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미 숨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태양이 아이들에게 여러 지시를 내려 정신을 쏙 빼놓는 사이 지호는 죽은 아이의 몸을 안아 올렸다. 지호보다 훨씬 키가 큰 학생이었다. 한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살기도 급급했을 텐데. 그사이에 다른 사람을 위해 숨을 곳을 양보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 자길 노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숨고 싶었을 텐데 대견했다.
부근을 채우고 있던 이형 에너지들이 밀도 높게 쌓여 있었다. 아이가 죽지 않았을 때조차 그랬다. 감지 능력 없는 태양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호의 눈에 보인 학생의 죽음은 조금 달랐다.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에너지들이 느리게 아이의 몸으로 스며든다. 몸이 재구축된다. 떨어져 나갔던 살점이 채워지고 없어졌던 뼈가 자라났다. 제 품에서 되살아나는 각성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호는 자기 역시 갈기갈기 찢겼다가 되살아났음을 상기했다.
이런 식이었구나.
모여든 에너지가 빛이 되고, 빛은 아이의 팔이 되었다. 당연히 떨어진 쪽 옷이 없어 한쪽이 민소매다.
앳된 얼굴에 죽죽 그어져 있던 상처들마저 천천히 아문다. 그 모습을 보며 지호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숭고함에 경도되는 양 박사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지호를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겠지. 고작 반년가량의 헌터 생활을 했을 뿐인데 벌써 일반인의 삶을 살 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밖에서 들리는 괴성이 가까워졌다. 지호는 방벽을 쳐 에너지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으며 아이가 눈 뜨기를 기다렸다. 이형 에너지 계열이다. 먹잇감으로 딱 알맞은 새 각성자.
보현의 말에 따르면 각성자의 능력은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례했다. 타인의 죽음부터 각성까지의 과정을 지켜보게 된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지호의 품에 안겨 있던 학생은 오래 지나지 않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번쩍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지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려놔야 하나? 학생의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우연히도 빛을 등지고 있는 위치라, 아마 지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
학생은 떨어져 나갔어야 할 자기 팔이 멀쩡한 걸 확인하기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며 지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었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염려스러워 방벽 두께를 올리는 건 다음 일이었다.
죽었다 살아난 후는 생각보다 좀 많이 혼란스러운 법. 지호 역시 여기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생각했었다. 쇼크가 와 죽기 전 기억이 희미하다면 아마 도로에서 괴물에게 습격당했을 때 반쯤 기절하거나 정신을 놓았을 것이니, 이런 낯설고 종교적인 장소에서 깨어나면 오해할 법도 했다.
지호가 왜 이리 안 오나 확인하러 나온 태양은 엉엉 우는 학생과 난처한 지호의 상황을 확인하곤 미간을 심히 찡그렸다. 먼저 각성해 본 선배답게 상황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태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혼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또 둘뿐이었다.
준영은 오래도록 울다가 한참 후에야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달은 눈치였다. 밖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이상한 소음 탓이다. 지호가 친 방벽이 소리를 왜곡해 실제 소리보다 훨씬 작게 들렸지만, 아무튼 천국에서 들릴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저, 저기……. 이제 와서 묻긴 좀 늦은 것 같은데. 제가 천국에 온 게 아닌가요?”
지호는 생긋 웃으며 준영을 내려 주었다. 학생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충격 때문인 것 같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준 지호는 잡은 손을 그대로 흔들어 악수했다.
“공교로운 상황에 만나게 되었네요. 각성자가 된 당신을……. 애도하고 위로합니다.”
지호가 병원에 있을 때 마주했던 문장이었다. 죽었다 살아나 각성자가 되는 사람들. 죽음의 공포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가 얼결에 되살아나 힘을 부여받는 사람들.
누군들 그것을 축복이라고,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준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지호가 흔드는 대로 가만히 흔들리기만 했다. 각성자, 하고 중얼거리는 이를 보며 지호는 바닥에 떨어진 재킷 중 하나를 집어 건넸다. 피가 좀 묻어 있긴 했지만, 셔츠까지 뜯긴 팔로 추위에 떠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헌터님이 절 구해 주신 건가요?”
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시 길게 울리는 괴물의 포효. 이상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문득, 놈이 따라온 에너지가 준영의 것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죽기 전부터 순도 높은 이형 에너지들이 뭉쳐 있었으니, 그걸 먹으려고 꼬여 든 놈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설명은 천천히 해 줄게요. 우선 안으로 가요. 친구들도 있고요.”
준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교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모여 있던 예배당 한쪽에 문이 있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통해 있었다. 쭉 내려가 보니 성가대실과 유년부실 같은 팻말 달린 방들이 보였다. 복도 끝에는 식당도 있었다. 그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인다. 식당에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지호가 문을 열자 울음 범벅된 학생들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더 열린 문 뒤로 들어온 준영을 보자 그들의 표정이 정말 볼만하게 변한다. 학생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달려들어 준영은 버티지도 못하고 휙 넘어졌다. 신체 계열은 아니군. 하기야, 들고 있을 때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미친, 미친 새끼!”
“뒈진 줄 알았어 씨발!”
왜 남고생들 대화에선 욕설이 빠지질 않을까? 준영은 자기를 붙잡고 펑펑 울어 대는 세 사람을 부둥켜안은 채 두 헌터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이형 에너지 계열이라 당분간 못 내보내요. 우리가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곤란하게 됐군.”
“그나마 일반 균열인 게 어디예요.”
