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런 게 나왔으면 왜 모두에게 알려 주지 않은 거예요? 수원 균열은 다들 갑자기 닫혔다고들 생각하는데요.”
“모두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야.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생기니까. 균열 외부로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막아 가면서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어. 그 넓은 범위를 커버하려면 헌터들이 죽어나겠지만. 그런 걸 요구할 사람이 분명 없지는 않을 거거든. 헌터니까 지켜 달라, 헌터니까 구해 달라. 힘들겠지만 둘 다 해 달라. 항상 있었던 종류의 요구들이지.”
“어떻게 그런…….”
“지금도 실종자를 찾아 오길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잖아. 네가 본 사람들도 그렇지. 그들을 되찾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고 있고. 우리는 괴물과도 싸우면서 그 사람들과도 대립하는 셈이다. 피곤한 일이야.”
결국, 소수가 점유할 수밖에 없는 힘이다. 지호는 김 반장을 비롯한 소수 헌터들이 왜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지 이해했다.
실종자들을 둔 헌터가 없는 것은 아닐 터. 그런 헌터들이나 연구진을 통해 기술이 외부로 빠져나갔겠지. 그들에겐 믿을 게 그것뿐일 테니.
“균열을 닫을 수 있다면, 열 수도 있나요?”
“그쪽은 제대로 확인이 되질 않았어. 닫는 것도 이번에야 처음 써 봤을 거다. 내부로 들어간 연구원들이 살아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태라 재차 같은 방법을 쓰자고 말할 수가 없고.”
“판교 쪽에서 잡힌다던 건…….”
“연구원들이 발산하는 신호지. 방호복도 챙겨 입고 있긴 할 텐데,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각성자들을 희생할 수는 없는 터라 균열 닫는 일에는 일반 연구원이 지원했거든. 닫기 전에 안전 구역 확보도 했다곤 하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어떻게 그런…….”
“그 연구원 등 떠민 사람 아무도 없어. 그쪽도 자원했고. 어차피 실종자를 찾으러 균열을 뒤져야 하는데 마침 잘 됐다고 하더군. 우리 마음 좀 편하게 해 주려고 했던 이야긴 거 빤히 보였지만.”
김 반장은 태블릿을 꺼내느라 펼쳐 놓았던 것들을 갈무리하며 지호 침대를 조정해 그를 도로 눕혀 주었다. 먹자마자 누우면 안 되는데, 하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떠오른다. 지호는 그 연구원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린 채 누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무 힘도 없으면서……. 어떤 괴물을 만날 줄 알고…….”
“그 친구 가족은 육 년도 더 전에 실종됐거든. 일반인이 아무 장비도 없이 균열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 자료 같은 건 없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은 아닐 거야. 고작해야 몇 달이 한계라고 보고 있거든.”
“가족이 죽은 곳에 따라 죽으러 간 걸까요?”
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 반장은 여태 계속 그랬던 것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지.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았기를 빌어 주는 수밖에.”
* * *
병원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지호는 물론 중상자로 분류되지만, 자가 치유가 가능한 치유계 능력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처치가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사실은 가능하면 빨리 나가 달란 이야기도 덧붙었다. 병상이 거의 전부 만 석이었다.
퇴원하며 돌려받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멀쩡하질 못했다. 옷만 세탁되어 있고, 나머지는 먼지나 좀 털어 냈나 싶은 꼬질꼬질한 모양새다. 팔찌 같은 것도 있었다.
이게 뭐더라, 하던 지호는 뒤늦게 부평 각성자 연합에서 선경에게 받았던 물건을 생각해 냈다. 물에 씻어 내도 별반 문제가 없어 몸에서 잘 떼어 내지 않던 것이다. 나중에는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그냥 하고 다니는 게 되었는데, 지호 물건 중에 각성자 연합 제작품이라곤 이것뿐이니 아마 이게 구조 신호를 보냈을 것 같았다.
“신통하네.”
지호는 그걸 도로 손목에 찼다.
