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가뜩이나 지금도 사방팔방에 지호 영상이 돌아다니는 판국이다. 어디서 그렇게들 다운받고 다시 올려 대는지, 해당 영상이 불법이라며 아무리 내리게 해도 줄기차게 올라왔다. 어디에는 모자이크하고 얼굴을 가려 가며 영상을 올렸으니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도 하고 CG라고도 하는데, 이제 아는 사람들은 지호가 헌터복 입고 날아다니는 것 정도는 사방에서 보아 알고 있을 정도로 퍼졌다. 지호는 선글라스 썼으니 됐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상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원치 않았다.
“나중에 지호 씨 제압할 수 있는 헌터 동료들한테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저도 있으니까 기억하라고요. 술 마시고 잘못해서 저를 골로 보내지 않으려고 주의할 수 있으니 일반인하고 한잔하는 것도 괜찮은 셈이죠. 긴장하면 덜 취하거든요.”
지호는 크게 웃었다. 승찬은 가끔 이런 식으로 그가 지호보다 연약하단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기곤 했다. 영 틀린 말도 아니었던지라, 해 넘어갈 때 한번 시간 잡아 보자며 언제나처럼 한국인 특유의 인사를 나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보통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종류의 인사말이다.
테스트를 마치고 보고서까지 전송하자 한밤이었다. 침대 있는 방이 몇 개나 되어 둘은 각자 편한 위치에 짐을 풀었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을 꺼내자 연락이 어마어마하게 와 있었다.
다른 것들은 대충 넘기고 중요한 것들만 확인했다. 보현에게서는 집에 와서 보자는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와 있고, 몇 사람에게 기억할 만한 메시지가 와 있다. 이주리 헌터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이 넘는 걸 보니 작정한 것 같았고, 김 반장에게서도 꽤 많이 연락이 와 있다. 생각 외로 그의 병아리 시절 동료들에겐 재미있단 반응만 돌아와 있었다.
[장지윤 : 지호 씨 방송 탔다! 이제 맨얼굴 나갔는데 밖에 어케 다님?]
[최소민 : 지호 씨는 원래 마이웨이로 잘 다니지 않았어요? 여기도 지호 씨 저기도 지호 씨 사방에 지호 씨던데. 이제 오디세이 헌터들보다 유명해질걸요.]
[강하나 : 와 그거 진짜 안 부럽다.]
[장지윤 : 유명해지면 나 신다은 사인 받아다 줘여. 왕팬임. 짱팬임.]
[강하나 : 그냥 그쪽 팀에 지원하지? 오디세이 팀에서 새 헌터 뽑는다고 하던데.]
[장지윤 : 그건 쫌. 원래 약간 거리를 뒀을 때 젤 아름다운 법임. 직장 동료 되면 그때까지 아름답겟어여?]
[최소민 : 근데 실종자들이 괴물 되었으면……. 결국 다 죽은 거 아닌가요? 전에 도플갱어가 그랬잖아요. 자기가 먹은 것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은 괴물에게 먹힌 사람들 아닌가? 실종자들의 원수인 셈이잖아요.]
소민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들 말이 없었다. 쉽사리 꺼낼 화제도 아니었지만, 다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운 좋게도 세 사람은 실종자 가족을 가진 이들은 아니었다.
[강하나 : 뭐, 어떻게든 되겠지. 위에서 결정하면 따르면 되는 거고.]
[장지윤 : 갑자기 절 먹고 제가 되겠다구 하진 않겟져. 제가 글케 당하면 제 원수 갚아 주삼.]
지윤이 우는 이모티콘을 올리며 분위기를 가볍게 했다. 세 사람은 그 이후에도 몇 가지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 자러들 간 것 같았다. 지호는 복잡한 기분으로 소민의 말풍선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괴물에게 먹힌 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당사자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를 해친 원수일까.
실종자 가족들 커뮤니티가 떠들썩해졌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본부에서 내리는 결론과 실종자 가족이 내리는 결론이 다르다면, 결국 또 싸울 수밖에 없을 텐데.
몸은 피곤했으나 잠이 잘 오지 않아, 지호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을 켜고 본부에서 준 설문을 꾸준히 메웠다. 남는 시간 동안 손을 쉬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두꺼운 책자로 몇 권이나 있다. 심지어 객관 설문보다 주관 설문이 많은 분야도 있었다.
현장 다녀온 헌터들에게 공통적으로 받는 문항이란 말에 어쩔 수 없이 채우면서도 불필요해 보이는 항목들엔 불성실해진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인 페이지를 계속 훑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천금처럼 무거워졌다.
