리게?”
“아니, 왜 같이…….”
“한 명 손이라도 더 필요할 때야. 근방에 코드 레드 개체 목격자가 없으니 내가 너를 백업할 필요도 없고.”
지호는 침묵했다. 처음에 태양이 팀 편성을 받고 투덜거리다가 이내 말을 바꾸었던 게 생각났다.
“교체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였군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정신계 능력자들은 다 알고 있을 거다. 아마 다른 놈들도 크게 반발 없이 협조할 거고.”
“제가 놈들에게 넘어갈까 봐요?”
“넌 그것들과 접촉한 유일한 대상자야. 그것들이 너를 이용하는 것에 앞서 너를 데려가려 할 가능성까지 고려하겠지. 상부 지시라 따른 거고, 원래는 알려 주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말해 준 거야. 여기 숨어 있는 것도 괜찮겠지. 대형종이 나타나면 좀 문제가 되겠지만.”
건물 자체가 부서지면 탈출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처는 가능하고, 느리더라도 빠져나갈 방법은 있을 터.
“원한다면 옆에 있어 주마. 그러나 인력 낭비일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위치 태깅은 다른 팀하고 하실 거예요?”
“둘 다 띄워 놓을 수 있어. 만일을 대비해 지켜보고 있겠다. 필요하면 신호 보내.”
“또 봐요.”
태양과 지호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준영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자니 태양이 떠난다는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는 지호와 단둘이 이런 어딘지 모르는 지하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신세까지 져 가면서?
그는 경악하며 태양을 붙잡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헌터님 지금 어디 가세요?”
“들은 바와 같다. 초임 각성자의 보조는 이지호 헌터가 할 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지.”
“아니, 저도 가면 안 돼요? 잘 따라다닐게요. 말 잘 들을게요. 저 운동도 잘해요. 달리기도 빠르고!”
“잘됐군. 만약의 사태에 이지호 헌터의 지시에 절대복종하도록. 그래야 살 수 있을 테니.”
간다. 짧은 인사와 함께 태양은 건물을 빠져나갔다. 바로 옆 마트에서 다른 팀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어 그쪽으로 합류한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호는 준영이 자기를 불편해하는구나 싶어 어쩌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준영은 땀을 뻘뻘 흘렸다. 낯선 상황에서 또래의 여자애와 단둘. 어쩌면 한 번쯤 꿈꿔 봤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때가 나빴다. 앞으로 며칠간 그의 존엄성은 잘 수납되어야 할 모양이었다. 자존심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으니.
다행히 준영에게 가르칠 것이 많았다. 이왕 불편하다면 다른 곳에 집중하게 하는 편이 좋다. 지호는 지하에 있던 다른 곳을 뒤져 노트와 펜을 구해 왔다.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곳이라 그런지 뒤편 철제 캐비닛 한쪽에 색연필과 스케치북이 많았다.
샛별을 가르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좀 더 절박한 심정으로 그 애를 가르쳤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함도 있었고.
“이제부터 간단하게 몇 가지를 설명할게요. 준영 씨가 헌터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그쪽에 치중하진 않을 거예요. 각성자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꼭 헌터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지금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준영은 그다지 듣고 싶지는 않지만, 지호가 말하기 때문에 듣겠다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문득 보현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지호 역시 처음엔 무조건 헌터가 되겠단 생각으로 보현이 하는 모든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었다. 사실 보현이 헌터에 좀 부정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긴 했지만, 아마 그때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좋아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일 터.
그러나 지호는 매정하게 보현을 밀어냈었다. 다시 생각하니 약간 미안한 부분이긴 했지만, 그의 뜻대로 따랐다면 지금 지호가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각성자 연합 도제실 한쪽일 수도 있었다.
“제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질문마저 똑같다.
지호는 그의 태도가 보현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염려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녜요. 하지만 제가 헌터니까, 제 입장에 치중해서 알려 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되도록 다른 것들을 좀 더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눈으로 볼 때와 설명을 들을 때의 차이는 어마어마한걸요.”
둘에겐 아마 시간이 많을 것이다. 지호는 각성자 연합이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협회 연구 팀에서도 다양한 것들을 만들지만, 각성자이기 때문에 마정석을 가공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있는 법. 설명을 들은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전투계랑 생산계인 거잖아요. 저 rpg 좀 많이 했어요. 이 정돈 기본이죠.”
지호는 의욕 있는 헌터 지망생을 보며 미소만 지었다. 지금이야 헌터가 되겠다느니 뭐니 해도 훈련받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헌터가 된 후에도 당연히 그럴 수 있었고.
그때, 땅이 흔들렸다.
