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상황과 단어에 반응해 지호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선 닿는 곳에 떨어져 있던 헬멧은 빠르게 남자의 머리에 올라 앉았다.
그런데 헬멧을 씌우는 상황이 너무 급해, 남자의 머리와 헬멧 입구가 한 번 부딪쳤다. 곧바로 방향을 조정해 그걸 다시 씌우는데 헬멧과 목 부분이 맞물리기도 전에 퍽, 뭔가 터졌다.
지호에게까지 뜨거운 액체가 확 뿌려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뜨거움. 그게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황망함에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지호는 당황했다.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약간 부딪혔던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세게 부딪혔나? 아니면 너무 세게 힘을 줬던 건가.
혹시나 당황한 자기가 나머지 한 사람마저 해칠까 봐 지호는 염동력을 해제했다. 하지만 그쪽엔 문제가 없었다.
“헬멧을, 아니, 저는 아무것도…….”
선글라스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지호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게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앞을 잘 보려고 선글라스를 벗어 옷에 문지르는 지호를 본 인질은 신음했다.
“당신, 본 적 있어요. 그 어린 헌터군요.”
“아니, 전, 아니에요. 잘못 보셨는데요.”
“그때 사람들을 구하려고 몸을 던지던 거 봤어요. 각성자고, 헌터니까.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겠죠? 저희를 도와줘요. 가족들이 아직 균열 안에 갇혀 있어요.”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에 벌어진 초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토악질이 밀려왔다. 괴물 때문에 벌어진 더 참혹한 상황들을 많이 보았으나, 지금 이 상황은 지호 본인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고 혼란스러웠다.
“이거 제가 한 건가요?”
지호는 차마 나머지 한 사람의 헬멧을 벗기지는 못했다. 대답 없이 죽은 이의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나머지 한 사람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천천히 헬멧을 벗었다.
창백하고 해쓱한 뺨의 여자가 거기 있었다.
“설명해 줄게요. 대신 신고하지 마요. 잘못 신고했다고 번복해요. 나도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게 옳은 행동이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게, 일단. 일단 여기를 좀 나가요. 이 끔찍한 공간에서…….”
“그쪽도 갑자기 막, 그, 저렇게 되는 건 아니죠?”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텐데요.”
죽은 생선도 이보다는 생기 있는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호는 어쩔 줄 모르다 결국 소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민 씨, 제가 잘못 봤어요. 착각했나 봐요. 벌써 오고 있는 거 아니죠? 미안해요. 아직 출발 안 했어요? 다행이다. 판교 균열 조용해요. 아직 두 분도 못 만났고요. 뭐 미심쩍은 거 있으면 연락할게요. 네. 조심하고 있어요. 알겠어요.”
지호는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아직 헌경에 신고를 넣지 않았으니 이쪽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여자는 통화 내용을 듣고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선은……. 제가 아는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아는 선에서는 답을 드리죠. 물어봐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죠? 혹시 제가…….”
“아뇨. 헌터님 잘못은 아닐 거예요. 약한 충격에도 무너질 만큼 몸이 약해진 거예요. 아실 텐데요. 헌터들도 많이 겪는 증상이니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알고 있는 것마저 뒷전이었다. 지호는 그제야 균열에 많이 오가는 이들이 겪는다는 현상에 관해 떠올릴 수 있었다. 보현 역시 많이 약해진 상태랬는데, 계속 균열에 드나들면 저렇게 되고 마는 걸까.
시체에선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괴물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후각이 뛰어난 놈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계속 이야기해야 해요?”
“뭐가 오나요?”
여자는 몸을 움츠리더니 황급히 헬멧을 썼다. 괴물이 가까워지기 무섭게 지호가 띄운 에너지 화살이 놈의 머리를 세 방향에서 꿰뚫었다. 그것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여자에게선 짧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지호는 그 괴물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휙 던져 버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실종자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거 아닌가요?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에요. 오래 머물면 이 사람처럼 된다면서요. 어떻게 살아 있다고 자신하시는 거예요.”
“살아 있을 거예요…….”
“그런 근거 없는 확신으로 수원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가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단 말이에요. 내 동생, 살아 있다고요…….”
