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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16화 (117/260)

116화

“교육 팀을 맡지는 않으시겠다고요?”

“할 일이 있어서요.”

전투복을 반납하며 지호에게 재차 물음을 건넨 협회 직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지호만큼 선전하기 좋은 간판도 더 없었다. 예전보다 가용 인원이 적어진 마당이니, 재능 있는 각성자들이 이쪽 협회에 소속하도록 권하는 물밑 전쟁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지호는 처음 각성하고 나서 보현에게 찰싹 붙어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르쳐야죠. 저는 그분들이 왜 이해를 못 하는지, 왜 못 따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헤맬 것 같은데요.”

“하지만 지호 씨 보려고 부천 센터 등록하신 분들도 많아요.”

“가끔 얼굴 비칠게요. 하지만 교육 전담은 어려울 것 같아요. 재차 권해 주셨는데 미안해요.”

새 전투복을 지급받은 지호는 신형으로 개량된 전투복의 몇 가지 개선 사항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성자 연합 측에서 시제품을 본 적이 있어 낯설지는 않았다.

장인들은 설비가 복구되기까지 연수 센터와 부천 센터에 임시로 공간을 할당받아 일했다. 부서진 것이 많고 새로 만들어야 할 것 천지라 잠시라도 쉬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치료기가 우선하여 보급되는 동안에도 한쪽에선 전투와 관련된 물품들을 꾸준히 찍어 냈다. 마정석 보급이 원활해진 덕에 새 물품 수급에 어려움이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센터에 있는 장인분들이 지호 씨가 있어야 말을 들어주실 텐데…….”

“원래 고집 센 분들이라 어쩔 수 없죠, 뭐. 부평 복구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오래 계시진 않을 거잖아요.”

직원은 한숨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전투복을 받아 들었다.

“사실 다른 건 다 핑계고요. 연구 팀에서 균열 넘어가는 실험 때문에 지호 씨가 여기 남아 줬으면 하는 눈치예요. 임보현 헌터는 더는 균열에 들어가기 어려우니까.”

보현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몸이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망가진 상태라 깨어난 것도 기적이었다. 예전처럼 강단 있는 모습 뒤로 파리해진 안색이 지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더는 파트너 노래도 부를 수가 없다. 혼자 균열 가겠다고 나설까 봐 준우 이야기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양 박사님이 연수 센터에 좀 들러 달라고 메모 남기셨네요. 좀 길어서 직접 보셔야 해요. 그밖에 서명은 장인님이 새 설비 테스트 끝나는 대로 들고 가라고도 말 남기셨고요.”

“양 박사 쪽 메모는 전할 필요 없어요.”

직원은 눈치를 살폈다. 시키는 건 해야겠는데 지호의 언짢은 얼굴을 보자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 굴리는 게 눈에 보였다. 잘못한 건 이 사람이 아니지. 지호는 한숨과 함께 이번만 받는 거라고 말하며 메모라는 이름이 버거워 보이는 테스트 노트를 받았다.

일전에 봤던 실험실 자료가 있었다. 균열을 열어 놓은 채로 문을 고정하는 장치에 관한 자료다. 균열 경계 저편에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지호 한 사람이 되었으니 실험에 협조해 줄 수 있겠냐는 요청도 달려 있다.

양 박사 주관 실험이라 도울 마음이 없었던 지호는 뒤를 읽어 보지도 않고 그걸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불편한 미소. 그러나 그에게 대놓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양 박사가 재차 지호를 불편하게 하자 센터 안에서 대놓고 그의 행적을 까 댄 덕분이었다.

둘 사이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데도 그들이 완전히 틀어지지 않는 건 결과적으로 의도 자체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량한 쪽에 속하는 탓이었다. 그게 아니라 자기 사리사욕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다면 당장 엎었을 것이다.

“역시 볼 필요 없는 거였네요. 앞으론 전하지 않으셔도 돼요. 안 받겠다고 말했단 거 꼭 전달해 주시고요.”