자연적인 지진은 아니었다. 대형종의 움직임 때문에 나는 인위적인 흔들림이다. 순식간에 겁먹은 준영의 곁에서 자세를 낮추며 상황을 살피던 지호는 혀를 찼다. 감지 능력은 같은 계열 능력이 없는 괴물들을 살필 때나 유용하다. 오히려 지호의 파장을 따라오는 포식자가 있을 수 있어, 지금 같은 상황에선 섣불리 펼칠 수가 없었다.
“뭐, 뭐죠?”
“헌터가 되고 싶다면 마주해야 할 무수한 순간들 중 하나죠.”
놈의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주방 쪽에서 접시와 그릇들이 떨어지며 우당탕 소리를 냈다. 다른 모든 곳에서 저런 소리가 날 테니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쿵, 쿵, 쿵! 연달아 울리던 발소리가 멈췄다. 가까운 거리였다. 준영의 등에 얹어 둔 손으로 심장 뛰는 것이 느껴진다. 지호는 좀 더 듬직한 헌터로 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른 먹이를 쫓을 거예요. 아직 혼잡스러울 때거든요.”
준영을 달래기 위해 재차 웃어 준 지호는 다시금 집중하며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형종 두 마리가 싸우는 걸까? 그럼 최악의 사태다. 교회 건물이 그렇게까지 튼튼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가야겠어요.”
“예?”
“실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할 때가 아니었다. 지호는 서둘러 준영을 안아 들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부끄러움보다는 공포가 앞선 탓에 준영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지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과 비슷했으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건물이 흔들린다. 천장에서 먼지며 돌가루 같은 것이 후두둑 쏟아졌다. 방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돌덩이들 중엔 머리통만 한 것도 있었다. 위에 달려 있던 조명이 떨어지고, 아주 잠깐 지진이 멈춘다. 아래에 있어도 괜찮았나? 다시금 소리에 귀를 기울인 순간이었다.
벽이 터져 나간다.
예배당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 괴물은 비틀거리며 포효를 내질렀다. 앞에 비슷한 크기의 대형종이 보였다. 괴성, 그리고 종류 다른 포효. 준영의 몸은 진동이라도 온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지호 역시 주변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저항하며 몸을 낮췄다. 태양이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지호는 자기만을 의지하며 떨고 있는 준영을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 없는 사람을 찾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두 거체가 부딪친다. 먼저 쓰러져 있던 쪽이 목을 물어뜯겼다. 버티지 못한 교회 건물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십자가 박힌 첨탑이 기운다.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호는 욕설을 토하며 끌어안은 준영을 몸 쪽으로 바짝 붙였다. 방벽을 최소한의 크기로 줄이며 추락하는 구조물 사이를 내달린다. 어깨며 머리, 등짝을 내리찍는 파편들이 날카롭다. 지호에게 부딪힌 것만 있으면 다행일 터.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고 부옇게 피어올랐다. 이 틈에 다른 건물로 몸을 피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 상황이면 차라리 아무 집이나 문 따고 들어가 숨는 쪽이 안전할 것 같았다.
가슴팍이 축축해진다. 준영이 울고 있었다. 달랠 시간이 없다. 지호는 짧게 감지 파장을 펼쳤다. 두서넛 정도가 반응한다. 그중 하나가 이쪽으로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대놓고 하책이었다. 지호는 자신의 선택에 혐오감을 느끼며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로 달렸다. 도마뱀처럼 생긴 중형급 괴물이 도로를 질주했다. 속도가 어마어마하니 피할 수 없다. 날지 못한다면 좋을 텐데.
도로에서 제일 가까운 집 베란다를 부수고 들어간 지호는 집주인에게 사과하며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건물을 통과하면 잠시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놈이 다른 쪽에 정신이 팔리기를 바랄 수밖에.
두 대형종이 거칠게 경고음을 내며 싸우는 것이 느껴졌다. 연신 흔들리는 땅. 목을 꽉 끌어안는 손 때문에 움직임이 불편하다. 연신 그러지 말아야 했다고 흐느끼는 꼴이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아, 지호는 준영에게 더 신경 쓰지 못하고 복도 쪽 창을 걷어차 부쉈다.
창 쪽으로 빠져나오자 아래쪽을 돌아다니는 괴물 두어 마리가 보였다. 이쪽을 보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눈에 띄면 어쩔 수 없고.
단지 내에 생존자가 있다면 지호가 하는 짓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을 텐데, 이쪽에 남은 사람은 없는지 다행히 신호 오는 것이 없다. 생존자 표식 걸린 건물도 없었다.
지호는 대형종의 포효와 땅 울림을 기준으로 움직였다. 움직임이나 소리를 효과적으로 가려 줄 터였다. 벽에 붙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그림자에 숨어 있으니 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