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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97화 (98/260)

97화

쓰러진 조수가 바닥에 피 섞인 침을 탁 뱉으며 바닥에서 상체를 세웠다. 진짜예요? 하고 묻는 지호에게 양 박사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제가 저 대신 맞을 사람을 왜 데리고 다녀야…….”

“성 팀장님이 보조로 붙여 주셨어요. 분명 아무 소리나 해 대다가 분노한 각성자한테 두들겨 맞을 일이 있을 거라고요. 첫 타자가 그 이지호 헌터가 될 줄은 몰랐는데요.”

“방금 이 사람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못 들었어요? 비켜요!”

“원래 연구 외엔 크게 관심 없는 분이셔서 그래요. 아시겠지만, 다른 데 관심이 있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결과를 낸 사람인걸요. 그리고 이지호 헌터가 때리면 박사님 죽을 수도 있어요.”

“아니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그런 말을!”

양 박사가 끼어들려 애썼으나 지호는 양 박사를 냉정히 무시하며 옆 사람을 일으켜 주었다. 그는 도움에 감사하며 뺨을 문질렀다.

“신체 계열 중에서도 꽤 튼튼한 편인데……. 이 기세로 박사님 때렸으면 우리 지금 장례식장 수배하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이 사람 엄청 허약하다고요.”

“진작 뒈질 목숨 우리 아빠가 건져 놨더니 개소리를 하잖아요.”

조수의 임시 방문증에 쓰인 이름은 간결했다. 송한결. 양 박사와 달리 책상머리에서 글이나 깨작일 체격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신체 계열이면 기본적인 체력을 위해 몸이 재구축된다고 하니까.

“양 박사님과 똑같은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대의를 위해 한 번만 참아 주세요. 눈에 안 띄도록 챙기겠습니다.”

“송한결 씨. 김 반장님하고 같이 떠나지 않으신 게 제가 양 박사님을 팰 거란 생각을 해서였나요?”

“사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경호원이긴 한데, 평소엔 연구 보조도 겸하고 있어요.”

“아하.”

“사방에서 헛소리 많이 하세요. 방금도 아마 생각 없이 하신 말씀일 거고요.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있나요?”

“한 대 더 때리려는 거 눈치채셨어요?”

“또 맞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요.”

지호는 웃으며 주먹을 내렸다. 양 박사를 칠 기회는 언제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 사람은 사방팔방에서 얼굴을 내미니까.

“납골당엔 혼자 갈래요. 경호원분이 양 박사님 좀 챙겨 줘요. 저렇게 아무 말이나 하시다가 어디서 총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해요.”

“곤란하네요. 총은 못 막을 것 같거든요.”

“다음엔 총이라도 준비해야겠는데요.”

양 박사가 경기를 일으키건 말건 지호와 한결은 차분히 인사를 나누었다. 지호는 양 박사를 비롯해 아빠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저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번듯한 연구실 건물 안에서 균열 문을 여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리라 누가 추측할 수 있을까.

지호는 피로감을 느꼈다. 온종일 김 반장을 따라다니며 특수 팀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 박사를 어디서 만났는지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몸이 다 낫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니리라.

지호는 그가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던 가족의 죽음이, 사실은 별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양 박사는 말로는 이 선생님께 감사를, 이 선생님 덕분 운운하며 깐족거렸지만, 실상은 아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신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그럴 것이다.

잠시 감사를 표하고 나서는,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바삐 달려가 버린 이유는 그래서였겠지.

무작정 거닐다 꽃집을 만나 꽃을 샀다. 엄마가 챙기던 것이라 지호가 직접 사 보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홀로 납골당을 방문하는 길. 지호는 왜 그가 홀로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 너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한 손에는 꽃을, 한 손에는 아빠가 좋아했던 간식을 챙겨 들고서 지호는 조용한 납골당에 도착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즈음이었다. 오랜만이라 할 말이 많았지만, 사진을 보자 왈칵 울음부터 터졌다.

익숙하게 감정을 틀어막았을 텐데도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는 기분이 들어 지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빠의 죽음에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양 박사가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했을 때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라도 할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내가 너무 대단해! 가 아니라.

지호는 사방팔방에 자신을 던져 왔다. 그러며 누군가는 거기에 감사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멍청한 희생이 되어 버린다면?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아서였고, 그래서 살아남은 자신을 높이느라 그를 잊어버리면?

잊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지호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은 가족들에게 느껴야 할 유대감과 소속감을 낯선 타인들에서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멋대로 발치에 몸을 던지고는 알아 주길 바라는 스스로가 우습고 비참했다.

눈물은 잠시 흐르다 그쳤으나 서글픈 감정은 끊기지 않았다. 지호는 오래도록 납골당에 머물렀으나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말과 함께 슬픔이 새어 나올까 두려웠다.

