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지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이 시간에 무슨 소리가 날 턱이 없고, 그게 창문 열리는 소리여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덜 말라 축축하게 젖은 어깻죽지가 유독 서늘하다. 지호는 천천히 몸을 띄웠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밖에 나가는 덴 이만한 게 없었다.
습관처럼 퍼트린 감지 파장에 익숙한 게 잡혔다. 그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진 지호는 벌컥 문을 열었다. 한밤중에 김치찌개에서 고기 건져 먹다 걸린 딸내미처럼 당황한 보현이 서 있었다.
“앗, 어, 아직 안 잤어요?”
“뭐 해요?”
“아니, 몸이 적당히 나은 것 같고. 어차피 치료는 그, 이거 쓰는 편이 좀 더 효과적이거든요. 알다시피 이거 비싼 거잖아. 그래서…….”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대요?”
당연히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보현은 하하하, 하고 웃음으로 답을 얼버무리며 치료기 스위치를 올렸다가 어라, 했다. 아까 지호가 쓴 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당황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재차 물었다.
“언니 여기 와 있는 거 병원에 신고하면 어떻게 되게요?”
“아, 저 그거 차기 싫은데요.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죠.”
지호는 냉정하게 핸드폰부터 꺼냈다. 보현은 으악 하며 그를 제지했으나 환자가 빠져나간 걸 알고 한바탕 뒤집힌 병원 연락을 받곤 시무룩해서 다시 창틀을 밟았다. 지호는 기겁해 그를 붙잡았다.
“지금 날아왔어요? 이 몸으로?”
“그럼 걸어왔게요?”
“회복도 다 안 된 몸이잖아요. 왜 그렇게 무리하는 거예요!”
보현은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각성자가 강해지는 방법, 기억 안 나요? 힘을 한계까지 사용해서 최대 용량을…….”
“그거랑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언니 헌터도 그만뒀고, 사실상 균열에 재투입될 의무도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강해지는 데 집착해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죽었잖아요.”
보현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지호의 멱살을 잡을 것 같은 얼굴이었던 보현은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있어요. 좀 어른의 이유란 게 있는 거라고요.”
지호는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보현이 준우의 존재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혹시 진짜로 알고 있을까? 본 적이 있어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지호의 표정을 살핀 보현은 한숨과 함께 창틀에서 발을 내렸다.
“그, 왜. 균열 저편에 있는 괴물들 말이에요. 인간 같은 지능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지호 씨가 이야기하기 전부터 추측하고 있긴 했어요. 균열에서 만나는 것 중에는 진짜 똑똑한 것들도 더러 있고, 증거를 남기질 못해서 보고를 올리진 못했지만, 사람처럼 말하는 것도 본 적은 있어서.”
확증이 없는 이상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들이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개체일 수도 있었으니까.
“균열로 들어가고 싶어요. 그 자식이 그냥 죽을 놈은 아니거든요. 어디든 어떻게든 흔적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위험하죠. 알아요. 이 몸 상태로 어딜 간다는 게 무리라는 거. 그래도 가끔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뭘 못 하는 순간이 있어요. 다른 때는 잘 판단할 수 있는데, 준우 이름 앞에서는 잘 안 되네요.”
경계심이 되살아났다. 지호는 준우 이야길 하지 않아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슬쩍 질문했다.
“그분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실종자 가족들처럼?”
“아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여태 살아 있으면 멀쩡한 꼴은 아닐 거 아녜요. 그런 걸 보느니 그냥, 어디 한구석에서 다 낡아 떨어져 가는 뜯긴 전투복 같은 거나 좀 주워서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네. 이 자식이 정말 죽어 버렸구나. 영영 끝났구나. 더는 집착해선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 하고 싶어서……. 에이, 이 밤에 뭐라는지. 가 볼게요. 말 잘 듣고, 택시 타고 갈 거고.”
마주친 시선의 교차가 길지는 않았다. 지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투덜거리며 현관에서 삼선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었던 보현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참, 혹시 어디 임무 나갈 일 있어요?”
