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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95화 (96/260)

95화

너무 쉬워서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지호는 자기 정도 수준이 되지 않더라도 각성자들이 마음먹고 자기 욕심 채우려고 돌아서는 순간 세상이 지금보다 더 아수라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각성자들이 사람 구하는 데만 정신 빼고 있어서 권력 가진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행일지도.

벽 안쪽에 숨긴 금고를 뜯고 거기 있는 외장 하드와 서버를 파괴한 다음에야 지호와 김 반장의 거침없는 행보는 종료됐다. 여전히 환자의 몸으로도 지호는 그런 일들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악당 된 것 같고.”

“누군가는 해야지. 시간 나는 헌터들 있을 때마다 수색하곤 했었다. 대원이 일당백이라 유용하군.”

“그래서 이 사람들이 빼돌린 정보는 뭐였어요?”

“괴물 시체와 마정석을 가공해서 인위적으로 각성자를 만들려고 했던 실험 자료들. 오해하지 마라. 우리나라 자료는 아니니까. 중국 쪽에서 받은 것들이었어.”

“각성자를 만들다니…….”

“어떤 방식으로 각성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힘을 포기하지 못한 자들의 추한 발버둥이지. 그래도 저런 것들을 큰돈 내고 사 가는 것들이 있고, 그걸 또 실천해서 더러운 실험실 만들려는 놈들도 있다는 게 문제야. 대균열 이후로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되는 게 다 균열 탓이 되어 버려서 실종 신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거든.”

“그런 이상한 실험을 진짜로 해요? 사람들을 데려다가?”

“어. 그러니까 그런 걸 막기 위해서라도 나를 비롯한 특수 팀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거다.”

지호는 박 팀장 휘하가 아니었던 김 반장 소속의 헌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배우며 새삼 충격을 느꼈다. 세상의 더러운 일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박 팀장님한테 협조를 구하면 좋지 않아요? 아무튼 부천 센터를 같이 쓰는데.”

“굳이 모든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있나? 이런 일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박 팀장님은 김 반장님을 싫어하는데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지호는 그 말을 몇 번쯤 꺼내려다 말았다.

누군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말은 전할 필요 없는 종류의 이야기다. 듣는 것만으로 상처가 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아무렇지 않도록 단단해졌다 한들 상처였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험담은 언제나 옮길 필요 없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작업을 마치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던 건물을 나오면서 지호는 총알 자국 박힌 벽들을 눈짓했다.

“총기 소지 신고해야 하는 거 아녜요?”

“왜 그렇게 반응이 늦나? 쏠 때 진작 신고했다.”

멀리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지호 귀에 들릴 뿐인 거리였지만, 곧 가까워질 거다. 방향이 이쪽이었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걸어 다니며 능력을 좀 휘두른 걸로 제법 피곤했다.

“이제 쉬어도 되죠?”

“벌써?”

지호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벌써라니, 이 난리 통을 두 번은 겪어야 한단 뜻인가? 김 반장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가 퇴원하기까지 밀린 일이 많았어. 마음 같아선 열 곳 돌고 싶은데, 그래도 환자니 서너 곳까지만 처리하지. 다음은 시흥이야.”

“시흥요? 지금요? 우리끼리?”

“자네로 충분하던데?”

지호는 신음했다. 김 반장은 꽤 만족한 것 같았으나, 방금 같은 대치 상황에서는 공격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튕겨 내는 방식으로 처리하면 불법 총기 소지자들을 훨씬 빨리 처리할 수 있다며 간략한 조언을 남겼다. 지호는 질색했다.

“총알이 잘못 튕기면 죽어요!”

“우릴 죽이려고 쏘는 놈들이야. 총까지 나올 정도면 어지간한 막장이 아닌 거라고. 무장 집단이 서울 한복판에서 우르르 뛰어나온다고 생각해 봐라. 우리가 규열 때문에 총기 규제가 좀 느슨해진 면이 있긴 해도, 아직 규제 국가란 말이야.”