***
본부에 올라와서 보낸 사흘은 지호의 진을 쏙 빼놓았다.
갖가지 검사, 신체 능력 테스트, 정밀도 체크, 명중률과 미세 조정 관련 검사, 이형 에너지 종별 체크, 신체 강도 측정, 대분야 중 소분야별 특화 능력 점검…….
기억하는 것도 줄줄 읊을 수 있는데 기억 안 나는 건 더 많았다. 개중에는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어서 연구원이 뭐라고 말하는지 몰랐던 때가 많았다.
승찬은 그런 지호를 따라다니며 협회 지시 사항을 메모하고 때에 따라 보고를 올렸다. 보조 연구원을 데려오라더니 진짜 본격적인 서류 작업이라 일이 손에 익지 않은 구조대원은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지호를 정체불명의 측정기에 집어넣고 숫자를 옮겨 적고 있던 연구원이 곁에 서 있던 승찬을 흘깃 쳐다보았다.
“외부인이군요?”
“이지호 헌터 지인입니다.”
“하긴, 가족이 없는 헌터였던가. 그런 일도 없진 않죠. 그래도 좀 어린애 아닌가?”
승찬은 자기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무수하고 무례한 시선들을 받아넘기며 한숨 쉬었다. 그나마 불순한 의도를 드러내는 사람은 좀 나은 편이었지, 속으로 이렇구나 판단하곤 뒤에서 떠벌리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어디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특히 협회 본부는 각성자보다 그들을 돕는 일반인이 더 많아서, 웬만하면 말을 섞지 않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오늘 테스트 이게 끝이래요?”
“이걸로 모든 테스트가 다 끝났다고 가도 된답니다. 전에 공인 각성 지원부에서 간략하게 조사했던 것들을 세부 측정한 거라고 하네요. 일 년에 한 번 정기 측정, 삼 년에 한 번 세부 측정이 있대요.”
“이걸 매년 해요?”
“처음이라 자세하게 한 거고 뒤부터는 지호 씨한테 해당하는 것들 위주로 넘어간다고 해요.”
길게 한숨 쉬며 피로를 토해 낸 지호는 아차 하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미안해요. 엄청 피곤하죠. 이런 일일 줄 알았으면 센터 연구원분 한 명한테 부탁할걸. 다들 자기가 가겠다고들 했었거든요.”
“아닙니다. 협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바로 옆에서 보고 들을 기회가 어디 쉬우려고요.”
“두 번은 안 부를게요.”
“밥은 맛있던데요. 그거면 됐죠.”
승찬은 씩 웃으며 인계받았던 물품이 담긴 쇼핑백을 뒤적였다. 그가 꺼내 내민 건 신형 전투복이었다.
“지호 씨가 테스트한 것들을 기준으로 맞춘 맞춤형 배틀 슈트래요. 기존 전투복하곤 좀 다르고, 지호 씨 전용으로 출력 조절도 된 것들이라 싸울 때 좀 더 편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세탁은 센터 전용 시설에 맡기면 되고, 물빨래하지 말고요.”
전용 슈트라니. 지호는 반색하며 그걸 받아 들었다. 온갖 기계에 들어가며 신체 측정도 수차례 했었지만 이런 놀라운 걸 받아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잘 갠 슈트 위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정갈한 글씨. 금 박사의 메시지다.
<당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겁니다. 헌터들을 지원하는 진짜 조력자로부터.>
“양 박사랑 금 박사님 엄청 사이 안 좋은가 봐요. 분야는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한쪽은 균열학 관련된 현상 전문가고 한쪽은 발명에 치중한 쪽이라 사실 겹치진 않을 겁니다. 여기 들어간 기술력이 금 박사님 솜씨라고 하더군요. 서명은 장인에게 기술 원조를 손쉽게 받을 수 있어서 고맙댔습니다. 지호 씨 이름 덕분이라던데요.”
자부심 넘치던 명은의 태도가 생각나 지호는 조용히 웃었다.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 헌터들보다 이런 많은 이들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닐까? 무대 뒤편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력이 평가 절하되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지호는 양해를 구하고 신형 전투복을 갈아입으러 한쪽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요란하게 뭐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지호가 괜찮아요! 하고 외치는 목소리도 들리자 승찬은 고개를 저었다. 없는 여동생이 생긴 기분이 이럴까.
오래 지나지 않아 방을 나온 지호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쳤다. 안 입은 기분.”
