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지호는 눈을 끔뻑였다. 김 반장이 한숨과 함께 첨언했다.
“협조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조직들에게는 일정 기간마다 연구 성과를 보고할 것을 조건으로 두거든. 연구 자료 확인하러 왔단 뜻이다.”
“오랜만이죠? 제가 이래저래 많이 바빠서 시간 내서 보자고 하고는 제가 한 말도 못 지켰네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지호 헌터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네요. 특수반 일 해 보니 어떻습니까?”
“음, 잘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원천 차단하는 게 역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양 박사는 웃었다. 어째 막둥이 보며 흐뭇해하는 장남 같은 웃음이라 지호는 약간 불편해졌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양 박사의 각성자를 향한 사랑은 과한 데가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많은 걸 겪고, 많은 입장에 서 봐야 해요. 그래야 좀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아, 개발 중인 물건이긴 한데, 균열로 통하는 상시 통로의 가능성을 찾았거든요.”
“뭐라고요?”
대답한 건 지호가 아니었다. 김 반장의 얼빠진 음성에 양 박사는 한 걸음 물러났다. 가리고 있던 건 이형 에너지 덩어리가 아니었다. 균열 경계를 틀로 잘라 찍어 놓은 듯한 모양새. 저편으로 흐릿하게 회색빛 정경이 보였는데, 연구실 내부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이게 진짜 균열입니까? 그냥 경계 같은데?”
“아직 지나다니지는 못한다더군요. 흐리게 보이기만 하는 상태예요. 그래도 지속적으로 열려 있는 문이니, 좀 더 확장해서 연구하다 보면 진짜 좋은 소식도 전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과 인력이 더 필요하다곤 하죠. 그렇죠, 소장님?”
한쪽에서 우물쭈물하던 연구 팀 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돔 형태의 균열이 아닌 것을 처음 본 탓에 한참이나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이형 에너지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한쪽에서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기 무섭게 문은 스위치 내린 것처럼 툭 사라졌다.
양 박사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료들을 천천히 넘겨 보다가 서늘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요. 이렇게 몇 분간 열어 놓는 데만 마정석 몇 개를 소모한 겁니까? 이래서야 지속적인 문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잖아요.”
“순환 구조를 가지도록 연구하고는 있는데, 그게 아직은…….”
“언제까지 아직일 것 같습니까? 최근 이 팀에서 나온 게 하나도 없는데…….”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지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양 박사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 반장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처럼 팔짱을 꼈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이 더 찡그려지자 일부 연구원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지호는 그를 모른 척하려 애쓰며 물었다.
“문이 계속 유지되는 게 중요한 건가요? 열었다 닫았다 해도 되잖아요. 저기서 뭐가 넘어올 줄 알고…….”
“오, 아주 중요한 문젭니다. 이지호 헌터가 얻을 레벨의 정보가 아니긴 하지만, 이왕 특수 팀 맛을 봤으니 알아 두는 것도 좋겠어요. 이쪽 세상과 균열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죠?”
“그, 그런가요?”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 쪽과 괴물들의 세계가 묘하게 중첩되는 그 지점이 우리에게 재앙으로 나타나는 균열이고, 저쪽은 뭐라고 부를까요. 아무튼, 저쪽 세계가 있는 거죠. 여기도 균열이 자주 열리는 지역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매번 나타나는 괴물의 종류가 다르거든요. 급성 균열 말고 일반 균열에는 특수한 형질이 종종 나타나는 거 알죠? 예전 송도 균열의 전파 방해 현상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것들도 일정하지 않죠. 결과적으로 이 동네 균열이 매일 같은 곳에서 열린다 한들, 저쪽 세계와도 같은 위치에서 겹치는 건 아니란 의밉니다.”
지호는 이해가 느려 눈만 끔벅였다. 그의 임시 파트너는 가장 중시해야 할 부분을 집어 주었다.
“이번 수원 실종자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서 판교 균열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실질적 거리가 수원과 판교만큼의 거리 이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균열이 열리더라도 그 실종자들이 거기에 얌전히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단 뜻이기도 하지.”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하러 가요?”
“그래서 계속 열린 상태를 유지하는 이 문이란 게 중요한 겁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고정된 좌표인 셈이니까요. 이걸 기준으로 실종자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고, 후퇴할 길도 안정적으로 확보되니 이제는 실종자를 찾으러 갈 팀도 꾸릴 수 있게 되겠죠.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뻐할 겁니다.”
양 박사는 에너지 연결이 끊긴 문을 쓸어내리며 설명을 마쳤다. 듣고 보니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 발명인지 알 것 같았다.
“계속 이 연구실에서 연구하나요?”
“이렇게 중요한 자룐데 우리가 가로채면 안 되죠. 그래도 이 팀이 오랫동안 만들어 낸 것들인데요. 에너지 제공을 비롯한 추가적인 문제들은 앞으로 다른 팀과 공조해서 해결 방법을 찾아보는 쪽이 빠를 겁니다. 이쪽으로 연구 팀을 많이 돌려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에요.”
“박사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신가 봐요.”
언뜻, 양 박사와 김 반장의 시선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박사는 대답 대신 생긋 미소 지은 뒤 들고 있던 자료들을 옆 사람에게 넘겼다.
“그럼 이걸 포함해서 보고 자료들 다 올려 줘요. 나는 오늘 지호 씨랑 갈 데가 있어서요.”
“저랑요?”
“네. 김 반장님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이지호 헌터는 제가 다른 데로 못 가게 잘 챙기도록 하죠.”