이형 에너지가 몸을 부식시키는 걸 늦춰 주는 물건이었다고 했다. 균열에 자주 들어갈 거라면 지호에게도 필요한 것일 터. 그래서 항상 챙겼고, 그런 놀라운 기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명은 쪽으로 덕분에 일찍 치료받았다고, 선경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해 달란 메시지를 남긴 지호는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여전히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부러진 팔만 좀 제자리로 돌아왔다뿐이지, 아직도 환자는 환자였으니까.
김 반장이 제공해 준 정보에 따르면, 그가 추적하고 있는 건 순수한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연합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호가 만났던 그 사람들과는 궤가 다른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균열을 여닫는 기술’을 가진 집단……. 그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니 이 세상이 어떻게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훼까닥 한 놈들이 사람 많은 대도시에 급성 균열 한 번 열어 버리면 진짜 대재앙일 텐데.
“왜 이렇게 늦었나?”
“아니 퇴원하고 소지품 받자마자 곧바로 내려왔거든요? 저 아직 환자예요.”
“오래 쉬면 감각이 떨어진다. 움직이면서도 꾸준히 치료 에너지 돌리고.”
김 반장은 지독한 사람이었다. 환자에게도 봐주는 일 없이 통상적인 절차를 거친다. 특히 지호에게는 가혹할 정도였다. 지호는 불만스럽게 바닥을 툭툭 차며 앞으로 휙 걸어가려다 바닥이 휙 꺼져 아래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하고 한참 소리치던 그는 제자리에서 정신을 차렸다.
“아니 예고라도 좀!”
“괴물은 예고하지 않는다. 경험했잖아.”
지호는 이를 갈았다. 균열에서 그에게 침식해 오던 퀸의 정신 지배 역시 예고가 없었다. 경험했기에 알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다. 김 반장은 정말 짐작도 못 할 순간마다 지호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했다.
“학대야. 아동 학대로 신고할 거예요. 저 아직 미성년자인 거 아시죠?”
“몇 달 후면 뭘로 신고하겠다고 말할 셈이지?”
“이런 죄 저런 죄로 신고할래요. 그것보다 우리 오늘 어디 가요? 아직 전투는 좀 무리일 것 같은데.”
“균열도 없는데 무슨 전투? 힘이 남으면 치료에나 집중해라.”
“아니 반장님이 자꾸 방해하잖아요!”
지호와 김 반장은 생각보다 친밀해졌다. 지호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김 반장이 매일같이 찾아온 덕이었다. 그는 대화하는 중간중간 지호를 곤경에 빠트리곤 했지만, 대체로 솔직하고 생각보다 유쾌했다. 그와 투닥거리면서 지호는 자기가 김 반장을 꽤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간 김 반장이 제공해 준 건 정신계 관련 훈련뿐만이 아니다. 개인 브리핑을 포함해 본래 지호의 처지에서라면 알 수 없는 정보들까지 알짜배기가 가득했다.
“난 육체파가 아니니까 더 많은 걸 파악해야 해. 환상을 보는 중에 헛소리하는 놈들이 많은 건 알고 있지?”
“아는 게 있어야 뭐라도 뱉게 한다 이건가요? 괴물들한테 쓸 건 아닌데.”
“맞아. 지금 내가 균열로 파견되는 것 같나? 일전에 퀸 패러사이트 같은 놈들 나타날 때 아니면 난 균열엔 안 들어가. 내가 하는 건 뒤에서 딴짓하는 놈들 잡는 일이지. 다른 놈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
“문제아들 상대하신다고요.”
“그래. 우린 지금 문제아들 보러 간다. 우리 문제아 하나 데리고서.”
“이런 쓸 만한 문제아가 또 어디 있다고.”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안 들어 먹는 녀석이지.”
지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툴툴거리다 나무에 얼굴을 빡 박았다. 코가 얼얼했다. 아니 갑자기 눈앞에? 물론 그런 일은 현실이 아니다. 통증마저 만들어 내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지호는 질색했다.
“아, 거 좀!”
“선글라스 써. 신원 사방팔방에 뿌리고 다닐 거 아니면.”