“그런 말 하지 말고……. 테스트할 거면 전용실에서 하라고 했어요.”
몸에 딱 맞는 타이트한 디자인이면서도 불편하게 굴곡을 강조하지 않은 실용적인 모양새.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이 힘을 운용하는 대로 에너지 흐름을 돕는 움직임이 신체를 빠르게 감돈다. 재질 자체가 특이한 것 같기도 했다. 원리야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것저것 움직여 보던 지호는 요 며칠간 보여 준 얼굴 중에 제일 생기 있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이거 만들어 주려고 그 난리 피웠던 거면 진짜 인정할 것 같아요. 솔직히 이런 짓 왜 하나 좀 짜증 났는데 다른 분들한테도 알려 줘야겠다.”
“좋은 장비가 생명 연장에 직결되니까 앞으로는 쭉 맞춤형으로 보급하려고들 노력한다고 하더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아저씨도 여기까지 같이 와 줬는데 뭐 하나 갖고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잖아도 제가 구조대원이라고 하니까 주신 게 있긴 한데요.”
승찬이 옷소매를 걷어 보여 준 건 지호가 끼고 있는 팔찌와 유사한 물건이었다. 유선경 장인의 솜씨 같다. 승찬은 이마를 긁적이더니 얼른 팔찌를 감췄다.
“가뜩이나 사방에서 헛소리들 해 대는데 이거 보면 더 난리겠어요. 지호 씨 물건이랑 같아서.”
“우정 팔찌라고 하죠, 뭐! 균열에서 신체가 무너지는 속도를 늦춰 줄 거래요. 저 같은 신체 계열보다는 아저씨 같은 평범한 사람들한테 더 도움될 거예요. 얼른 보급되면 좋겠다.”
받은 것들을 정리하며 본부를 떠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불이 동시에 점멸하더니 일 초간의 암흑.
금세 전기가 들어왔으나 빛이 붉은색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 긴장하는 찰나, 벽면에 아무도 켜지 않은 화면이 켜졌다.
[대형 균열 발생 경보. 모든 요원은 속히 집결 바랍니다. 대형 균열 발생 경보.]
“협회 살벌하네요. 이거 입고 그대로 가도 되겠죠?”
“그걸 입고들 모이지 않을까 싶네요. 정리는 제가 마저 해 두겠습니다. 얼른 가 봐요.”
지호는 부탁한다고 외치며 방을 뛰어나왔다. 적색 등만 비상시를 알리는 게 아니다. 벽면에 화살표 모양으로 방향을 알리는 등도 켜져 있었다.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본부에 올라오는 다른 지역 헌터들이 많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만든 것 같은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
일전에 사령관과 만났던 대회의실에 많은 헌터가 모여 있었다. 각성자들뿐이다. 승찬 말대로 신형 전투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오랜만에 급성 균열이 아니라 일반 균열이다. 1차 경보가 울리는 지역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는데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얼추 모인 것 같으니 브리핑 시작하죠. 예전부터 지켜보고 있던 지역에 일반 균열이 열리는 상탭니다. 아무리 전부터 주시해 왔어도 어떤 균열이 열릴지는 알 수가 없는데, 아무리 천천히 열려도 다수 대피가 어려운 초대형 균열입니다. 측정 범위로 볼 때 인천 서구에서 김포, 고양 일부까지 들어가요. 일반 균열이니 생존자들이 잘만 숨어 있어도 살 가능성이야 높겠지만, 크기가 크기다 보니 괴물 수가 어마어마할 겁니다. 생존자 구조 작업 마치는 대로 사냥 팀을 꾸릴 예정이며 지원자 받습니다. 선 작업을 위해 경인 지역 부근의 헌터들이 균열로 출동 중입니다.”
일반 균열이다 보니 균열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꽤 있다. 4차 경보가 울린 후에 그 지역에 균열이 생겨나니 그 전에 헌터들을 미리 파견해 내부의 희생자를 줄이는 전략. 일반 균열에서는 종종 쓰이는 방식이었다.
“현재 일반인 대피 작업에 구조대와 소방관, 경찰 인력 대부분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 각 지역 치안 공백에 유의하도록 엠바고 내린 상태지만 어떤 인터넷 유사 언론 새끼 하나가 그걸 깼고, 지금 언론이 쏟아 내는 온갖 잡스러운 기사로 사방이 난립니다. 일반 연락 아예 차단하고 임무 들어갑니다. 각별히 본부에 와 계신 분들 파악해서 임시로 팀 배정이 있었으니, 조정이 필요하신 분들은 말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