“어떻게 사람을 막 죽이라고 해요? 괴물도 아니고.”

“사람 뜯어 먹고 습격해 죽이는 균열 속 놈들만 괴물이겠나? 저런 놈들은 결국 다른 종류의 괴물이야. 그런 것들을 사냥하는 것도 헌터가 할 일이지. 이제 다 쉬었나? 출발하자고. 하루는 짧고 할 일은 많아.”

양 박사가 지호를 김 반장에게 붙인 건 혹시 일하느라 혹사당하다 보면 딴짓거리 못 하게 될 거란 확신 어린 선택이었을까? 지호는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이어지는 재촉에 김 반장과 함께 날아오르며 그는 생각했다.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퇴원하고부터 사흘간, 지호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을 잔일 처리에 동원됐다.

폭력적인 상황이 없는 경우가 드물 정도라 지호는 매 순간 놀랐다. 이게 한국이라고? 이게 우리나라야? 뒷 세계 실태를 마주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조폭들을 마주할 때도 그랬고, 총이며 방어 설비를 맞닥뜨렸을 때는 더 그랬다. 개중에는 마정석 설비를 갖추고 있던 사무실도 있었다.

“피곤하네요. 몸이 피곤한 건 아닌데, 그냥 좀 피곤해졌어요.”

“오래 할 일은 아니지. 그래서 후딱 처리하고 치워 버릴 생각이고. 이렇게 한 차례 돌면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이렇게 정보가 빠져나간 줄 알았으면 그때그때 처리하면 안 돼요? 그거 빼 가서 딴짓하면서 뒷 일 하게 놔두지 말고.”

“뭣하러? 자기들이 알아서 돈 들이고 시간 들여 가면서 실험해 주겠다는데.”

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태 고생스럽던 것을 묵묵히 이겨 낼 수 있었던 건, 그게 선량한 의지에서 기반하리라 추측한 까닭이다. 남의 시간과 돈으로 공짜로 실험하고는 결과를 빼앗고 부수는 무뢰배 짓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드나?”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겠죠.”

“균열과 관련된 실험에 필요한 건 다양한 사고방식이야. 그걸 추진할 다양한 팀도 물론 중요하고. 우리 연구 팀은 한정적이고, 정보 제한도 당연히 힘에 부쳐. 모든 걸 꽁꽁 닫아걸어 놓고만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기고 부하가 걸리지. 그들이 가치 있는 정보를 가져갔다고 여기게 하고, 거기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의 결과를 얻어 내길 기다렸다 수확하는 게 나름의 방식이거든. 실망했나?”

지호는 말을 골랐다. 솔직히 실망했고, 얼굴에 다 드러날 터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다행이다. 김 반장을 노려보는 시선까지는 알지 못할 테니.

“이런 일이라서 임보현 헌터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않는 거야. 이번처럼 연속된 균열 사태로 헌터들의 피로가 극에 다다르지만 않았어도 그냥 내 팀을 썼을 거다.”

“이런 일 하는 팀이요.”

“어. 따로 있어야 하지.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대원처럼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게 될 거라서. 하지만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나? 같은 정보로 이런 짓거릴 하는 건 정보 빼돌린 새끼들뿐이야.”

“이런 일 하려는 팀이 있다니.”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다. 누군들 좋아서 하는 일이겠나? 그래도 생각해 봐라. 대원에게 사람들을 직접 공격하고 제압하게 시키진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냥 그들의 실험실에 들어가서 공격을 막거나 튕겨 내고 닫힌 문을 연 다음 책임자를 혼내 주고 자료를 파기했을 뿐이잖아. 그 과정에서 다소의 사고가 있긴 하지만, 해치려고 달려드는 놈들 정도는 막아 줘야지. 놈들까지 안 다치게 사정 봐줄 수도 없지 않나?”