“무슨 임무요? 균열도 다 닫히고 한동안 조용할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괜한 걱정이었나 봐. 좀 느낌이 안 좋아서요. 걱정돼서 와 본 거기도 해요.”
“네네, 다음 핑계요.”
“진짠데! 알죠? 헌터의 감은 잘 맞는 거.”
“제 감은 별소리 안 하네요. 은퇴하신 분보다는 현직 헌터의 감이 더 잘 맞지 않을까요?”
지호는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보현을 손수 입구로 모셔다 택시 태워 보냈다. 툴툴대는 모양새가 간다고 말만 하고 그냥 날아가야지, 했던 모양이다. 아팠다 깨어난 보현은 조금 어린애 같아졌다. 어쩌면 지호가 조금 더 어른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불 꺼진 집으로 돌아오자 맥이 좀 풀리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존재만으로 지호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던 어른조차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생각해 보면 지호는 보현을 너무 특별 취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보현은 제일 중요한 자리에 소중했던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실종자 가족들도 그렇겠지.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한 결과가 지나치게 나쁘게 나왔다고 그들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찜찜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돌아온 지호는 어느새들 자러 간 채팅창을 닫으며 누웠다.
의무적 휴식이었다.
***
아침나절부터 헌터 채널이 시끄러웠다. 전양련 측 선발대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헌터들을 파견해야 할 텐데, 협회에서는 그런 위험 부담을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호의 보고에 따르자면 경계 저편에 있는 괴물들은 균열에 나타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협회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언론에서 헤드라인을 커다랗게 박아 1면에 관련 기사를 때려 버린 것이다.
<실종자 구조 등한시하는 헌터 협회, 자구책으로 경계를 넘어간 실종자 가족들까지 모른 척>
정보원이 뭐 하는 놈인지 몰라도 협회가 헌터들을 아끼느라 실종자들을 모르는 체한다는 기사를 실어 놓은 까닭에 아침부터 협회 전화가 끊인 적이 없었다.
상부로 일을 올린 후엔 한동안 못 했던 조정 훈련이나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려 했던 지호는 센터에 나가자마자 곧바로 회의에 불려 나갔다. 멀뚱히 눈을 굴리자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저를 부르셨다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지호 헌터. 인천 지부의 떠오르는 샛별이라죠. 양 솔이 그렇게 자랑해 대기에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지호는 대놓고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지부에서 왔다며 자신을 소개한 금유빈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악수를 청했다. 손을 흔들며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지옥에서 돌아왔다죠? 오자마자 미안하게 됐습니다만, 한 번 더 다녀오셔야겠습니다.”
“선발대 추적인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쪽이 안전한지도 파악해야 하고, 저쪽 환경이 어떤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소중한 헌터를 밀어 넣을 수가 없어서요. 대신 좌표 파악을 위해 열린 균열과 전양련이 열어 둔 문을 이용하기로 했거든요. 저쪽으로 넘어가 측정기를 두고만 와 주시면 됩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남은 균열이 있었나요? 어제 닫힌 게 마지막이었을 텐데…….”
“이번 사태 때문에 열렸던 것들이라면 맞습니다. 닫히긴 했어요. 하지만 이 건과 관련 없는 일로 열려 있던 균열 중에 남은 게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균열들이 일반적으로 열리는 균열보다는 빨리들 닫혔잖아요.”
그런 균열이 있었다면 헌터들이 쉬러 갈 수 없었을 터였다. 지호가 눈치를 살피며 아는 얼굴들을 바라보자 한 사람이 회의실 앞쪽 지도를 가리켰다. 보자마자 떠올렸다. 주안 공단 균열이었다.
“저기가 아직도 열린 상탠가요?”