김 반장은 순순히 그러겠다며 먼저 연구실을 떠났다. 지호는 그의 임시 파트너가 양 박사의 말을 지나치게 잘 듣는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반장님 약점이라도 잡으셨어요?”
“네?”
“반장님이 양 박사님한테만 고분고분하거든요. 모르셨죠?”
양 박사는 지호의 속삭임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김 반장의 약점을 공유해 주는 멋진 방법 대신 다른 수단으로 지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해요?”
“오늘요? 저 퇴원한 날?”
어리둥절해하는 지호의 출입 허가증을 도로 받아 옆 사람에게 건넨 양 박사는 모처럼 단정히 입은 옷매무시를 다시 가다듬으며 약간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 아버님 기일이잖아요.”
지호의 입이 딱 닫혔다.
잊고 있었다. 분명 그 날짜란 걸 인식하고 있긴 했는데 정작 오늘이란 생각을 못 했다. 언제나 아빠 기일엔 엄마와 함께 납골당에 들렀었는데.
“전에 구면이라고 인사했던 거 기억나나 모르겠어요. 이 선생님께서 절 구해 주셨거든요.”
아빠 장례식 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이 다녀갔고, 많은 기자가 왔다 갔다. 대균열 당시 살아남은 사람이 소수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줬던 사람이 아빠이기도 해서였다.
지호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빠 덕에 살았다던 사람들은 양 박사 외에도 몇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좀 지호네를 찾아오고 하다가, 이내 자기 삶을 살러 떠나 버렸다. 그들 살기만도 바쁘고 팍팍한 삶이라고 했다.
삶에 스며드는 빈자리마다 그들을 생각했다. 아빠가 살린 사람들. 아빠가 구해 낸 삶.
그러나 지호네를 구하지는 못하고 떠나가 버린 등을 생각할 때면 야속할 때도 종종 있었다. 지호는 너무 많은 말이 목구멍에 치밀어 오른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양 박사를 바라보았다.
“기일 때마다 납골당에 찾아뵈었어요. 종종 지호 씨를 봤고요.”
“저는 박사님을 못 봤는데.”
“제가 찾아가는 시간은 늘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대단한 분이셨어요. 제게 각성자를 위한 삶을 살게 하신 분이신걸요. 이 선생님 아니었으면 개발도 발전도 훨씬 느렸을 거고, 어쩌면 우리는 헌터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대단한 사람인 거라고? 지호 안에 불쑥 반발심이 솟아났다. 이제는 아빠를 생각하며 보고 싶어 우는 어린애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연해진 것도 아니었다. 떠나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가족은 언제나 그리운 법이었으니.
“그렇게 챙기는 사람이 남아 있을 줄 몰랐네요. 길어 봐야 삼 년 연락들 주시던데 있는 줄도 몰랐던 분이 십 년이나 기일을 챙기고 있으셨네. 감사하다고 할 필욘 없죠? 어차피 있는 줄도 몰랐는데.”
고작 장례식 때 얼굴 한 번 비친 것이 전부였던 양 박사가 꺼낼 말은 아니란 의미였다. 지호의 시선이 냉정함에도 양 박사는 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잖아요. 또, 옛날에는 제가 이만큼 뭔가를 이룬 상태도 아니었고요. 그때는 그냥, 뭐든지 다 연구해야 했고 공부해야 했고 알아봐야 했어요. 더 많은 사람을 살려야 했으니까요. 특히 각성자들. 그 사람들이 살아서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잖아요. 얼마나 대단하고 존경스러운지.”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해 일하는 남자의 얼굴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쩐지 한 대 때리고 싶단 생각이 든다. 사실은 한 대가 아니고 여러 대.
“저 혼자 갈 거예요. 박사님은 나중에 따로 가든가 하세요.”
“저랑 같이 가기 싫으신가요? 하지만 아버님께서도 반가워하실 거예요. 그때 구해 주신 덕분에 제가 또 이렇게 지호 씨를 도울 수 있게 된 건데요.”
“박사님이 절 돕는다고요?”
“결과적으로는요.”
양 박사는 각성자를 위해 일한다. 지호는 각성자이고, 그러니 양 박사는 지호를 위해서도 일하는 셈이다. 그런 얄팍한 셈에 지호의 눈은 더더욱 가늘어졌다. 선글라스 쓴 얼굴로도 감출 수 없는 노여움이 흘러나오자 양 박사 곁에서 자료를 추리고 있던 조수가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지호가 내면의 폭력적인 충동과 싸우고 있건 말건 양 박사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가 확립해 놓은 이론과 자료들이 아니라면 지금의 헌터 체계도 있을 수 없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꽤 많아요. 기회가 닿는다면 만날 수도 있을 거고, 어쩌면 센터를 오가며 마주쳤을 수도 있겠죠.”
“아빠의 목숨으로 제 목숨을 산 사람들?”
“그렇게 되나요? 전 그분의 희생에 항상 감사하고 있었는데요. 이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나 지금의 연구 팀도 없었을 테니 모두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감사해야죠. 고매하신 희생을 널리 기리지 못하는 건 아쉬워도.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 다 각자의 자리에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거든요. 이게 다 운명이 아니었을지…….”
지호는 더 참지 못했다.
양 박사 뒤에 서 있던 보조가 번개처럼 뛰어들었다. 덕분에 양 박사 대신 나동그라진 조수는 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찌그러졌다. 지호는 자기가 때려 놓고도 당황해서 주먹과 피해자를 살폈다.
“아니, 어. 왜 그쪽 분이…….”
“대신 맞기 담당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