* * *

커피를 들이부으며 야근을 반복하느라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지 않았나 싶어 커피 대신 산책으로 잠을 깨우려고 연구실을 나선 성 팀장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지호 씨?”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실험이나 훈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 때문에 협조를 요청한 것도 아니었으니 지호가 센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연구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다. 신체 계열 능력자였으니 한참을 울어야 가능했을 터.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직 병원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갈 데가 없었어요.”

지호 또래의 아이가 있는 성 팀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지호를 일으켰다. 얼마 전 아들을 군대에 보낸 참이다. 고작해야 한두 살쯤 차이 날 어린애를 모른 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괜찮으려고 했는데. 분명 괜찮았었는데.”

균열에서 빠져나와 보현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꽉꽉 틀어막았던 감정을 풀어놓았을 때나 느낄 줄 알았던 슬픔이 머리끝까지 차오르자, 지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보현이 옆에 없었기에 더했다.

“한결이가 연락하긴 했었는데. 양 박사님 때문에 그런가요?”

“박사님이 저희 아빠 때문에 살아남았대요.”

양솔이 대균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성 팀장은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다음 말에는 동의를 표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서 본인이 살아남았으니까 저한테 잘된 일이래요. 다른 헌터들을 위한 기반들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걸 잘된 일이라고 말해도 되나요? 저는 여태까지 박사님이 아빠 덕에 살아남은 사람인 줄 알지도 못했어요.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빠 덕분에 살았다고 말하면서 우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르는 박사님이 되었으면서. 말 한마디에 다들 귀 기울이는 높은 사람이 되었으면서.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죠?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건가요?”

지호가 한 이야기엔 가혹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성 팀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울고 눈물을 닦느라 붉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양 박사님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빠가 그 균열에서 각성자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던진 거 아닌가요? 양 박사님이 그랬어요. 자기 일이 헌터들을 좀 더 강하게 만드는 거라고요. 그게 각성자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요.”

성 팀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호의 어깨를 살짝 잡아끌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환기를 오래 하지 않아 뜨끈하고 답답한 공기가 가득하긴 했지만, 아무튼 싸늘한 복도보다는 나을 것이다.

“맞아요. 그랬죠. 남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고 사과하기보다는 이후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 뛰어가 버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말은, 음, 분명 잘못했죠. 우선 좀 들어올래요? 오해라곤 말 안 할게요. 양 박사는 좀 극단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그 의도는 분명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거거든요.”

“팀장님.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각성했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아무도 나를 몰라 준다고 해도 제 목숨 바쳐 세상을 구하고 그런 일 같은 건 못 하겠어요. 누군가 절 기억해 줬으면 좋겠고, 제 도움에 감사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서 작은 뿌듯함을 얻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구한 사람들이 양 박사님처럼 저를 잊어버린다면 싫을 것 같아요. 두고두고 기억하며 칭송해 달란 건 아녜요. 그치만 한 번 인사하고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야속할 것 같아요.”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게 잘못은 아니죠. 나쁜 것도 아니고요. 누구나 그래요. 잘했으니 칭찬받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예요.”

일찍 각성했기에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으나 사실은 지호 엄마와 비슷한 나이인 성 팀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어린 헌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제가 사람들을 몇 번 구했잖아요.”

지호는 성 팀장이 붙드는 대로 연구실 안으로 느릿하게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렇죠, 많은 사람을 구했죠. 더 많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하고 성 팀장이 중얼거리자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저는 그냥, 살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구하고 영웅이 되고 싶고, 그런 거창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녜요.”

“알아요. 우리 모두 살고 싶어서 죽었잖아요. 누군들 죽고 싶어 하겠어요. 평범한 자살자는 각성하지도 못해요.”

성 팀장이 권한 자리에 앉은 지호는 어깨를 덮는 겉옷과 무릎 담요, 따뜻한 코코아에 발 난로까지 받고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성 팀장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따뜻하니 좀 낫죠? 여기 물티슈 있어요. 얼굴 좀 닦고.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말아요. 아프니까.”

“재난 영화들을 좋아했었어요. 거기서 정말 멋진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좋아했었고요. 그걸 흉내 냈던 거예요. 용기도 뭣도 아니었어요. 만용이었죠.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근데요. 그런데도 제가 구한 사람들이 저한테 감사 정도는 해 줬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살았다는 인사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요. 헌터지만, 사람인걸요.”

“그럼요. 다들 운이 좋았던 거잖아요. 누군들 각성자로 되살아날 거라고 알고 있었겠어요? 자기 선택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돼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누군가를 구해도 괜찮고. 감사받고 싶어서 움직여도 돼요. 다들 오히려 감사하겠죠. 목숨값이 감사 인사로 치러질 수 있다니, 오히려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어요.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느낀 그 순간에, 나를 구해 주러 올 한 사람. 그 사람이 감사를 바란다고, 혹은 멋져 보이고 싶다고 느낀다고 내 목숨 구해 준 일이 없었던 게 되나요? 오히려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지 않겠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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