직원은 머뭇거리다가 알겠다며 자료를 받아 돌아갔다.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던 지호는 볼을 주무르며 한숨 쉬었다. 오늘로 균열이 전부 닫혔으니 미뤄 놓았던 일들을 조사하는 것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사이 없어진 단서들이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준우가 말했던 자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번 같은 급성 균열 대량 생성 사태가 또 벌어질 위험이 있다. 아무리 봐도 급한 쪽은 경계 연구가 아니라 이쪽이었다.

죽은 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니 누구에게 사정 털어놓고 의논하기도 어려웠다. 신생아만큼 잠을 자야 하는 보현에게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다. 준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당연히 무리할 사람이다.

박 팀장이 지호를 잠정적 우군으로 취급하고 있다 한들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 김 반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두 사람은 여러 방면으로 지호가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고,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어쩐지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것 자체가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덕분에 여전히 승찬은 지호에게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식 업무를 마치고 휴가를 받자마자 승찬이 소속된 구조대를 찾았다. 지호를 알아본 구조대원들이 눈을 빛내며 인사를 건넸다. 한때 이 팀의 햇병아리 도우미였던 임시 헌터가 유명해진 것이 그들을 뿌듯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지호 씨, 들어와요. 마침 그 사람 지금 현장 갔다가 복귀했어요.”

굳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일전에 보았던 서류에 찍힌 사진과는 조금 다른 얼굴이다. 피로에 찌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표정 자체가 음울하고 차가웠다.

송예진은 구조복 지퍼를 반쯤 내린 채 흙투성이가 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샤워실이 꽉 차 대기 중인 모양이었다. 지호는 안쪽을 슬쩍 확인했다. 안면 있는 대원들이 많았다.

“제가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너무 눈에 띄겠죠? 아저씨가 하면 어때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며 나설 줄 알았던 승찬은 주저했다. 이쪽을 흘깃거리는 대원들이 있어 목소리를 잔뜩 낮춘 그는 지호만 들을 정도로 속삭였다.

“그럴 나이의 남녀가 붙어 있으면 휘파람 부는 아저씨들이 좀 많은데요.”

“그렇다고 제가 저 사람을 의심 중이라 잡으러 왔다고 광고할 순 없잖아요. 정 안 되면 나중에 저라도 팔아먹어요. 요즘 여기저기서 저 팔거든요.”

“지호 씨 이야기를 그 틈바구니에 던지면 저 진짜 매장당해요. 어디 어린애 건드리느냐고.”

지호는 웃었다. 임시 헌터 시절부터 보았던 사람들이라 더더욱 그를 애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대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사람들뿐이긴 하지만.

“그럼 좀 기다릴까요? 어차피 먼저 씻은 분들 가고 나면 좀 빌 거예요. 아니면 집에 가실 때 따라붙든가. 좀 스토커 같지만 어쩔 수 없죠.”

대화하는 와중에도 지호의 신경은 예진에게 집중되었다. 각성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는데도 미미하게 이형 에너지가 묻어 있었다. 균열에 파견 다녀와서는 아니다. 마정석을 소모하는 도구의 흔적이었다. 치료기를 제외하면 구조대원들이 흔하게 접할 물건이 없었기에 반쯤 심증이었던 의심은 거의 구체화되고 있었다.

“만약 털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김 반장님의 도움을 받아 봐야죠. 남들 머릿속 뒤지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시니.”

특수반 일은 초창기 정도에나 도왔으나 그의 무자비한 일 처리는 김 반장의 이미지를 거의 깡패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알고 지내는 각성자들 중 어떻게 각성한 건지 궁금한 사람 제일 꼭대기엔 김 반장이 있을 것이다.

물론 유용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었다. 양 박사의 사람이란 생각에 신뢰할 대상으로는 좀처럼 여길 수 없었지만.

“나온다. 따라가요.”

