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처음에는 알아 봤자 혼란만 가중되니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저도 좀 의문스럽긴 하군요. 각성하는 방법이야 비밀이어야 한다 쳐도 각성한 뒤의 지침 같은 것들은 공유되어도 좋을 텐데…….”
두 사람은 아래로 내려왔다. 터널 중간에 차가 떡하니 서 있었다. 이런 불법 주차라니. 차 안엔 별다른 물건이 없다. 들고 내린 건지 아예 비워 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예쁘게 조성된 공원 길 한복판.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려야 풍길 수가 없는 동네 같았다. 선사 유적 공원이라는 예쁜 팻말과 체험 환경 조성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틀린다고 뒤엎으면 좀 곤란해질 모양새였다.
감지 파장을 아래로 펼치자 곧장 잡히는 기운이 있다. 다만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지하에 시설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찾을 수는 있겠습니까?”
“음, 제가 이형 에너지만 좀 감지할 수 있어서…….”
안 된다는 소리다. 승찬은 신중했다. 일반 건물도 문제지만 유적지니 뭐니 이름 붙어 있는 것들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지호 씨보다 더 잘 찾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부르면 안 됩니까? 왜, 예전에 균열 여는 기계 찾을 때 도와줬던 차나연 헌터 같은…….”
“흠, 쉬고 계실 것 같긴 한데…….”
차나연은 감지계 특화 헌터였으니 급성 균열 다빈도 발생 때도 다른 헌터들만큼 무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균열이 닫힌 뒤에 오히려 효용성을 발휘하는 헌터인지라 지금 시간이 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지호의 예상에 승찬은 고개를 저었다.
“안 부르면 화낼걸요. 전에도 그러셨잖아요.”
“저보다 차 헌터님 잘 아는 것 같은 말 좀 그런데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서.”
승찬의 추측이 맞았다. 나연은 연락받기 무섭게 주변에 여유 되는 이동 능력자가 있나 수소문하더니, 지호의 친구인 소민을 설득해 시흥으로 넘어왔다. 이십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민의 해쓱한 얼굴을 본 지호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소민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도와줄 여력이 있어서 다행이죠. 차 헌터님이 지호 씨한테 중요한 일이 있다던데.”
“뭔가 중요한 일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임보현 헌터는 늘 폭풍을 몰고 다녔어요. 그의 후계자인 이지호 헌터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어요.”
“후계자 아닌데요…….”
“언론이 그러던데요?”
나연은 까르륵 웃었다. 소민과 승찬이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이 지호는 그들의 상황을 간략히 요약했다. 정체불명의 이형 에너지를 묻히고 다니는 균열 구조대원이 있어 그를 추적하다 여기에 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예전에 나연과 함께 쫓던 문제의 기기를 반출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나연의 얼굴은 금세 심각해졌다. 지호가 어떤 걸 쫓아다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소민 역시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주의를 기울였다.
“뭐 하는 사람들일 것 같나요?”
“실종자 가족들일 확률이 제일 높은 것 같아요. 가끔 광장에서 시위도 하고 유튜브 채널 만들어서 정부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느니 하는 말 하는 극단적인 사람들 있잖아요. 이쪽은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 같더라고요.”
나연이 감지해 낸 바에 따르면 지하로 5층은 되는 것 같은 벙커가 있다고 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터널 옆 엘리베이터와 근처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가 하나.
“힘으로 젖히면 열릴 것 같긴 한데, 들키겠죠?”
“양쪽에서 동시에 들어가기엔…….”
“우리 무력이 부족하고요.”
승찬은 일반인이었고 소민은 이동 능력자라 염동력을 약간 다룰 수 있지만, 전투 계열은 아니다. 물건을 옮겨 문을 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만약의 사태에 다른 이들을 옮기기 위해서는 소민과 떨어져 있기 어려웠다. 나연은 아예 비전투 인원이다. 심지어 승찬보다 더 쓸모가 없을 터였다.
전투 시 자신의 무쓸모를 먼저 고백한 나연은 그가 감지해 낸 벙커 구조도를 대강 흙바닥에 슥슥 그리며 설명했다.
“문 안 뜯고 눈에도 안 띄게 들어가려면 소민 씨 능력이면 충분할 거예요.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지표로 삼을 게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지하로요? 뭐라도 있으면 어쩌죠? 물체랑 몸이 중첩되면 벌어지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하냐면…….”
“겹치기 전에 인지할 수 있잖아요. 정 어려우면 한 명씩 내려가요. 그렇다고 땅을 파고 갈 순 없잖아요. 그건 진짜 최후의 최후쯤 골라야 할 방법이라고요.”
심지어 눈에 띄지 않기는 더 어려운 방법이기도 했다. 소민은 신음했으나 나연의 우격다짐을 이기지 못해 울상을 지으며 거리를 가늠했다.
“아래로 십 미터쯤요. 그 부근에서 이형 에너지가 느껴져요. 땅에서 바로 아래는 아니고.”
“쯤은 안 돼요! 정확해야 한다고요!”
“이 옆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 위치랑 비슷하지 않아요? 그쪽으로 통로가 나 있다면서.”
“지하 주차장으로 먼저 이동하죠. 대신 경비실에 먼저 들러요. 카메라 위치 확인 좀 해야겠어.”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 중에 제일 노련한 사람답게 나연의 결정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운 좋게 경비실에 사람이 없어 지하 주차장 카메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대가 보이는데, 그중 시야에 다른 카메라를 잡는 화면이 있었다. 그것들의 반대 화면이 보이질 않는 걸 보니 저게 내부 시설 측 카메라 같았다.