여자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슬픔에 매몰되어 답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대신 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두운 헬멧 너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쪽 모임 사람들은 다 당신처럼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인 모양이죠? 하지만 이 정도 기술력이 있으면서 왜 그런 과격한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요구하죠? 이렇게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자고 말하면 되잖아요.”
“안 했을 것 같나 봐요?”
“균열을 여닫을 기술이 있으면 당연히 다 같이 연구하고 협조해서…….”
“이지호 헌터. 맞죠?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세상이 그렇게까지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우리가 넘긴 기술들은 지금 온갖 비싼 임대 아파트들에 방어 설비로 사용되고 있죠. 군사 무기로도 개발 중이에요. 심지어 주요 연구 팀장은 돌아오지도 못했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잖아요. 나라가 그렇게 행동하는데 어디에다 항의할 수 있겠어요.”
지호의 입이 뻐끔거리다 닫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그런 삶을 겪어 피폐해진 사람이 눈앞에 있었으니.
여자는 죽은 남자 쪽에 자꾸 시선을 두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숙였다.
“우리 끝이 좋은 꼴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는 입구 비슷한 크기의 균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들었어요. 주안 공단 쪽엔가…….”
“그건 폭발 직전에 막았는데요.”
“그랬나요? 우리 기술이 성공을 맺은 건 줄 알았네요. 아니라니 아쉬워요. 작은 크기로 입구를 열어서 실종자들을 구출하러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균열의 황량한 풍경 저편에서 무언가가 날갯짓한다. 날개 달린 괴물 하나가 뭔가와 싸우는 것이 보였다. 사람인지 다른 괴물인지까진 보이질 않았다.
깨어진 고요 속에서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렴 어때요. 언젠가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게 이쪽 개발 팀 목표고요. 그런 연구는 각성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답니다. 누군가는 우리와 같은 걸 바랄 거거든요. 헌터 일을 하면서도요.”
“이쪽에 기술을 빼돌리는 사람이 있다, 이거예요?”
“누군지까진 몰라요. 물어봐도 소용없고요.”
지호의 머릿속엔 다시 이주원 각성자와 김 반장이 떠올랐다.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이쪽이 어쩌면 진짜 기술 도둑일 수도 있겠다. 심지어 김 반장이 그런 기술들을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 한들 그걸 알아채거나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호는 새삼스럽게 김 반장의 능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자각했다. 그가 그 힘을 나쁜 곳에 쓰고자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이 왜 당신들을 돕죠?”
“글쎄요. 저희와 이해관계가 맞나 보죠. 정확한 건 모른다니까요.”
여자는 그 정체불명의 기계에 손을 짚었다. 지호는 약간 긴장했으나 다행히 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대로 기계에 손바닥을 댄 채 잠시 생각하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아까 우릴 제압했던 걸 보면 신체 계열 퓨어 헌터가 아닌데, 어떻게 아무것도 오질 않죠?”
“뭐라고요?”
“아까 그놈은 피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형 에너지를 쫓아올 놈들이 오지 않네요. 이상한 일이에요.”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호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괴물을 유도하는 뭔가라도 한 거예요?”
“당신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일 거라고요.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먹거리니 굳이 힘들여 먹으러 올 필요가 없겠지만, 당신 같은 헌터는…….”
균열의 공기가 일변했다. 지호의 얼굴이 허옇게 굳자 여자는 조금 웃었다.
“뭔가 느껴져요? 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죠?”
지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가 들어온 방향과 비슷한 쪽이었다. 균열의 공기 자체가 일변했다.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쏠리는 흐름. 공간을 메우고 있던 이형 에너지가 갑자기 흐르고 있었다. 공기나 바람의 흐름과는 달랐다.
그러나 명백히, 거부하기 어렵다.
정신 공격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호는 여전히 자유롭게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고, 제 힘을 쓸 수 있었다. 심지어 저 앞의 여자의 수상쩍은 말에도 대답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뭘까? 뭐가 저쪽에 있는 거지? 어떤 것들이 균열 전체를 선동해 살아 있는 것들을 저쪽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것인지.
“다른 헌터잖아?”
