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어린 헌터를 다독이며 성 팀장은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 힘 없던 가족조차 타인을 위해 죽었는데,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할 줄 알아 걱정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감사를 바라도 되는 거냐고 묻는 말이 어찌나 다행스럽고 짠한지.
사실 전혀 이기적인 일도 아니다. 진짜 욕심 많은 각성자들은 진작 이 판을 떠나 돈 많은 사람 목숨을 지키러 갔다. 영웅적이지도 않고, 많은 사람의 감사를 받을 필요도 없는. 그 길을 택한다고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는 못한다. 자기 목숨 던져 가며 남을 구해 주는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지,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잘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지호는 성 팀장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따뜻한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코코아를 홀짝였다.
“제 편 들어 줘서 고마워요. 사실 팀장님한테 이야기하기 좀 미안했어요. 팀장님 양 박사님 좋아하잖아요.”
성 팀장은 마시던 커피를 뿜어냈다. 잽싸게 방벽으로 그 액체들을 막아 낸 지호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들고 있던 물티슈 통에서 새것 하나를 뽑아 주었다.
“아니, 고마워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나이 차이가 몇인데.”
“아니었나요? 저는 두 분이 좋은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팀장님한테 말해도 괜찮을까, 약간 걱정했어요.”
“아녜요. 제 아들이 제대하고 나서 이쪽으로 진로를 잡겠다고 해서요. 애 앞길 터 주려고 양 박사랑 좀 얼굴 트게 한 거지, 특별히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그런 건 아녜요. 사실, 그렇잖아요. 양 박사님은 좀 각성자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서.”
“팀장님도 각성자잖아요.”
“양 박사님이 지호 씨를 비롯해서 능력 탁월한 헌터들을 붙잡고 매번 하는 소리가 뭐죠?”
“어, 숭고한 희생의 증거를 보라!”
“저같이 평범하고 능력 부족한 헌터들은 눈에도 안 찰걸요. 애초에 사내 연애하는 거 아녜요. 지호 씨도 명심하도록.”
둘은 크게 웃었다. 이런 오해가 있다는 사실도 웃겼고, 그걸 해명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웃겼다. 성 팀장은 한참 웃은 다음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저도 양 박사님 한 대 갈기면 그 소문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까 그 경호원분이 어디까지 보고한 건지…….”
“지호 씨 손이 맵대요. 꽤 튼튼한 친구인데요.”
“아니, 그분을 때릴 생각은……. 양 박사님은 언젠가 한 대 때리고 말 거예요. 너무 경우 없는 사람이에요. 여러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봐서 세게 때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호 씨가 때리면 죽을걸요. 그 소문 좀 억울한데, 제 취향은 그런 비리비리한 놈팡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눈만 좀 돌려도 사방에 탄탄한 몸에 멋진 근육이 가득한데 어떻게 제가 한 대 쳐도 목숨이 위험할 것 같은 양 박사를 제 옆에 놓을 수가 있죠? 그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예요!”
성 팀장이 주먹을 휘두르자 지호는 다들 그 이야길 하고 있었더라며 은근슬쩍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퍼트린 기억은 없으니, 본인은 소문 확산에 일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성 팀장은 지호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진 것을 알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지호 씨도 정식 헌터잖아요. 앞으로는 어디 가서 이런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꽤 영향을 받거든요. 가뜩이나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얼굴인데, 시무룩한 얼굴에 자신 없는 태도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불안해할 거예요.”
“어, 허세에는 자신이 없는데…….”
“임보현 헌터 흉내를 낸다고 생각해요. 몰라도 아는 척, 알면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척.”
“티 날 텐데…….”
“그럼 어때요. 이런 급작스러운 공격도 척척 막아 내는 멋진 헌터가 좀 시무룩하다고 누가 불만이겠어요?”
성 팀장이 말과 동시에 들고 있던 컵을 휙 던지는 바람에 지호는 화들짝 놀라며 그걸 공중에 멈춰 세웠다. 액체까지 정지시킨 걸 본 성 팀장은 좋아라 손뼉 치며 웃었다.
“이런 거! 그래요. 이런 거 나는 못한다니까. 지호 씨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줘요. 양 박사 말본새는 좀 괘씸해도 자기가 그렇다고 했으니 뼈가 부스러지도록 굴려 줘야 좀 속이 시원하지 않겠어요?”
“맞아요. 잠도 못 자고 막 야근해라. 집에도 못 들어가라.”
“아쉽게도 지금 그 저주의 대상자는 박사님 아니고 저인 것 같긴 하지만……. 오늘도 야근한 덕분에 이렇게 외로운 초보 헌터님 위로도 하고 좋네요. 혹시 힘들면 언제든 찾아와요. 어지간하면 제 연구실 불은 늘 켜져 있을 거고…….”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던 지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집에 홀로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워 누군가를 찾아 헤맬 날이 많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타인의 친절과 상냥함 앞에 굳이 그런 사족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근데 왜 이 시간까지 연구실에 계세요? 다른 분들 많이 안 계시던데…….”
“제가 사정이 좀 낫죠. 다들 출장 가 있거든요. 주안 공단 균열 앞에 임시 연구소를 차려서요. 지금 그쪽에서 미약하게 전파가 좀 잡히거든요. 구조 신호요.”
“그 좁은 곳에요? 인명 피해가 없다고 그랬는데…….”
