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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99화 (100/260)

99화

“여보세요.”

바람 소리가 후우욱 들려왔다. 전화를 받을 줄 몰랐는지 한참 머뭇거리기에 지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할 말이 있으면 준비한 멘트나 읊어 볼 것이지. 새벽이 한창 깊어 가는 중에 부지런하기도 하다. 국제 전화가 아니었으니 잠 없는 누군가가 걸었을 텐데.

또 전화가 울렸다. 아까 그 번호다. 지호는 받자마자 짜증을 섞어 말했다.

“그만 좀 해요. 이 늦은 시간에.”

-언제 나와요?

“뭐요?”

-센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좀처럼 나오질 않으시길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호는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당연히 모르는 번호다. 균열 어플에 내장된 기본 기능이 있어, 헌터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은 헌터들끼리는 알아볼 수 있게 표시된다. 나중에 외부로 출동 나갔을 때 연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합법적 정보 유출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표식도 없다. 일반인이거나, 헌터가 아니란 의미일 것이다. 지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차피 센터를 거의 다 나온 참이었기에 망설일 것 없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드물게 켜진 연수 센터 앞.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익숙한 선글라스에 최근에야 조금 낯익어진 상대가 보였다. 얼굴만큼은 친숙하다. 매일 보는 주리의 형제였으니까.

“이주원 각성자? 제 번호는 어떻게 알고…….”

“누나 핸드폰 뒤졌어요.”

지호는 침묵했다.

아무리 훈련에 매진해도 지호가 늦은 시간까지 센터에 머무는 일은 드물다. 일전 김 반장의 특훈 같은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고, 다들 지호를 아직 미성년자라고 외쳐 대며 열 시 전에 집에 보내곤 했으니까.

연구 팀 소속도 아니기에 야근할 리가 없고, 평상시에도 이 늦은 시간을 돌아다니는 일은 없다. 그러니 지호가 여기 있단 걸 알고 있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스토킹인가요?”

“업무상 어쩔 수 없어서요. 그래도 사생활은 철저히 보장해 드렸어요. 가까이 갔으면 절 인식하셨을 거 아녜요.”

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주리 헌터와 꼭 닮은 얼굴이라 자꾸 친숙한 느낌이 드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같이 있을 사람으로는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너무 불편했다.

“업무라고요? 저를 감시하는 일이요?”

“혼자 있는 상황이 드무시더군요. 어쩔 수 없이 뒤를 좀 오래 밟았어요. 다들 부지런하기도 하지. 어찌나 여기저기 쏘다니는지, 피곤하면 이동 가능 거리도 짧아지는데 큰일이네요.”

“뭐 하는 분이세요?”

김 반장을 향한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했던 터라 이 상황은 더더욱 이상했다. 주원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지호가 수상쩍어하며 다가오지 않자, 그는 부득불 다가와 지호의 손에 자기 명함을 쥐여 주었다.

“전국 양배추 운송 연합?”

“배송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이거 영업하려고 절 기다린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일하는 거라니까요. 저희 팀이 최근에 균열로 진입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근데 이쪽엔 무력이 좀 부족해요. 사실 많이 부족하죠. 일반인이 대다수라서요.”

“뭐 택배나 퀵 그런 거 하는 분들이세요?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균열로 배달을 시키지……. 아니, 위험해요. 들어가시면 안 되죠.”

가뜩이나 균열 부근에 가는 건 무섭다는 핑계를 대 오던 사람 아닌가. 지호가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주원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었다.

“일단 도움이 좀 필요해요. 위험한 사람이 있는데, 저희 힘만으론 어떻게 안 돼서요. 헌터들 측에 정식으로 구조를 요청하기엔 뭐라고 할까, 불법적인 일이라서.”

“그럼 저도 못 도와드리죠. 저 이제 정식 헌터란 말이에요.”

“압니다. 다행이에요. 좀 더 경험 많고 일인 분 할 수 있는 헌터가 되었단 말이잖아요. 누나가 매번 아직 멀었다고 이야기하길래 걱정했는데, 임 헌터만큼 도움되겠어요.”

“뭐라고요?”

주원의 이형 에너지가 순식간에 지호를 감쌌다. 그 공격적인 태세 전환에 지호는 너무 놀라 안쪽에서 반대 방향으로 에너지를 전개했다. 그 찰나의 순간, 지호 주변에 이형 에너지로 만들어진 벽이 생겼다. 주원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네요.”

발아래가 쑥 꺼졌다.

지호는 질겁하며 자신을 고정했다. 허공에서 뚝 멈춘 다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연수 센터 앞이 아니었다. 어느새 이동해 왔지? 박 팀장 정도 되는 능력자들도 이 정도로 순식간에 타인을 옮기지는 못한다. 심지어 이동 에너지를 막을 방법도 알고 있었는데도.

주원은 지호에게 가하던 이형 에너지를 없앴다. 압박이 사라지자 몸이 좀 편해졌고, 지호 역시 힘을 도로 갈무리할 수 있었다.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는지, 주원이 차분히 첨언했다.

“이쪽에서 이형 에너지로 누르고 지호 씨가 반발한다는 간단한 원리를 기억해 봐요. 순식간에 한쪽을 찢고 나오지 않는 한, 지호 씨는 당장은 본인 에너지 채로 제 에너지 안에 있는 거랑 다름이 없잖아요. 사실상 들고 가 주십시오, 하고 이동 능력자에게 자기를 진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아니, 원래 그 흐름을 끊어서 막을 수 있잖아요.”