김 반장의 기능성 선글라스와 달리 지호 것은 그렇게 성능 짱짱한 물건은 아니다. 얼굴을 가릴 용도로 커다랗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골랐던 지호는 가뜩이나 둥글고 순해 보이는 얼굴이니 좀 날카로운 거로 가져오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보편적이고 얇은 것을 집어야 했다. 그냥 처음부터 지정해 줄 것이지.
“그래서 우리 이렇게 특수 요원처럼 얼굴 가리고 뭐 해요?”
“회유가 안 통하더라고. 때마침 쓸 만한 무력이 손에 들어왔는데 안 쓸 이유가 있어?”
쓸 만한 무력? 지호는 김 반장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발로 문을 팡 걷어차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 얼굴부터 덩치까지 험악하기 짝이 없더니 행동거지마저 이러니까 대놓고 조폭 같았다.
“뭐야?”
“알고 왔다. 고재욱이 나오라고 해.”
“우리 삥 뜯는 건 아니죠?”
“뭐 하는 놈이야!”
펼치고 있던 감지 파장 덕분에 지호는 날아드는 이형 에너지 화살들을 막아 냈다. 사각지대에서 날아오는 거였다. 김 반장은 그들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제법 너그럽게 웃었다.
“찔리는 놈들이 찌르면 이러더라. 뒤집어도 되겠다. 영업 오늘까지만 해.”
“이 미친놈이!”
꽤 많은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제각기 다른 형질의 에너지들. 손발을 맞추는 게 익숙지 않은지 날아오던 공격끼리 충돌해 소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호는 김 반장과 자기 주변으로 이형 에너지 방벽을 쳐 둔 채 떨떠름하게 물었다.
“여기 사람들 뭐 하는 사람들인데요?”
“각성자들과 협조하면서 연구하던 일반인들이 어느 정도 지나면 슬쩍들 그만두거든. 그런 놈들이 이 뒷구멍으로 기어들어 와서 정보를 돈으로 팔아 치우지. 각성자들의 목숨으로 쌓은 것들인데, 공짜로 먹고 나르겠다니 말이 돼?”
보현이 설명했던 것들이 얼추 떠올랐다. 그때 보현은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새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다고만 말했었다.
“언니는 이런 이야기까진 안 해 줬었는데.”
“이런 뒤처리는 영웅한테 안 맡기거든.”
보현은 지호의 영웅이었지만 김 반장의 영웅은 아닐 텐데. 지호가 미심쩍어하며 답하지 않자 김 반장은 파트너에게 손짓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없는 건 알지만, 이동 능력자 오거든 바로 능력 차단해. 할 줄 알지?”
“아니, 모르는데요! 그런 거!”
“기절시키면 돼. 물리력을 행사하라고.”
어떤 고급 기술이 나올 줄 알았던 지호의 맥이 탁 풀렸다. 그 와중에도 그들을 향해 날아오던 무수한 공격들. 균열 안에서 괴물들의 일격과 습격이 훨씬 무시무시했다. 내부에 각성자는 고작 셋. 나머지는 이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총도 있네요?”
“불법이라 슬슬 쓸어 버릴 때가 되긴 했었어. 어차피 총기가 이형 에너지에 안 통하는 거 알지?”
“밀리긴 하는데요.”
“그런 거에 밀릴 거면 헌터 그만둬야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알들이 방벽을 한 치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박히거나 튕겨 벽에 튀자 주변에서 비명을 질렀다. 방벽이 구형이라 튕기는 방향이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이다. 일부는 튄 총알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십여 명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지호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제가 균열 괴물이 된 것 같네요. 막 사람들 다 꼼짝 못 하고.”
“얼추 비슷하지. 생태계적 입장으로 보면 포식자잖아. 가자. 고재욱이 빼돌린 양 박사 자료 챙기러.”
이동 능력자가 오는 일은 없었다. 지호는 잠긴 문을 염동력으로 뜯어내고 온갖 공격을 막아 내면서 그냥 걷기만 했다. 김 반장은 태연하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서는, 몇몇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 주며 원하는 정보를 얻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