“이번 균열에 휘말린 피해자는 없었죠. 근데 균열 내부에서 구조 신호가 와요. 아주 약한 신호로요. 무슨 의미인 것 같아요?”
균열의 크기는 작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 신호를 보내건 세기가 약할 턱이 없다. 주안 공단 균열 내부가 아니라, 경계 저편 어딘가에서 오는 신호가 아니라면.
지호는 금세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들은 아직 경계 저편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넘어오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균열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걸까요?”
“그렇겠죠. 그것도 신호를 전달할 중계기 범위 안에요. 여태까지 균열이 사라지고 난 다음 실종자들이 있는 곳 생태계가 어떨지 의견들이 분분했었는데, 이쪽에서 사라진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더군요. 지호 씨랑 이야기하면서 좀 쉬었으니까, 저는 마저 보고서를 작성할까 해요. 다른 나라들 시차 맞춰서 영상 회의할 때도 됐고요.”
“어, 제가 방해했네요…….”
“그 말 할 줄 알았는데, 아녜요. 산책이건 뭐건 하면서 잠 깰 생각이었거든요. 지호 씨랑 이야기하면서 잠이 달아났으니 전혀 방해 아녔어요. 밤늦었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돌아가는 길에 나쁜 놈들 만나서 허튼 힘 안 쓰게 조심하고요.”
지호는 처음 들어 보는 헌터식 인사에 웃음을 터뜨렸다. 컴퓨터에 회의 신호가 연달아 오고 있어 둘의 인사는 길지 않았다. 성 팀장이 영상 통화를 수신하며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보고 지호는 조심스레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고요한 연수 센터의 공기. 많은 헌터들이 휴식을 취하러 각기 집으로 돌아간 덕분에 오랜만에 조용했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박 팀장은 김 반장을 견제하고, 정체 모를 집단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며 균열 너머에서 실종자들이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양 박사의 도움을 더는 순수한 도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고, 그러는 와중에 남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오기까지.
헌터 본인을 직접 화면에 내보내지는 않지만, 그들의 업적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에 지호의 실루엣은 종종 등장하곤 했다. 뉴스 기사 한 꼭지에도, 슬쩍 지나가다 마주하게 되는 포털 사이트 메인 뉴스에도 있었다.
지호를 찾아다니는 가십 기자들을 피해 다니면서 익숙하게 센터를 오가게 될 무렵에는 이런 노출에 자연스러워졌다. 가끔 선글라스만 낀 채 훈련복 차림으로 균열 앞을 걷곤 하는 또렷한 사진들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사실은 재밌었다.
유명해진다는 것, 누군가 그를 알아봐 준다는 것. 그리고 매일같이 핸드폰에 쌓이는 헤드헌터들의 연락도 지호를 우쭐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겠지.
헌터를 연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 때 부를 이름을 찾는 것이고, 헌터에게 구조된 사람들은 구조자를 기억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러 달려 나간다. 그 과정에서 헌터들은 당연히 선한 행동을 해야 하고, 당연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하는 것처럼 비친다.
[박찬민 :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요. 방호복을 외부로 유출하고 있는 업체를 몇 개 적발했는데 장부상으로만 확인한 터라 나중에 들러야 할 것 같거든요. 지금 특수 팀 업무 맡아서 바쁜 건 아는데, 가능하면 여럿한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고 싶어요. 여유 날 때 말해 줘요. 아, 그리고 몸도 괜찮을 때요.]
곧장 답장하려던 지호는 시간을 확인하곤 멈칫했다. 신체 계열도 아닌 헌터들이 밤샘 근무를 하고 있었다. 지호 본인이야 튼튼하니 괜찮지만…….
화면 위를 맴돌던 손가락은 결국 아무 단어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캄캄한 복도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으니 곧 불이 꺼졌다.
성 팀장은 지호 마음대로 해도 좋다곤 했지만, 방종한 헌터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의식 저편에 설령 헌터로 일하지 않는 각성자라 하더라도 선량한 면이 있으리란 당연한 믿음이 있다. 조금씩 비뚤어진 사람들조차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했을 테니까.
모두의 인식 속에 헌터는 당연히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란 인식이 박히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이미 많은 선례가 있던 탓이다. 양 박사를 비롯해 구조된 사람들 모두 아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당연히 우릴 도울 거라고.
지호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두 헌터 사이에서 고민했다. 박 팀장이 무작정 정신계 능력자라고 배척하는 종류의 차별주의자일지, 아니면 지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김 반장을 꺼리는 것일지 알아야 했다.
두 사람과 각자 함께할 때는 아무튼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은데 그 방향이 참 달랐다. 결과적으로 둘의 의견이 갈라질 때, 어느 쪽이 더 올바른 길인지 분간할 능력.
그런 걸 갖고 있다면 아무도 지호를 어린애 취급하며 현장에서 밀어내려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보현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를 흉내 내려고 안간힘 쓸수록 지호는 보현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생각의 흐름을 툭 끊으며,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찍힌 번호는 당연히 모르는 번호다. 이 시간까지 스팸이라니, 어딘가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좀 더 살기 좋아져야 할 텐데. 지호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보통의 스팸 전화라면 같은 번호로 몇 번씩 연락이 오는 일은 잘 없다. 그러나 전화는 또 왔다. 끊자마자 다시 연결되고, 또 연결된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이 번호가 헌터 소유라는 걸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있었기에, 지호는 공공재가 되어 버린 자기 개인 정보의 유출지를 찾아내는 헛수고를 하는 대신 그냥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