지호는 꽤 오래 침묵했다. 그러나 김 반장 말대로, 지호의 소임은 방어와 동행뿐이었다. 그 사람들과 진심으로 싸우며 공격까지 해야 했다면 지금 정신적 피로는 제대로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유의미한 결과물을 얻게 되면 그걸 헌터들 연구로 공유하게 되나요?”

“얻은 루트까지 공개하니까 비난조는 그만 접어 두지그래. 여기가 마지막이야. 이것만 정리하면 쉬러…….”

김 반장 전화가 울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예, 예. 예? 세 번의 다른 음절 후에 통화가 끊기고, 지호는 임시 파트너의 난처해하는 태도를 읽었다. 무슨 일이지? 이 사람을 당혹스럽게 할 사람이 많지는 않아 짐작이 가질 않았다.

“누구예요?”

“어,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먼저 온 손님이 있는 것 같군.”

이번 장소는 음습한 지하도 아니고 폐건물도 아니었으며 홍등가 사이에 숨어 있지도 않았다. 멀쩡하게 빛나는 새 건물. 연구실이라는 명패가 버젓이 붙어 있는 장소라 지호는 오히려 약간 위축됐다.

“여기 부천 실험실보다 더 좋아 보이는데요?”

“그래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을 것 같군.”

“손님은 누군데요?”

“가서 만나 봐라. 마침 대원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니.”

둘은 입구에서 카메라를 쳐다보며 대기했다. 뜻밖에도 환영 인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헌터가 쳐들어왔는데도 당황하지 않는 곳은 처음이었고, 들어오자마자 김 반장이 입구에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공격을 유도하지 않는 곳도 처음이었다.

“뭐 하는 곳이죠?”

“여긴 거의 연구 팀 산하 기관이 되어 가고 있긴 한데 사실은 외부 팀이라서, 외주에 가까운 일을 맡은 연구실이다. 마석 치료기와 관련된 장비들을 처음 상용화한 곳이기도 하고.”

“부평 각성자 연합 작품인 줄 알았어요.”

“특수 병원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실제 의료기에 접목하는 건 진짜 기술자들 몫이니까. S사에서 부설 연구 팀을 조직했거든. 들어가지.”

지호와 김 반장은 방문증을 받았다. 가야 할 곳은 13층이었다.

“안 부숴도 되니까 좋네요.”

“솔직히 불법을 저지르는 곳인 건 별반 차이가 없긴 하거든. 이게 우리한테 도움이 되니까 협조 형태로 놔두는 거지. 언제고 부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니 구조를 잘 파악해 두도록.”

“헉, 진짜요?”

“뻥이다.”

지호는 욱했다. 김 반장은 시시한 농담을 던진 후에 슬쩍 웃었다.

“왜. 이게 대원의 보호자 방식이잖나. 임보현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좋아했었다고.”

그랬었다.

약간의 추억. 그리고 그리움. 지호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의 보호자를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홀로 쓰고 있는 11층 넓은 집도.

“언니가 이런 일 했으면 다 부숴 버렸을 것 같네요. 하나하나 봐주는 게 아니라.”

“사실 그게 정답이라 안 불렀던 거다.”

불투명한 실험실 문이 열렸다. 필요한지 잘 모르겠는 방역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이 제 1실험실 안에 들어섰을 때, 먼저 온 손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형태적으로 훨씬 위험하잖습니까. 지속 시간보다 안정적인 게 훨씬 중요하다고요! 이 문 지나가다 우리 소중한 헌터 터럭 하나라도 다쳤담 봐요!”

“양 박사님?”

근래는 마주칠 일이 뜸해 목소리를 잊어버릴 뻔했다. 양솔은 네모진 문틀 형태의 이형 에너지 덩어리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다 말고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구겨져 있던 얼굴이 펴졌다.

“오, 이지호 각성자! 아니지, 이제 헌터죠? 축하합니다. 그래도 임시 헌터를 잘 졸업했네요. 진짜 파트너를 빨리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경험 많은 친구와 현장 뛰면서 잘 배워 봐요.”

“어, 박사님이 여긴 어쩐 일로…….”

“상납 기간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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