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흐릿해지는 감각 저편에서 익숙하고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치이익. 치익. 생존자 들리나? 제길, 뭐 보이는 게 없군.
눈물이 핑 돌 뻔했다. 문명의 감각. 익숙한 말씨. 지호는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모아 감지 파장을 펼쳤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아는 에너지가 있었다. 지문처럼 개개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형 에너지다. 완전히 파악할 순 없어도 얼추 짐작할 수 있는 그 감각.
이 상황 자체가 충분한 의사 전달이었다. 저쪽에 주원 외에도 다른 각성자가 있던 모양이다. 지호의 감지 파장을 쫓아 이쪽에 도착한 한 무리의 일행.
황당하단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뭐야, 이지호 헌터? 왜 여기에…….”
사람이었다. 사람들이었다. 괴물과 섞인 사람이 아닌, 진짜 사람들.
지호는 하하하 웃고는 그제야 정신을 놓았다. 선발대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균열로 파견될 리는 없었으니.
툭 끊어졌던 필름. 번쩍 눈을 뜬 지호는 회색 하늘을 보곤 여전히 균열 저편의 세계임을 알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다 상태를 보려고 몸을 기울이던 사람과 머리를 박았다. 빠악 하고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난 뒤, 상대는 머리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헉, 미안해요. 괜찮아요?”
신체 계열 능력자의 몸은 거의 흉기다. 그걸 있는 힘껏 부딪쳤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눈물 글썽이며 벌게진 이마를 문지른 상대는 뜻밖에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란 의미는 아니라서, 지호는 반쯤 울먹이고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왜 아직 이 안에 있는 거죠? 여기랑 밖이 시간 흐름이 달라요. 오래 있으면 큰일이 날 거예요.”
“시간 흐름요? 그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들어온 거예요?”
“아뇨. 아니, 사실 네. 그런데 저기, 근데 헌터님이 따라 들어왔다는 건 저희 실험이 들켰다는 거겠죠? 본부랑 연락도 끊겨서 다들 좀 불안한 상탠데요. 그것보다 여긴 왜 들어온 거예요?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요?”
“이쪽 시간이 빠르게 흐르든가, 아니면 경계를 지날 때 시간이 빠르게 흐르든가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전자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신호를 쫓아왔고요.”
정엽의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때까지 귓가에서 지직거리고 있던 수신기를 뺀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연 걸 들키긴 하셨어요. 관련 팀원들 체포됐고요.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여러분을 추적한 게 아니고 사고 때문이에요. 균열 소멸기에 거기 휘말렸거든요.”
“어쩐지, 상처가 너무 많다 했어요. 그나저나 들켰다고요? 긴급 프로토콜 때문에 신호가 끊긴 것 같네요. 들키면 증거 인멸하기로 해서요.”
“그거 저한테 말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걸요. 게다가 이지호 헌터님이잖아요. 부천 센터의 과격분자들과는 좀 다르시겠죠?”
“과격분자라니…….”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문 닫히기 전에 돌아가긴 해야겠는데 문제가 좀 있어요. 그래서 헌터님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지금 보니 문제가 하나인 건 아니네요.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까지 하다니 계획이랑 완전히 어긋났어요.”
“음, 잠시만요. 제가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워서. 전에 뵈었죠? 뵌 분 같은데.”
“인천 각성자 지부 최정엽입니다.”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낯설 수밖에 없다. 햇병아리 시절에 잠시 협력 임무를 했던 게 다였으니까. 계양 경계 앞이었던가. 노란 명찰이 아니라 빨간 명찰을 처음 봤던 때라 그나마 얼굴이라도 기억나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균열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혹은 헌터 일을 하지 않으려고 비헌터 연합을 이룬 일반인 각성자들 팀 사람이었단 게 중요했다.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으실 리가?”
“그게, 돌아갈 문 앞에 뭔가가 있어서요. 저희는 기동성에 탐색 위주로 팀을 짠 거라 전투력은 좀 부족하다 보니까.”
정엽은 쩔쩔매며 설명했다. 지호가 엎어졌던 자리에 임시 캠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지고 올 건 꽤 부지런히 챙겼는지 천막에 모포, 침낭 같은 것까지 상당했다.
한쪽 상자에 담겨 있는 간식거리 몇 개 잡아 뜯는다. 에너지 바를 우물거리는 그에게 눈치를 보던 정엽이 마실 것까지 챙겨 주었다. 간신히 허기를 달래자 약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지호는 견과 섞인 초콜릿 바를 몇 개나 집어 먹었다. 배가 찬 뒤에도 먹을 걸 우물거리며 말했다.
“실종자들을 찾으러 들어온 선발대, 맞죠?”
“예. 원래 계획으로는 잠깐 들어와서 좌표 측정 좀 하고 시설 설치하고 철수할 예정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공방대예요.”
“이주원 각성자는?”
“근방을 정찰 중입니다. 간밤에 이상한 구슬 비 같은 게 내렸잖아요. 그것 때문에 단체로 굳어서 몇 시간을 움직이질 못했거든요. 그것들을 피할 만한 장소를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마땅치 않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책임자죠? 불러 줘요. 할 말이 있으니까.”
“책임자 한 명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뜻이었어요. 다들 잃어버린 가족을 찾겠다고 자원들 해서 온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알겠어요. 보자마자 체포해서 끌고 가고 그러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엽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면서도 천막을 나갔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니 대여섯 명 정도 모인 것 같다. 무전으로 주원을 호출하는 걸 확인하며 지호는 눈을 감았다.
이들에게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을 것이다.
정보가 우선 들어가야 할 곳은 여기 이 대책 없는 실종자 가족 집단이 아니었다.