“입구에 두 대. 일단 보이는 거로는 그게 다네요. 소민 씨. 저거 위로 좀 틀어 봐요.”
거리를 가늠한 소민이 화면에 비치는 곳으로 염동력을 가했다. 장님이 바닥 더듬듯이 엉뚱한 곳으로 가해지던 힘은 천천히 좌표를 잡고 지시를 이행했다. 오 분 남짓 후에 카메라가 약간 위로 돌아가자 그 사각지대 부근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다시 손짓. 팀이 움직였다.
카드를 읽는 출입문이다. 카메라 사각지대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네 사람은 다시 의견을 나누었다.
“저쪽에도 카메라가 있겠죠? 출입하는 사람 확인하는 것 같은.”
“여기가 그렇게까지 중요 지점이면 철통 보안 상태가 맞을 텐데, 그게 아니면 외부 카메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지면에서 딱 떨어지는 높이가 아니라면 거리를 가늠하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주차장만 해도 다른 건물들과 달리 몇 미터 아래에 있거든요. 아마 저 유적지를 보호하느라 주변 설비를 비슷하게 맞췄나 봐요.”
지호는 답답함을 숨기려고 애쓰며 나연을 흉내 냈다. 그에겐 이형 에너지 설비 흔적 정도나 잡히는 게 다였다. 감지계 훈련 좀 제대로 할걸. 범위는 넓어도 균열 밖에선 효율이 별로였다.
물건을 내부로 몇 번 이동시켜 좌표를 가늠했다. 다른 건물이라면 지하 이 층과 삼 층 중간쯤일 위치. 소민의 능력으로 들어온 건물은 어둡고 조용했다. 사용하는 층 불만 켜 놓은 건지, 습격자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알 수가 없다. 지호의 선글라스는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것은 아니었다.
움직이다가 어딘가에 부딪친 나연이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윽, 불 켜면 들킬까요?”
“김 반장님 하듯이 문 걷어차고 방벽 친 채로 입장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긴 했을 텐데.”
“재미만 있고 정보는 없을 수도 있었어요. 구조대원분 의견은요?”
승찬은 주변에 불 켜진 곳이 하나도 없냐고 물은 뒤에야 의견을 내놓았다.
“위치 파악을 했으니까 적외선 장비를 갖고 돌아오는 건 어때요?”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채고 자료를 파기하면요?”
“아니면 지호 씨 혼자 수색하는 수밖에요. 일단 제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확인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더 없고.”
나머지 사람들이 수락하고 소민이 승찬을 데리고 위로 올라간 사이 나연이 혀를 차며 속삭였다. 둘뿐인데도 잔뜩 낮춘 목소리가 인위적이었다.
“저 구조대원이랑 자주 같이 다니네요. 나이 차이가 좀 나지 않나?”
“친구가 되는 데 나이 차이가 크게 걸림돌이 되는 것 같진 않더라고요.”
나연은 그런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며 칭얼거렸다. 긴장을 푸는 나름의 노력 같았다. 소민은 혼자 돌아와 승찬이 경비실과 지하 도로가 둘 다 보이는 위치에서 대기 중이라고 알렸다.
“광학 장비까진 안 바랄게요. 두 분 선글라스 중에 야간 시야라도 보정되는 건?”
“없어요.”
“저도 임무 들어갈 줄 모르고…….”
“어쩔 수 없죠. 차 헌터님은 감지 능력 꾸준히 쓰면서 뒤 확인하고 오시고 소민 씨는 가운데서 가요. 제가 앞장설게요.”
지호가 나연만큼의 감지 능력을 갖추고 있기만 했어도 일이 쉬웠을 터였다.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자, 하고 어두운 복도로 나온 지호는 CCTV마다 불이 꺼져 있는 걸 발견했다. 전력 낭비를 경계하는 게 맞았는지, 아니면 이만한 시설 운영 자체가 비밀이라 전력 소모를 들키지 않으려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감시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일행에게 호재다.
“출발해요.”
신호와 함께 지호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누가 침입할 거라 생각하지 않은 까닭인지 내부엔 별달리 경계할 것이 없었다. 그대로 한 층을 다 돌았는데도 아무것도 없다.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이 층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감지되는 건 얼추 높이가 맞는데……. 혹시 좀 큰 공간이 있고 거기는 특정 층에서만 출입 가능한 거 아닐까요? 여기 나머지는 그냥 창고 같은 거라거나.”
가능성 있는 말이다. 연수 센터도 연구실마다 높이가 좀 달랐다. 부평 각성자 연합도 그렇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비상구 불빛이 켜져 있어 다른 곳처럼 어둡지 않았고, 소민과 나연의 굳었던 어깨가 슬쩍 풀렸다.
“와, 저 폐소 공포증 같은 거 생기는 줄.”
“이대로 계속 들어가요? 밖에서 대기하는 구조대원분한테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일리 있는 말이다. 지호는 승찬 쪽으로 추측한 상황을 보고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근방의 전력계들을 확인하던 모양이었다.
-산업용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기를 엄청 쓰는 건물 발견. 거기서 멀지도 않아요. 무슨 연구소라고 이름 붙어 있긴 한데.
“출구가 하나 더 있나 봐요. 버젓이 연구소인가 뭔가 하는 이름으로 쓰나 보네.”
이쪽을 허술하게 내버려 두는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 엽니다, 하고 속삭인 지호가 잠긴 문고리를 단박에 뜯어내자 꽤 큰 소음이 울린다. 뒤의 두 사람이 숨을 헉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지호는 문고리를 쥔 채 기다렸다. 달려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까 내려간 구조대원분 외엔 없는 거 아닐까요?”
“그런 거면 일이 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