“이형 에너지 교환 없는 평상시에는 그렇죠. 여러 가지 응용을 해 봐요. 이런 식으로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울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납치와 다행이 한 문장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지호를 어이없게 했다. 사람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아무 말도 못 한다. 정신을 좀 차리는 사이 주변이 보였다. 천장 높은 어두운 실내에 균열 경계가 보이는 곳.

지호는 여기가 어딘지 금세 알았다. 주안 공단 건물 중 하나겠지. 그리고 균열이 건물 사이에 걸쳐져 중첩된 곳 중 헌터들이 쓰고 있지 않은 빈 곳일 것이고.

“왜 이런 짓을 해요? 주리 언니가 이러는 거 알아요?”

“그럴 리가요. 제 목숨이 좀 소중해서.”

“용건이 뭐죠? 집에 갈래요.”

“그 전에, 이걸 좀 봐 주시겠습니까? 실종자들이 보내오는 구조 요청들입니다.”

주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지호는 천장과 바닥 그 사이 어중간한 어딘가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성 팀장이 했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이쪽 균열에서 계속 구조 요청이 오고 있단 것. 저편 중계기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더라도 거리가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란 가정까지 떠올라 지호는 약간 괴로워졌다.

“저는 경계 넘어가는 방법 같은 거 몰라요.”

“불안정한 방법이지만, 저희가 약간 압니다.”

“저희요?”

“우리 전양련도, 실종자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서요. 헌터들은 이 정보를 은폐하려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을 리가. 지호는 여기서 신호가 잡힌다는 소식조차 이제 막 듣고 온 참이었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던 지호는 결국 바닥으로 내려왔다.

“실종자들을 구하러 균열에 들어가겠다는 무모한 말을 하는 건 아니죠? 경계 저편에 있을 게 당연한데.”

“실종자들이 경계를 넘어오는 건 불가능할까요? 우리가 그들과 위치를 파악해서, 유도한다면…….”

“오다가 큰 위험을 만나지 않을까요. 경계 너머가 어떤 모양새일지도 모르는데.”

“그렇죠. 하지만 괴물들은 경계를 넘어 다니잖습니까. 그것들을 저 작은 균열 안에서 유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신경이 쏠린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탈출할 수도 있을지 몰라요. 뭐라도 해 봐야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미끼가 되어 달라고 저를 납치해 온 거군요.”

지호는 덤덤히 말을 정리했다. 주원은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걸 부정하지도 않았다.

헌터들은 실종자를 구하러 경계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다 해도 언제 닫힐지 모를 균열을 두고 안쪽으로 진입하란 명령은 내리지 않는다.

공권력이 돕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런 집단을 만들고 있었다. 지호는 언뜻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주원의 얼굴을 외면했다.

“제게 동의도 없이 사람을 납치해 와 놓고, 인제 와서 이런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절박하다는 사람들이 이 이상의 사고를 치기 전에 수습하려면 이런 방법밖엔 없었습니다.”

“사고라뇨?”

주원은 균열 경계에 잠식되지 않은 공장 반대편을 가리켰다. 여태 그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던 지호는 몸을 돌리자마자 멀쩡히 보이는 ‘그 기계’에 당황했다.

“이게 뭔지 알고 저한테 보여 주는 거예요?”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거래되는 마도기죠. 지호 씨가 이걸 추적하고 있단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뒤져 봐야 꼬리 잡긴 어려울 거예요. 이걸 만들어 유통하는 놈들까지 있는 마당이니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죠. 피 끓는 마음으로 내 자식 살아 돌아오기를, 내 가족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 정리해서 이런 집단에 뛰어들 수밖에 없어요. 방법이 없으니까. 이걸 제각기 방식으로 이리저리 사용해 보다가, 어느 날 벌컥 사고를 쳐 버리죠. 균열이 열리기 전에는 그 날을 기다리며 돈을 모으다가, 균열만 열리면 사람들 눈에 핏발이 서서 달려들거든요. 왜 그러겠어요?”

기이한 방식으로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지호는 왜 이 수상한 기계가 사방에 부서진 채 널려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범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건 이미 사용해서 망가진 균열 강제 생성기예요. 헌터들이 그렇게 부르죠? 사실 이쪽에서 통하는 이름은 좀 직관적이에요. 이거 국산 제품도 아니거든요. 그쪽에선 단순히 도어 오프너라고 부르죠. 균열을 하나의 문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사용 데이터가 자동으로 어디로 전송이 된다더군요.”

김 반장과 특수반 일을 하며 보았던 문 형태의 균열이 떠올랐다. 사실 이런 식의 무자비한 실험들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던 연구가 아니었을까.

“그런 위험한 계획에 동참할 순 없어요.”

이주원 각성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슬퍼 보였지만, 한편으론 이미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헌터들조차 우릴 돕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라도 해 보겠다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조차 막으면서,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툭 치면 울 것 같은 주원을 보면서도 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끝끝내 사과를 속삭였다.

“미안해요. 무작정 뛰어들어선 안 된다고 언니가 그랬어요. 혹시 언니 깨어나면 균열 경계 지나는 법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 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호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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