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하필 포켓 부분이 엉망이 되어 있어 이름은 알아볼 수 없었다. 약간 망가진 선글라스를 낀 채 천천히 지호 쪽으로 걸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왕의 호위대인가?”
지호는 아주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송곳처럼 곤두선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아침 인사를 건네는 평범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우리는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해. 먹이들의 변이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서, 왜 자식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지…….”
남자의 얼굴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지호는 몸을 천천히 움츠리면서 균열 위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혹시 곧장 공격해 올까 염려된 탓에 행동이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하는 말 하나하나 중요한 자료일 텐데, 경계를 통과해 나온 걸 보면 분명 괴물이긴 할 터였다. 퀸의 숙주 중 하나인 옛 헌터다. 영상 화질이 좋지 않았으나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봐. 왜 대답이 없어?”
남자의 얼굴이 좀 더 이상한 방향으로 향했을 때였다. 지호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곧장 바닥을 박찼다. 바닥이 쑥 멀어졌던 바로 그 순간.
“이러면 곤란하지. 두 번은 안 당한다고 했잖아.”
지호는 공장 옥상에 요란하게 처박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뛰어올라 지호를 내리찍은 남자는 가볍게 착지해선 몸을 풀었다.
“다짜고짜 공격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장님 놀리는 거야 뭐야?”
남자의 걸음 소리가 묵직하다. 신체 계열. 주리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지호는 요란하게 기침하며 반파된 콘크리트들을 밀고 일어났다. 소리를 들은 남자가 우뚝 멈추었다.
“어, 뭐야……. 인간?”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장님을 놀린다느니 운운했던 것답게 남자의 손이 허공을 몇 번 휘저었다. 요행이었나? 지호는 다시 한 번 균열을 벗어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남자의 엄중한 경고가 지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두 번 힘 조절 안 할 거야. 얌전히 있어.”
좀 전에 내려찍기 당한 어깨가 미친 듯이 아팠다. 지호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어깨에 치유 능력을 불어넣었다. 남자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그럼 그렇지. 인간은 무슨 인간이람. 그래서 호위대, 이번엔 무슨 볼일이지? 진척 상황 보고도 끝났고 먹이 수확도 끝났는데.”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지호를 위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지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 아마 이건 균열 경계 최근접 거리에서의 구조 요청일 것이다.
남자의 행동은 특이했다. 지호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척과 에너지를 감지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지호를 붙잡았다. 손목에 어마어마한 압박이 느껴졌다. 부러뜨리려는 건가? 긴장한 지호가 반격하려던 순간 남자가 손에 힘을 풀었다.
“이상하군. 이 정도 신체 변이에 꽤 넓은 탐지 범위하며 이동 속도도 상당한데. 아까 자가 치유도 했잖아. 혹시 여왕의 새 자식? 호위대가 아니라?”
이건 무슨 개소리지. 지호는 떨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남자가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남자는 혼자 몇 마디를 중얼거리더니 청천벽력 같은 소릴 꺼냈다.
“말을 못 하는 개체이거나 정신계 통신 개체인가? 어렵게 됐는데. 내 주인은 지금 좀 멀리 있어서……. 기다리겠나? 아니면 같이 이동할래? 그 편이 빠를 수도 있겠군.”
지호의 몸은 눈에 띌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걸 무슨 신호로 해석했는지 고갤 끄덕이며 지호를 잡아당겼다. 지호는 균열 경계로 자길 잡아끄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저놈은 경계를 통과하고 자긴 안전한 저쪽으로 넘어가게 해 달라고.
그러나 남자에게서 성격이 약간 다른 이형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그것이 남자와 지호를 모두 감싼 순간 지호는 알았다.
망했구나.
구조 신호를 보고 다른 방향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헌터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사슴같이 떨며 균열 저편으로 끌려가 버리는 지호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 * *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을 태어난 때로 치는 족속들이었던지라, 그룸피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축에 속했다.
네 개의 앞발에 두꺼운 껍질. 다른 개체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범위 탐지가 가능한 성능 좋은 더듬이까지. 그룸피는 탈피하자마자 비슷한 수준이었던 녀석 하나 사냥하는 데 성공한 탓에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허약한 본체를 호위병들로 감싸지 않으면 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돌연변이의 숙주를 보고도 관대하게 머리를 기울일 수 있었다.
“어디 가?”
“전언 들으려고 정신계 찾으러. 너 혹시 할 수 있나?”
“못 하지. 그거 드문 능력인데. 그룸피 먹이 많이 먹어도 발현 안 하더라.”
“주변에 아는 놈 없어?”
“먹어 봐야 알겠는데.”
“가뜩이나 없는 거 더 집어먹으면 안 되지. 좀 키워 봐. 분열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잖아.”
그룸피는 다리를 휘적휘적 흔들며 남자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붙잡고 있는 다른 개체를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룸피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비유가 아니었다. 그는 길쭉하게 솟아오른 안구로 처음 보는 개체를 관찰했다.
“이거 뭐어지?”
“여왕이 보낸 놈이야. 말을 못 하는 것 같아서 통역해 줄 정신계 놈 찾고 있는 거라고. 알았으면 좀 비켜.”
“맛있어 보이는데. 그룸피 먹게 한쪽 분열 좀 해 줄래?”
남자가 팔을 휘두르자 그룸피의 눈이 한쪽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룸피는 고통에 버둥거리며 수많은 다리로 바닥을 쾅쾅 두드렸다.
“얼쩡거리지 말고 문이나 잘 지켜. 요즘 이상 현상이 수두룩하다고.”