우르르 들어온 사람들은 지호 짐작보다 둘쯤 더 많았다. 머릿수는 총 여덟. 다들 불안한 얼굴인 걸 보니 확실히 비상시가 맞는 것 같았다.
초췌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호 앞에 앉은 주원은 대뜸 사과부터 건넸다.
“어, 그. 미안하군요. 나 때문에 사고에 휘말렸었죠.”
“무슨 사고요? 댁들이 주안 공단 균열을 닫았어요?”
“예? 아뇨. 누나랑 교대하고 나서 휘말렸다고 들었는데요. 그것 때문에 작업을 서두른 거였어요. 그러다 일도 터지고,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해서 잠깐 나온 건데 다시 들어갈게요. 죗값은 치러야 하니까. 근데 지금은 아녜요.”
“퍽이나 돌아가시겠다.”
“주안 공단 균열도 사라진 겁니까? 이지호 헌터는 그 균열 소멸기에 휘말린 거고? 하지만 크기가 작은 거였는데.”
“사고가 좀 있었어요.”
침묵이 이어졌다. 주원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 전양련 측에서도 저랑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실종자 가족들이고요. 절반은 각성잔데 나머지는 아닙니다. 연구 팀이에요. 시설 팀하고.”
“연합이 꽤 큰 것 같네요.”
“다른 곳과 비슷할 겁니다. 다만, 이쪽엔 이동 능력자라는 희귀한 재원이 하나 섞여 있고요.”
“그 잘난 이동 능력으로 문 뒤로 넘어갈 순 없어요?”
주원은 어이없단 얼굴을 숨기려고 애썼다. 물론 실패했지만.
“균열 외부와 내부를 이동 능력으로 넘어 다닐 순 없잖습니까. 초입까지 이동해서 걸어 다니는 건 몰라도. 알 만한 분이 이러시다니.”
“그 초입까지 이동하면 되죠.”
“이건 일반 균열 경계도 아니고, 경계가 사방에 퍼진 것도 아닙니다. 놈이 혹여 난폭해져서 문을 부수거나 망가트리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자극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뭐, 유인 같은 건 안 돼요?”
“움직이려고 하질 않더군요. 문 부근을 서성이던 괴물 몇 놈을 집어 먹고는 거기 못 박힌 것처럼 멈춰 있습니다. 가까이 가면 깨어나서 이쪽을 보긴 해요. 몰래 지나갈 수도 없단 뜻입니다.”
방금 그 작전을 제안해 보려 했던 지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보이는 간절함의 뜻을 눈치챈 것이다.
“그놈을 제가 이길 거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이지호 헌터님이잖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저런 능력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임보현 헌터보다 더 대단하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뉴스에서요.”
망할 뉴스. 망할 기자들. 지호는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댔으나 겉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헌터들하고 크게 차이가 있는 건 아녜요. 게다가 그 괴물이 어느 수준인지도 모르고 덤비는 건 제가 열 명 있어도 자살행위가 아닐까 싶은데요.”
지호의 응답에 좌중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모두의 반응이 지나치게 극적이라 말 꺼낸 사람이 당황할 정도였다. 특히 이주원 각성자의 절망이 볼만했다.
“전혀 불가능할 정돕니까?”
“어, 음. 확인 정도는 해 보죠. 저도 나가야 하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헌터넷에 올라오는 최신 업데이트 자료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혹여 등록된 괴물이라면 상대하기 쉬울 텐데.
주원의 도움으로 이동해 간 문 입구는 과연 균열 경계와 비슷했다. 색이 천천히 입혀지는 모양새가 안에서 볼 때와 반대다. 입구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덩어리. 아는 놈이었으나 상대해 본 적은 없는 녀석이다.
갓 각성했을 때 녀석 때문에 웅크리고 있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때 봤던 것보단 크기가 작은 놈이었다. 울룩불룩 솟아오른 피부 뒤편으로 돌기 몇 개가 길게 나와 있는데, 그중 제일 긴 것은 성인 남자를 너끈히 잡아 휘두를 만큼 튼튼하다.
“저게 소리에 반응하진 않던가요?”
“저기 달린 촉수 같은 게 주변을 훑어 내리긴 하지만 움직이진 않더군요. 근데 저게 위협적이라서요.”
“문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저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네요. 해삼은 소리에 민감한 놈이니까. 저것보다 큰 소리나 눈에 띄는 소리를 낼 수 있으면 유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결책 비슷한 것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이 밝아진다. 사방에 균열을 뚫어 놓는 재앙을 벌여 놓은 사람들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순박함이었다.
“해삼이에요. 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아까 무슨 설비 설치? 뭐 그런 거 한다고 했죠? 최대한 소음을 낼 수 있는 걸 만들어 줘요. 잠깐 정도면 돼요. 놈이 문에서 떨어졌을 때 다들 넘어갈 수 있도록 이분이 빠르게 두 번 왕복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한가요?”
“해 봐야죠.”
임시로 차려졌던 캠프는 빠르게 철거됐다. 버리고 가는 것도 더러 있었다. 짐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공방대가 멀찍이 설치하는 디코이는 장비 설치를 위해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저걸 켜 놓고 다른 곳에서 본장비를 깔고 있으면 그쪽 소음은 숨길 수 있었을 테니.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짐에는 한계가 있어 중요하지 않은 장비는 모조리 버려졌다. 가격이 꽤 있는 모양인지 사람들 눈에 미련이 뚝뚝 남는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목숨보다 귀한 건 없는 법이다. 지호는 단호하게 일렀다.
“나가자마자 튀지 마요. 실종자들 단서 찾은 게 있으니까 협회 사람들이랑 같이 듣는 게 좋을 거예요.”
“그냥 지금 말해 주시면 안 됩니까?”
“뭘 믿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