예진이 피로에 찌든 얼굴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센터를 나가는 동안은 다른 구조대원과 동행하기에 말을 걸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지호는 도중에 생각을 바꾸었다.

집 앞까지 간다면 그 앞에서 말을 걸어 보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대로 추적하자. 이번 균열에서 나온 뉴스가 많으니 곧장 수상한 사람들과 합류할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지호가 나설 필요는 없다. 가르치는 걸 잘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 이런 종류의 헌터 업무가 아닌 위험한 일들엔 다른 사람들보다 차라리 지호가 나서는 쪽이 좋다. 혼자서 많은 사람 몫을 해내면서도 자기만 입 다물면 비밀이 유지되니까.

생각대로 예진의 목적지는 집이 아니었다. 외곽 순환 도로 쪽으로 빠지더니 도로를 약간 돌아 곧장 국도로 나간다. 목적지가 시흥 쪽이었다. 예전보다 능숙해진 힘으로 승찬까지 함께 허공에 띄운 채 차량 뒤를 따라붙은 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네요.”

“뭐가 보입니까?”

“전에는 차를 따라갈 만큼 속도를 낼 순 없었거든요. 끽해야 자전거로 좀 빨리 달리는 정도의 속도?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요?”

승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호와 예진의 차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할 말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친구의 허물을 입 밖에 내 지적하긴 어렵다. 그 친구의 힘으로 몇백 미터 상공에 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실전을 겪으면서 힘을 쓰는 데 익숙해진 게 아닐까요?”

“역시 그렇겠죠?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한 기분이에요. 점점 더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온갖 힘을 써 대는 모양새가 처음부터 사람에 가깝진 않았겠지. 지호는 그런 말을 삼키며 예진의 차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국도를 벗어나 아예 구불구불한 산길에 들어선 차량은 울퉁불퉁한 흙길을 지나쳤다. CCTV를 피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 가다가 다시 국도로 올라와 시내 부근에 진입한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어느 지하 차도 쪽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나오지 않았다. 긴 차도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멈출 곳도 마땅치 않은 곳이다.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 안에 뭐가 있는 것 같죠?”

위에서 보니 부근에 공원과 아파트 단지 같은 것들도 보였다. 번화가는 아니어도 주택가였다. 남들 눈을 피하기는 어려운 장소일 텐데.

묘하게도 예전에 이 근처를 지난 적이 있었다. 시흥 시청 부근이던가. 김 반장과 함께 특수반 일을 할 때 들러서 털어 버린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때는 시내 한복판에서 영업하는 곳이었는데…….”

“뭐가 말입니까?”

“외부 일을 좀 맡아서 했었거든요. 그때 불법 단속반 비슷한 걸 했었는데, 이 근처에 있던 사무실 하나를 털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 미리 말하는데 이상한 짓 한 건 아녜요. 그냥 방벽 치고 들어가서 연구 엎고 자료를 들고 나왔는데……. 이상한 짓이네요. 김 반장님이 시켰어요.”

“예진 씨 고향은 이 동네도 아녜요. 연고지에도 시흥은 없었거든요. 대구에 살다가 이쪽 지방으로 올라왔다고 되어 있는데.”

“대구요? 그 균열 피해자겠네요.”

3세대쯤 경북 지방에서 대규모 균열이 열렸던 적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균열이 폭주해 실종자며 사망자 수가 어마어마했던 균열이다. 나중에 헌터가 된 다음에는 그게 신규 각성자 때문임을 알았다. 갓 각성한 이형 에너지 계열 각성자가 뭣도 모르고 안정기 전에 균열을 빠져나간 탓이었다.

심지어 악성 균열이기까지 했으니 최악 중에서도 최악. 모든 사태에서 가장 나쁜 상황을 꼽으라면 대구를 거론하게 될 만큼 나쁜 기록들을 갈아 치웠었다.

“그때 이후로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로 했었다고 들었는데, 저도 각성하기 전까지 아는 거 하나도 없었어요. 상부에서 왜 이렇게 정보를 틀어막고 있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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