“공격했어! 그룸피 공격했어!”
“꺼지라고.”
그룸피는 나머지 한쪽 눈마저 잃고 슬퍼하며 다른 방향으로 기어갔다. 남자가 왼손으로 이루어 낸 결과였다. 덕분에 그에게 붙잡혀 끌려가던 지호는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균열 경계를 지나자 거기 펼쳐진 건, 괴물들의 사회였다.
괴물들이 사람처럼 말하는 것만 해도 머리를 몇 대는 맞은 기분이었는데, 그것들이 지성 있는 생물처럼 의견을 교환하는 것까지 보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쩌면 필사의 반항을 해 대며 균열 밖으로 빠져나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균열 경계 부근에 모여 있던 괴물 군락을 지나자 놀랍게도 숲 같은 곳이 보였다. 숲이라니. 지호는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숲이 맞았다. 나무와 식물의 형태가 지나치게 괴이쩍긴 했지만…….
“이 근처에 있었는데…….”
지호가 뒤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남자는 괴상한 숲에 쑥 발을 디뎠다. 밟는 감촉이 이상했다. 푹신하거나 쑤욱 빠지거나. 후자는 밟힌 뒤에 약간 꿈틀거리기까지 했기에 지호는 점점 더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죽는 걸까.
남자는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사람 같지는 않았다. 괴물들의 대화로 추론해 볼 때, 놈들은 각성자들과 비슷하게 구분된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 능력 가진 놈을 먹어서 다른 능력을 얻는 것 같았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공포를 견딜 수 없어졌다. 지호는 다른 사람들보다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올라운더니 뭐니 하며 떠받들리던 장점이 여기서는 최악의 단점이 되고 말다니. 지호가 여왕의 호위대인지 뭔지가 아니란 사실을 들키고 나면 이 남자는 지호를 죽일 거다. 그리고 먹어 버릴 거고.
중간중간 걸으며 본 괴물만 수가 어마어마했다. 지호는 자기가 공부했던 괴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보이더라도 다른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거나 숨고 혹은 먹히고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지호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유린하던 괴물들이 이곳에선 약자였다.
계양 균열에서 지호를 공격했던 것과 비슷한 종류가 수풀 사이를 잽싸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지호는 도망치거나 남자를 공격해 달아나는 종류의 계획들을 모두 포기했다. 끌려가선 묻는 것에 대답 못 하고 정체 들켜 죽는 게 운명이라니, 이 도대체 무슨…….
길 하나 없이 무성하던 수풀 사이로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허리까지 자라 몸을 찌르던 칼날 같던 풀들도 자라지 않은 곳이었다.
균열 안쪽답게 푸르른 녹음도 짙은 싱그러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곳은 다른 곳과 어울리지 않게 평화롭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햇살 같은 것도 비추는 것 같다. 지호는 고개를 들어 전혀 눈부시지 않은 해를 한 번 확인했다. 해가 있긴 했다.
“앉지. 듣는 귀가 없는 곳이 필요해서 좀 멀리 왔으니까.”
남자는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지호 팔을 놓았다. 자유로워졌으나 도망치려 한다면 처음처럼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질 것 같아, 지호는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두꺼운 이끼가 깔린 것처럼 푹신하고 축축했다.
“됐어. 긴장 풀어라. 여왕의 호위대가 아닌 건 알고 있어. 감시자가 보지 않는 곳이어야 해서 문에서 끌고 나왔던 거다. 임보현은 무사한가?”
“네?”
“전에 봤을 땐 팔을 다쳤었거든.”
“네?”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뿐인가? 좀 모자란 친구인 모양이군.”
그럴 리가 없었다.
보현이 팔을 다쳤을 때……. 지호는 그가 균열 저편을 처음으로 탐지했던 그 송도 균열을 떠올렸다. 다른 곳에서 팔이 잘린 채로 돌아왔던 보현의 창백했던 얼굴도.
그런 몸 상태로 남을 구하려다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인 보현의 이름이 이런 곳에서 튀어나올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남자는 지호의 반응을 차분히 기다리다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
“임보현 헌터를 모르나? 현직이니 균열에 들어왔을 텐데…….”
“당신 누구예요?”
“옛날에 헌터였던 사람이지. 지금은 사람이 아니지만.”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약간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는 장님이라고 했다. 살짝 흘러내린 선글라스 아래로 붉은빛이 언뜻 비추는 것 같았다.
남자는 서둘러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실례. 진짜 장님인 건 아니야. 내가 보는 걸 나만 보는 게 아니라서. 이건 투과 역할은 거의 못 하는 거라 쓰고 있는 거고, 사실 다른 놈이 내 시야를 공유받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라서. 대외적으론 장님이라고 해 두는 게 속 편하긴 하지. 머리 나쁜 놈들뿐이라서 잘 먹혀.”
“어떻게 살아 있죠?”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네 쪽도 만만치 않게 이상한데. 느껴지는 기운이 여왕의 호위대랑 비슷해. 처음에는 착각했고, 나중엔 얼추 알았다. 호위대한테 먹혔던 모양이군. 그다음에 각성한 거야.”
지호는 남자가 쏟아 내는 낯선 정보에 당혹감을 표했다. 한때 헌터였던 남자는 후배의 모자람을 지적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호가 아는 어떤 사람처럼 차분히 기다리며 일렀다.
“과격하게 끌고 온 건 미안하다. 오래는 못 있어. 이야기만 듣고 돌려보냈다고 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