“어제 잡혀 온 송예진의 비공식 진술에 따르면 갑자기 열린 균열들은 그들의 실험에 영향받았잖습니까. 그런데 주안 공단 균열은 그렇지 않았죠. 파악하기로는 전양련이라는 집단이 꽤 큰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쪽에선 상시 균열을 유지하는 실험을, 다른 한쪽에선 균열을 강제로 터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
“선발대를 쫓아 들어갔다가 뭐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저쪽으로 우회하겠다는 거죠?”
단어 선택은 썩 좋지 않았지만, 추측만큼은 정확했다. 금 박사는 어린 헌터의 생각에 동의하며 그제야 손을 놓았다. 침착하고 이지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의 것이라, 양 박사에게 익숙하던 지호에겐 사뭇 낯설었다.
“경계를 통과하는 방법에 관해 임보현 각성자에게 들은 바 있지만, 아무래도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분이다 보니 정확한 협조를 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경력으로 따져 보면 이지호 헌터보다는 임보현 각성자 쪽이 훨씬 임무 수행에 적합할 텐데, 아쉬운 일이죠. 은퇴자들의 몸 상태를 아는 마당에 더 떼를 쓸 수도 없고.”
금 박사가 부르는 임보현 각성자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모두가 당연하게 보현을 헌터라고 칭해 깨닫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보현은 이미 은퇴한 사람이라 헌터라고 부르는 덴 무리가 있다.
금 박사는 좀 더 자세한 작전에 관해서는 작전 팀의 브리핑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지호를 내보냈다. 회의에 부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 같았기에, 사실상 그를 보기 위해 호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회의실에서 나온 지호를 맞이한 성 팀장은 이번 작전 팀 담당으로 배속된 게 자기라며 다짜고짜 지호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어린 헌터에겐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의 휴식은 제대로 훈련하지 않으면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몸 상태가 썩 좋진 않네요. 잠은 제대로 잤어요?”
“어느 정도는요. 저 금 박사라는 분 왜 온 거예요?”
“양 박사가 전양련하고 엮인 건으로 조사 중에 있어서 총괄 책임이 비었거든요. 작전 지휘 계통이야 한 사람 빠진다고 문제 될 건 없는데, 전문 분야 자문은 필요하니까요.”
“양 박사님이랑 친한 사람이에요?”
“아뇨. 둘이 라이벌이라고 들었어요.”
그 문장만으로 지호 안에서의 금 박사 평가가 올라갔다.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만 박사가 되는 줄 알았다. 양 박사 주변엔 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던 까닭이다. 멋대로 각성자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희생에 경도되어 버리는.
하지만 금 박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호 쪽을 보긴 했지만.
“기자들이 시끄러워서 외부로 하는 이동은 전부 이동 능력자들 도움을 받을 거예요.”
“누가 밖으로 말을 전했을까요?”
“모르죠. 우리를 균열에 들여보내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지도. 지금도 충분히 많이 드나들고 있는데 말이에요.”
성 팀장은 비아냥거리면서도 확인을 마치고 작전에 필요한 새 장비 사용법을 빠르게 설명했다. 각성자 연합에서 본부를 습격당하곤 위기감이라도 느꼈는지 요즘 들어 새로운 물건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 원래 있던 것들을 사용할 수 있을 출력으로 개량한 거라곤 하지만, 좋아진 장비를 받아 드는 헌터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런 것들 한둘이 쌓여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줄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 혼자 가요?”
“경계 넘어가는 거 다른 사람도 데려갈 수 있는 건가요?”
준우가 하는 걸 봤으니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할 수 있을 것 같단 심증뿐이지 할 수 있다가 아니어서 확답을 줄 순 없었다. 지호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도로 좌우로 흔들곤 한숨 쉬었다.
“편히 쉴 날이 없네요.”
“임보현 헌터가 자원했었는데 금 박사가 거절했어요. 지호 씨가 안 맡았으면 그쪽을 다시 수배해야 했을 수도 있어요.”
“자원해요? 어떻게 알고?”
“이런 일 생기면 누가 전해 주는지 어떻게든 알아내서 연락해 온다니까요. 이럴 거면 왜 은퇴했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