욕설에 소란, 주무르고 만지고 때리다 싸우는 지경까지 가는데도 두 헌터는 학생들을 말리지 않았다. 기뻐서 저러는 거다. 죽은 줄 알았다고 내내 중얼거리는 학생은 미세하게 떨고 있기까지 했다. 그쯤 되어서야 태양이 나섰다.
“기쁜 건 알겠는데 나머진 나중에 해, 학생들. 이름이?”
“아, 어. 헌터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정기고생이고요. 얘는 김철민 쟤는 오태진 저는 정한솔이요. 생존자 보고 하시는 거죠?”
“맞아요. 이 학생은?”
“강준영이요. 얘 괜찮은 거죠? 헌터님이 살려 주신 건가?”
학생들은 눈치를 살피면서 두 사람을 연신 훔쳐보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어, 하고 지호를 빤히 본다. 별로 할 말이 없어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상황이 맞아떨어져서요. 학생들을 구조하러 곧 다른 헌터가 올 겁니다. 저희는 다른 사람들 구조하러 들어갈 거고요. 구조 팀 오는 대로 신속히 이동하세요.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줄 겁니다.”
지호는 교육받은 대로 읊은 뒤 학생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을 외면했다.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헌터라고 하니 입이 근질거릴 것이다. 심지어 한 명은 옆 친구에게 지호 이름을 속삭이며 그 헌터라고 말하고 있기까지 했다.
혈기 왕성한 학생들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라 섣불리 나서는 일은 없었다. 교회 밖에서 외쳐 대는 괴물 소리가 멀어지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우선은 쉬고들 있어. 다른 사람은 다친 데 없나?”
다른 학생들은 넘어지고 까진 상처들이 전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균열에서 다친 상처는 잘 낫지 않으니.
얼빠진 것처럼 멍청하게 앉아 있던 준영을 관찰하던 지호는 이형 에너지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준영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수준인가. 아마 지호를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저 정도로 광고를 해 대니 괴물들이 먹으러 달려올 수밖에.
좌표가 정확했기에 이동 능력자가 도착했다. 운 좋게 아는 얼굴이다. 소민은 지호를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했다가 생존자들 때문에 금세 얼굴을 굳혔다.
“네 사람이 전부인가요?”
“생존자 셋과 미등록 각성자 하나요.”
지호는 속으로 불평했다. 소민이나 자기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태양이 이동 능력자를 대하는 태도는 제법 예의 발랐으니까.
미등록 각성자 정보를 보고한 소민은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그 역시 지호와 다르지 않다. 급성 균열에만 투입되었고, 안정기가 지난 후의 균열에서만 활동했었다.
“미등록 각성자를 보호하며 구조 작업하시는 겁니까?”
“헌터님이 데려갈 순 없잖습니까? 이 꼬맹이가 방벽 치는 걸 보니 이형 에너지 계열인가 본데.”
소민과 눈이 마주친 지호는 자기한테 맡기라며 가슴팍을 탁탁 쳤다. 꽤 믿음직하긴 하지만 바깥 상황이 영 좋지 않다. 소민은 아직도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소곤거리는, 놀랍게도 시끄럽게 소곤거릴 줄 아는 남학생들의 팔을 붙잡으며 조언했다.
“외부에 외피 단단한 갑충 종류가 있어요. 다른 팀이 공격을 퍼부었는데 뚫리질 않았다더군요. 속도가 느리지만, 굳이 부딪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구조 신호 없을 때 제가 와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시켜 드리죠. 잠시 대기해 주세요.”
“그러지. 설명할 시간도 필요한 것 같고.”
친구들이 빛으로 화해 사라져 버리자 준영의 표정은 더더욱 볼만해졌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두 헌터를 번갈아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배 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각성자니 당연히 배가 고프지, 하고 납득하는 헌터들과 달리 준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배고픈 게 정상이야. 뭐라도 좀 먹자. 마침 식당이니.”
냉장고를 열자 야채며 계란 같은 것들이 꽤 있었다. 교회 규모가 작지 않은 만큼 구비된 것들이 좀 있어 보였다. 전기나 수도, 가스 같은 기본 시설이 아직 멀쩡히 작동한다. 대형종부터 사냥해야 거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
이것들로 당장 먹을 수 있는 걸 만들기는 계란말이 같은 게 제일 무난해 보였다. 지호도 할 수 있는 요리이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음식 준비를 시작하는 헌터를 보는 준영의 눈이 떨렸다.
“이, 이렇게 태연하게 있어도 돼요? 괴물이 언제 쳐들어올 줄 알고…….”
“지하나 일 층엔 없었어. 밖에 있는 놈이 들어오면 그때 가서 걱정하면 돼. 지금은 우선 먹어 둬라. 각성하면 배가 엄청 고프거든.”
“각성……. 제가 헌터가 된 건가요?”
“그건 나중에 네가 고르는 거고.”
“영화에서 나오던 것처럼 날아다니면서 괴물 사냥하고 그런 걸 할 수 있게 된 거죠?”
태양은 피식 웃었다. 일반인들이 꿈꾸는 헌터란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었다. 영화 속 히어로를 잘 버무려 만든 이상. 그러나 각성자들이 마주하는 건 차가운 현실뿐이다.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나 가진 능력이라곤 신체 계열과 정신계 능력뿐이었던 헌터가 단호히 잘라 냈다.
“뭘 할 줄 아는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러려면 일단 여기서 며칠 살아남아야 해.”
“아까 저도 같이 나갔으면 좋았을걸.”
준영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태양은 어린애 달래는 재주는 없는 사람이라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넌 각성자라 앞으로 삼 일간 못 나가. 그렇게 알아 두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라. 안전하게 요리할 수 있는 조리 시설은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