여자는 손목의 작은 패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어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지호였으나, 여자의 말은 쉬이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헌터라고요? 누구요?”
“그런 것까지는 몰라요. 균열 파장 측정기를 해킹해서 에너지를 감지하는 것뿐이라서. 아까 신고는 안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헌경엔 신고하지 않았지만, 지호가 여기에 온 걸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덜컥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호의 말을 그냥 흘려 넘기지 못하고 들어왔을 수도 있고, 김 반장이나 이주원 각성자가 이제야 균열에 진입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들이 같은 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소민은 염동력 능력 외에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이동 능력자라 그쪽 능력 개발에 집중했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 스킬은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끽해야 물체를 움직이거나 멈추게 하는 정도.
박 팀장은 어떤가? 그는 정신계 능력 외에는 보잘것없다는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었다. 당연히 전투 계열이 아니다. 이주원 각성자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전투에 적합한 능력자였다면 이주리 헌터가 그냥 내버려 뒀을 턱이 없었다.
지호는 균열 내부 이형 에너지의 흐름과 수상쩍은 여자를 번갈아 보며 고심했다. 그러나 저울질할 건덕지가 아니었다. 여자를 놓친다 한들 지호가 손해 볼 일은 저 집단에 관한 정보를 늦게 얻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고, 그게 지호가 망설이다 시기를 놓친 탓이라면.
오래 고민할 수 없었다. 젠장, 하고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른 지호의 몸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헌터를 보며 여자는 황급히 돌아섰다. 기계 조작은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균열 흐름이 향하는 곳에 벌써 수많은 괴물이 있었다. 그런데 싸우지는 않았다. 괴물들은 거기 모인 채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며 으르렁거리거나 발톱을 드러내고, 위협만 할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호는 눈치를 살피며 근처 건물에 내려섰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사방에 못 보던 괴물들 천지였다. 지호는 그것들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기면서 고심했다. 혹시 벌써 누군가가 놈들 입 속으로 들어갔나? 아니면 이 방향이 아닌가? 반대쪽으로 가야 했나?
아까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괴물들은 헌터가 풍기는 이형 에너지의 기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주 모르고 있던 정보는 아니다. 갓 각성한 각성자가 자기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뿜어내는 걸 괴물이 어떻게 느끼고 달려오겠느냔 말이다.
혹여 감지 파장을 느끼는 괴물이 있으면 어쩌지 싶어 오로지 눈에 힘을 집중해 신체 능력만으로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 흔적도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이상한데.
척 봐도 괴물들은 하찮은 수준의 놈들이 아니었다. 좀 전에 죽은 시체를 먹으러 헐레벌떡 달려왔던 놈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으니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 열 마리가 넘는다.
균열의 크기로 미루어 짐작하면 오히려 열 마리쯤밖에 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본디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괴물들이 나타났었을 텐데.
생태계가 정리되고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과정을 거쳐 남은 놈들이 결국 이놈들일 테고, 필연적으로 강한 것들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전투 능력 없는 헌터들이 상대하기는 버거울 것이다. 한 마리여도 쩔쩔맬 놈들이다.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에 버금가는 것들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개체가 흔하다면 인류에게 재앙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게 정상이었다.
지호는 기민하게 괴물들의 상태를 관찰했다. 입이 둘인 놈, 팔족 보행하는 놈, 유선형 몸에 에너지체가 떠 있는 놈들 등 여태 본 적 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 여자의 말에 따르면…….
지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정체도 모를 여자의 말에 휘둘려 여기까지 온 거지?
지호는 그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방금 있던 위치로 날아갔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옆에 누운 시체 역시 얌전히 놓여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기계. 마정석 가득 찬 필터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회전하는 내부 부품들이 멀리서까지 보일 정도로 주변 정경을 일그러뜨렸다.
손목을 보며 뭔가를 확인하고 있던 여자는 지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처.
“안 돼!”
여자가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한쪽을 향해 휘몰아치던 균열 에너지들이 일제히 멈췄다.
일순간의 정적 후, 휘몰아치던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었다. 온몸이 쓸려 갈 만큼 거센 움직임이었다. 지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곧 눈앞이 캄캄해졌다.